출생률 높이려 정책대출 쏟아낸 정부, 집값 치솟자 우왕좌왕
출생률 불씨 겨우 살아났는데
상충하는 정책에 혼란만 가중
집값 오르고 가계빚 늘어나자
정부 "디딤돌 대출 줄이겠다"
신생아특례 대상확대는 유지
청년층 "낳으란건지 말란건지"
◆ 저출생 딜레마 ◆
'저출생 극복이 먼저인가, 집값 안정이 우선인가.'
최근 디딤돌대출을 비롯해 정부 정책이 오락가락하는 건 바로 이 딜레마 때문이다. 그간 국내 정책에서는 재정·금융이나 집값 관리 대책이 항상 최우선 순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저출생과 인구 감소라는 국가적 비상 상황이 닥쳐오면서 인구정책과 우선순위를 다투게 됐다. 결혼·출생을 장려하기 위해 대출 지원정책이 필요하지만 가계부채 급증과 집값 상승을 잡기 위해서는 정책 문턱을 높여야 하는 상황이다.
올 들어 수도권 집값이 오르고 가계대출이 치솟자 부채를 관리하는 금융당국을 중심으로 늘어난 주택 관련 정책대출을 조여야 한다는 지적이 계속 나왔다. 28일 한준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확보한 자료에 따르면 대표적 정책대출인 디딤돌대출 잔액은 올 들어 지난달까지 약 18조원이나 늘었다. 올해 1월 34조2717억원이었던 디딤돌대출 잔액은 매달 급증해 지난달 52조5430억원으로 불어났다.
디딤돌대출은 연소득이 낮은 무주택 서민이 5억원(신혼 6억원) 이하 주택을 살 때 최대 2억5000만원(신혼 4억원)을 낮은 금리로 빌려주는 상품이다. 그런데 이 대출 잔액이 폭증한 배경에 저출생 대책이 있다. 국토교통부는 작년 10월 디딤돌대출을 받을 수 있는 신혼부부의 연소득 기준을 7000만원에서 8500만원으로 확대했다. 결혼을 장려하기 위한 차원이었다.
올해 1월에는 디딤돌대출의 새로운 유형으로 '신생아특례'를 내놨다. 대출 신청일 기준으로 2년 안에 출생한 가구에 혜택을 주기 위해서다. 없던 유형이 생기니 자연히 디딤돌대출 규모도 꾸준히 늘었다. 신생아특례대출 잔액은 2월 1978억원에서 지난달 4조7793억원까지 훌쩍 뛰어올랐다. 그런데도 올 초 합계출산율이 0.72명으로 곤두박질친 것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다. 결국 정부는 지난 4월 이 대출을 신청할 수 있는 부부의 연소득 요건을 연내 1억3000만원에서 2억원으로 올린다고 발표했다. 두 달 만인 6월에는 이 조건을 내년부터 2억원에서 2억5000만원으로 더 높이겠다며 한 차례 수정했다. 하지만 가계대출 급증에 대한 우려로 아직 신생아특례 소득 요건은 완화되지 않고 있다.
올해 7~8월은 집값이 폭등하며 소위 신혼부부·청년층의 '영끌' 현상이 일어났던 시기다. 청약시장에서도 지난해부터 신혼희망타운을 비롯해 신혼부부와 출생가구·다자녀 가구 우선 정책이 강화되면서 영끌 현상을 부추겼다. 아이러니하게도 집값이 뜨거웠던 이 기간 바닥을 기던 출생아 수는 반등했다.
통계청 '인구동향'에 따르면 출생아는 7월(2만601명)과 8월(2만98명) 두 달 연속 2만명대를 기록했다. 특히 8월 출생아 증가율은 동월 기준으로 2010년(6.1%) 이후 14년 만에 가장 높았다. 고종완 한국자산관리연구원장은 "출산을 앞두거나 계획하고 있는 신혼부부 등이 오르는 집값을 보면서 더 늦기 전에 영끌 행렬에 참여한 영향이 컸다"며 "수도권에서는 정부가 올해 도입한 신생아특례대출도 한몫했다"고 말했다.
이처럼 긍정과 부정의 효과가 섞여 있었지만 금융당국은 치솟는 집값과 가계대출 증가에만 주목해 비상등을 켜고 달린 것이다. 이에 금융당국은 부랴부랴 주택담보대출 이자율을 올리라는 신호를 은행에 줬고 은행들은 금리를 높이고 대출심사를 강화하느라 야단법석을 피웠다. 이번에 국토부가 내놓은 디딤돌대출 축소 조치도 금융위원회 주재 가계부채 점검회의 직후 이뤄진 것이다.
김세완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인구정책은 정말로 호흡이 긴 대책이어서 효과가 몇십 년에 걸쳐 천천히 일어나기 때문에 효과가 빠른 재정·금융정책에 비해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기도 어렵다"고 말했다.
결국 디딤돌대출 한도를 축소하는 정책이 공지 없이 시행됐다가 잠정 유예되고, 정반대로 같은 성격의 신생아특례대출은 또 대상을 확대하기로 하자 수요자들만 혼란이 커졌다. 각종 저출생 지원정책 덕에 겨우 출산율이 반등하는 상황에서 섣부른 규제와 번복이 거듭되며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저출생 정책과 충돌하는 조치는 단지 대출뿐이 아니다. 주택 공급을 놓고 세대 간 갈등 문제도 야기 중이다. 서울시가 신혼부부를 위해 새롭게 출시한 장기전세주택Ⅱ(미리 내집)가 대표적인 예다. 장기전세주택Ⅱ는 신혼부부나 예비 신혼부부에게 공급하는 임대주택으로 당첨 시 최장 20년간 거주할 수 있다. 특히 2자녀 이상 출생한 가구는 시세보다 최대 20% 저렴하게 해당 주택을 매입할 수 있도록 제도를 설계해 '오세훈표 저출생 대책'으로 화제가 됐다.
하지만 이러한 임대주택 유형이 신설되며 노부모 부양가족과 소외계층 가구에 배정되는 임대주택 물량이 줄어드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제기된다. 공공주택 특별법 시행규칙에 따라 서울시가 전체 장기전세주택의 최대 50%를 장기전세주택Ⅱ로 배정하기 때문이다.
서울시는 저출생이 국가적 극복 과제인 만큼 장기전세주택Ⅱ 비중을 50%에서 더 확대하기 위한 방안을 국토부와 논의 중이다.
이러한 딜레마 상황과 관련해 서울시 관계자는 "그런 문제를 인지하고 있다"면서 "임대주택 총량을 늘려 소외계층에게 배정되는 물량이 줄어들지 않도록 노력을 기울일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이희수 기자 / 김유신 기자 / 이지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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