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훈의 엑스레이] [34] 대명사 아랑 드롱
미남은 다 ‘아랑 드롱’이라 불렀다. 80년대 일이다. 당시 외국어 표기법은 좀 달랐다. 알랭 들롱은 아랑 드롱이었다. 나는 아직도 아랑 드롱이라는 이름이 익숙하다. 프랑스를 불란서라 불렀던 세대라 그럴지도 모르겠다.
알랭 들롱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건 어머니 덕분이었다. 티브이를 보다 잘생긴 남자가 나오면 어머니는 꼭 “아랑 드롱 같네”라고 했다. 얼마나 잘생겼으면 이름이 대명사가 되는가 말이다. ‘주말의 명화’로 처음 본 알랭 들롱은 사기였다. 남자가 그렇게까지 아름다울 수는 없는 일이다.
90년대가 오자 알랭 들롱이 미남의 대명사로 불리는 일은 없었다. 늙어서 그렇다. 새로운 젊은 미남이 몰려왔다. 리처드 기어와 톰 크루즈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다만 그들이 대명사가 되는 일은 없었다. 내 생각에 그건 이름 때문이다. ‘아랑 드롱’처럼 다짜고짜 미남스러운 이름은 잘 없다.
미남 기준도 시대에 따라 변한다. 나는 ‘한국의 아랑 드롱’이라 불렸던 신성일 젊은 시절을 봐도 큰 감흥이 없다. 그는 그 시대 미남이었다. 요즘 기준으로는 남궁원이 좀 더 현대적인 미남이라고 생각한다. 신성일 오랜 팬인 독자들에게는 사과드린다. 여러분도 MZ세대 최고 미남 티모테 샬라메가 미남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알랭 들롱이 별세했다. 향년 89세였다. 다른 배우가 별세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와는 기분이 묘하게 달랐다. 한 배우가 죽은 것이 아니다. 대명사가 죽은 것이다. 한국 여러 세대가 미남의 표본이라고 생각했던 이상적 존재가 사라졌다.
마돈나의 노래 ‘Beautiful Killer’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하지만 넌 절대 알랭 들롱이 될 수 없어”. 그걸 들으며 알랭 들롱을 추모하다 깨달았다. 마돈나도 그렇다. 대명사였다. 90년대까지도 섹시한 여성 가수는 다 ‘한국의 마돈나’라 불렀다. 더는 누구도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마돈나도 이제 64세다. 내 젊음의 빈 노트에 빼곡하던 대명사들을 보낼 때가 온 것이다.
매일 조선일보에 실린 칼럼 5개가 담긴 뉴스레터를 받아보세요. 세상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91170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