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춤형 원전, 칼 같은 납기…佛 꺾고 체코 원전 수주한 비결
UAE 바라카 이후 15년 만에 역대 최대 규모 원전 수출 성과
한국 원전이 체코에서 사업비 24조원 규모의 신규 원전 2기를 짓는 사업을 수주했다. 원전 수출로는 사상 최대이자 2009년 UAE(아랍에미리트) 바라카 원전 수주 이후 15년 만에 이룬 성과다. 이번 계약에서는 향후 체코가 추가로 원전 2기를 지을 경우에도 한국을 우선협상대상자로 지정했기 때문에 총수주액은 최대 40조원을 웃돌게 돼 20조원이었던 바라카 원전의 2배 이상 규모로 평가된다. 탈원전 정책으로 가동 중이던 원전은 멈추고, 건설 중이던 원전까지 공사가 중단되며 생태계가 고사 직전까지 갔던 K원전 업계가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세계 2위 원전 대국인 프랑스를 안방인 유럽에서 꺾었다는 데 의의가 크다는 평가를 받는다. AI(인공지능) 확산에 따라 세계적으로 전력 수요가 폭증하는 상황에서 K원전이 중동에 이어 유럽 시장에 성공적으로 첫발을 내디뎠다는 것이다.
산업통상자원부는 17일 체코 두코바니와 테믈린 지역에 1000㎿(메가와트)급 원전 4기를 짓는 신규 원전 사업의 우선협상대상자로 한수원이 선정됐다고 밝혔다. 체코는 우선 두코바니 5·6호기 건설을 확정하고, 테믈린 3·4호기에 대해선 향후 건설 여부를 확정하기로 했다. 예상 사업비는 1기당 2000억코루나(약 12조원)로 한수원과 발주사인 EDUⅡ는 내년 3월까지 계약을 마무리하고, 2029년 공사를 시작해 2036년부터 상업 운전에 들어갈 계획이다. 추가 2기까지 더하면 총 사업 규모는 40조원을 웃돌 것으로 보인다. EDUⅡ는 체코전력공사가 신규 원전 사업을 위해 만든 자회사로 향후 원전 건설 사업을 책임진다. 산업부 관계자는 “사업비는 체코 정부가 건설비, 예비비 등을 포함해 책정한 규모로 계약액은 협상 결과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체코 신규 원전 사업은 기존 원전을 운영 중인 두코바니와 테믈린에 원전을 2기씩 추가 건설하는 사업이다. 체코는 두코바니에서 500㎿급 원전 4기, 테믈린에서는 1000㎿급 원전 2기를 운영 중이다. K원전은 2009년 UAE 바라카 원전 수주 이후 시공이나 유지 보수 사업을 수주한 적은 있지만, 원전 노형(모델)부터 건설, 시운전까지 전체를 수출하기는 UAE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다.
◇원전 강국 프랑스를 유럽 안방에서 제쳐
체코 신규 원전 수주전은 2022년 3월 입찰을 개시하며 본격화됐다. 애초 원전 1기 규모로 추진됐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에너지 안보가 중요해지고, AI와 데이터센터 확대, 탄소 중립에 따른 화석연료 퇴출 등의 영향으로 전력 수요가 급증하자 올 1월 최다 4기로 건설 규모가 확대됐다. 발표 당시 페트르 피알라 체코 총리는 기자회견에서 “에너지 시장 상황이 바뀌면서, 신규 원전 1기로는 충분하지 않게 됐다”며 “원전은 합리적 가격으로 충분한 전력을 확보하는 열쇠”라고 말했다. 체코 정부는 2050년까지 전력 소비가 66% 증가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글로벌 공급망이 재편되는 과정에서 러시아와 중국을 배제한 채 시작한 수주전은 한수원과 프랑스 EDF, 미국 웨스팅하우스 3파전으로 출발, 올 1월 웨스팅하우스가 자격 미달로 탈락하면서 2파전으로 압축됐다. 체코전력공사는 지난 4월 한수원과 EDF가 제출한 최종 입찰서를 두 달여 동안 평가했으며, 체코 정부는 이를 바탕으로 한 달 동안 검토한 뒤 이날 우선협상대상자를 선정했다. 이로써 K원전은 미국, 프랑스와 정면 대결을 펼친 끝에 수주전에서 승리를 따낸 것이다.
◇유럽에서 프랑스 이겨… 리턴매치 승리
미국에 이어 둘째로 많은 원전 56기를 운용하는 원전 대국 프랑스의 안방인 유럽에서 UAE 수주전 이후 15년 만에 벌어진 리턴매치를 승리로 이끌었다는 데 의미가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프랑스 EDF는 현지에서 ‘유럽에서 원전을 운용 중인 EDF vs 유럽 바깥에서만 운용하는 한수원’ 구도를 만들며 여론전을 펼쳤다. 특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2년 넘게 이어지는 가운데 양국 군사 협력을 강화하며 EU(유럽연합)와 NATO(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으로서 동맹임도 과시했다. 수주전 막판에는 프랑스가 EU 차원에서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소문까지 돌기도 했다.
한 원전 업계 관계자는 “프랑스로서는 자기들 안방인 유럽에서 15년 만에 설욕을 노리며 총력전을 펼쳤다”며 “현지 매체에 체코 국민의 75%가 EDF를 지지한다는 출처를 알 수 없는 광고를 내기도 했다”고 전했다.
◇정확한 납기와 예산을 맞추는 경쟁력에 체코 ‘국민 기업’까지 끌어들여
하지만 이른바 ‘온 타임 온 버짓(On time On budget·정해진 예산으로 적기 시공)’을 내세운 한국의 시공 능력과 가격 경쟁력을 프랑스가 넘어서지 못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프랑스는 핀란드에 지은 올킬루오토 3호기가 예정보다 13년 늦게 전력을 생산했고, 2007년에 짓기 시작한 자국 내 플라망빌 원전은 아직도 완공하지 못했다. 반면 한국은 사막이라는 지리적 약점과 코로나라는 돌발 변수에도 UAE 바라카 원전을 일정대로 건설하면서 세계 원전 업계에서 ‘온 타임 온 버짓’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 한수원 관계자는 “한전기술, 한전KPS, 두산에너빌리티, 대우건설 등과 협력해 체코 측의 요구 사항에 맞추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말했다.
두산이 2009년 인수한 체코 국민 기업 두산스코다파워도 현지 여론 형성에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1869년 창립, 올해로 155년이 된 두산스코다파워가 신규 원전에 증기 터빈 등을 공급한다는 계획이 체코 여론을 K원전 쪽으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한수원 측은 ‘한국이 수주하면 기자재를 체코에서 만든다’는 점을 강조하며 체코 경제에 끼치는 장점을 선전했다.
황주호 한수원 사장은 “앞으로 발주사와 상생할 수 있게 협력해 최종 계약을 맺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며 “한국형 원전이 UAE에 이어 체코의 에너지 안보와 탄소 중립 달성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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