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브와 어도어 사태가 견인한 케이팝 가속노화 [콘텐츠의 순간들]

김윤하 2024. 6. 13. 0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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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담하건대 케이팝은 단 한 순간도 평화로운 적이 없었다. 이 산업을 떠받치는 가장 큰 원동력은 ‘스트레스’다. 악과 깡과 비즈니스만 남았다.
4월25일 민희진 어도어 대표가 서울 한국컨퍼런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시사IN 조남진

요즘 ‘가속노화’가 화제다. 나이는 거들 뿐,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60대도 40대 같은 일상을 영위할 수 있고, 그렇지 못하면 40대도 60대 같은 신체를 가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분야를 막론한 의사 선생님들의 ‘잘 먹고, 잘 자고, 스트레스받지 말라’는 조언이 가속노화를 방지하는 기본 중의 기본이었구나 싶다. ‘그렇게 살다가는 금방 죽는다’라는 농담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음악 칼럼에 웬 건강 얘기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하겠다. 요즘 케이팝을 둘러싼 여러 논쟁을 보고 있자니 모든 게 케이팝 가속노화를 향한 전력 질주처럼 느껴진다. 케이팝은 지금 절대적으로 막 먹고, 못 자고, 스트레스를 요처럼 깔고 누워 뒹굴고 있다. 여전히 떠들썩한 하이브와 어도어 사태를 보면서도 그랬다. 누군가에게는 자회사 대표가 경영권 탈취를 시도하다 덜미를 잡혀 재판에 들어간 단순 사건으로 여겨지겠지만, 케이팝을 오랫동안 지켜본 이에게 이 사건은 눈 가리고 아웅 해왔던 케이팝의 거의 모든 문제를 ‘파묘’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했다.

날이 갈수록 거대해지는 머니게임과 그로 인해 잦아진 엔터테인먼트업계의 동상이몽 인수합병, 중년 남성으로 구성된 임원진과 젊은 여성이 다수인 실무진 사이 켜켜이 쌓인 불신, 재주 넘는 곰과 왕서방 논쟁, 잊을 만하면 불거지는 카피 논란, 울며 겨자 먹기로 음반을 찍어내고 또 그걸 울며 겨자 먹기로 살 수밖에 없는 판매자와 구매자, 그리고 ‘큰일’이 터질 때마다 철저히 타자화되는 아티스트 등. 모든 게 꼬일 대로 꼬인 매듭이었다.

장담하건대 케이팝은 단 한 순간도 평화로운 적이 없었다. 아마 케이팝을 깊이 있게 들여다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의할 터이다. 거칠게 나눠 기획사, 가수, 팬이라는 세 개의 힘이 각자의 위치에서 팽팽하게 서로 잡아당기며 유지되는 이 산업을 떠받치는 가장 큰 원동력은, 슬프게도 의사들이 그렇게 피하라고 입을 모으는 ‘스트레스’다. 만약 이 사실을 모른 채 그저 맑고 밝게 꿈과 희망을 노래하는 케이팝 아이돌 그룹과 그들의 국위 선양을 흐뭇하게 바라봐왔다면, 부디 앞으로도 그렇게 사셔야 한다고 두 손을 모아 기도라도 드리고 싶다. 그건 아무에게나 찾아오는 행운이 아니다.

세 개의 힘 가운데 가장 먼저 이슈화된 건 기획사와 가수 사이 힘의 불균형이었다. 기억이 희미해진 이들이 많겠지만, 고작 15년 전까지만 해도 권력은 오롯이 기획사의 몫이었다. 먹이고 입혀서 데뷔를 시켜준 대가로 부상, 개인 사정, 군복무 등으로 생기는 공백까지 전부 가수가 감당해야 하는 10년 이상의 계약서가 불공정하다고 법원은 판결했다. 이에 따라 공정거래위원회는 대중문화예술인의 7년 표준계약서 작성을 의무화했다.

비교적 최근에도 종종 기사화되는 기획사와 가수 사이 상표권 분쟁은 해묵은 이슈다. 이 대립에는 팬도 포함된다. 기획사와 가수 사이에 문제가 생기는 순간, 팬은 대부분 가수와 한 몸이 된다. ‘가수에 대한 공격은 나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라는 자세로 무장한 이들은 사랑의 무기를 든 무적의 전사로 다시 태어난다.

기획사는 방조하고, 팬은 감당하고

그렇다면 가수와 팬의 관계는 어떤가. 아름다운 사랑만이 이들을 감싸고 있을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여기에도 온통 스트레스투성이다. 둘 사이를 엮는 밑바탕이 사랑인 건 분명하나, 삶에서 사랑이 만들어내는 파장이 그렇듯 모두 선하지도 바르지도 않은 탓이다. 가수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헌신하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강력한 케이팝 팬덤은 가족에 준하는 유대관계를 형성하지만, 그만큼 역풍도 크다. 때로는 연인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업무 파트너나 부모자식처럼 얽히고설킨 이들의 관계에 금이 가는 건 대부분 가수가 그 무한한 지지에 대한 믿음을 저버릴 때다. 연애 금지라는 암묵적 불문율이 깨졌을 때, 카메라 앞에서 ‘동태눈’이 되었을 때, 팬과의 소통을 위한 서비스 제공에 소홀했을 때 언제나 약자일 것 같던 팬은 관계의 전권을 쥔다. ‘나만 끊으면 그만인 인연’인 것이다.

지난해 12월10일 서울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열린 ‘2023-2024 한국방문의해 기념 케이링크 페스티벌’에서 관객들이 콘서트를 즐기고 있다. ⓒ연합뉴스

다음은 기획사와 팬이다. 이들은 이 위태로운 힘의 균형 가운데서 가장 독특한 관계도를 그린다. 우선 기획사와 팬은 서로를 가능한 한 모른 척하고 싶어 한다. 케이팝의 이상향은 어떤 불순물도 없이 가수와 팬만 존재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기획사와 팬은 서로가 필요할 땐 누구보다 끈끈한 단결력을 과시한다. 가요계의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가수라는 배를 나아가게 하기 위해 양손으로 노를 잡고 젖 먹던 힘까지 짜내 구령에 맞춰 물살을 가른다. ‘내 가수’가 주목받기 위해 필요한 최고 음원 순위, 최대 초동 판매량을 만드는 데 필요한 도를 넘은 노력을 기획사는 방조하고 팬은 감당한다. 수백 장의 포토 카드와 판형별 앨범, 음반이 나온 지 반년이 되어도 끝나지 않는 앨범 이벤트가 영원처럼 이어진다. 영차 어기영차, 배가 계속 나아간다.

이 모든 것의 가장 큰 동력이 스트레스라는 걸 생각하면 일견 아득해진다. 스트레스에 무뎌진 뇌는 심지어 스트레스가 있어야 사랑이라고 오해하기도 한다. 지난 수십 년간 이렇게 폭탄 돌리기처럼 서로에게 스트레스를 전가해온 세 개 힘의 중심에 조용히 숨어 있던 미디어의 몫도 꺼내본다. 자랑스러운 한국 문화라며 케이팝을 아무리 추앙해도 숫자와 기록을 제외한 무엇도 쉽게 가시화되지 않는 그들의 눈에 띄기 위해 오늘도 배는 영차 어기영차, 눈에 뻔히 보이는 수를 쓰면서 어떻게든 꾸역꾸역 나아간다. 사랑과 신뢰가 뭔지 이젠 기억도 나지 않는 자리에 악과 깡과 비즈니스만 차오른다. 그런 게 세상에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나? 당장 마트로 달려가 ‘감속 노화’를 위한 렌틸콩과 귀리를 사와야 할 것 같다. 그때까지 이 산업이 살아 있다면 말이다.

김윤하 (대중음악 평론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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