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날이 되어서야 소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 추사 ‘세한도’처럼 [강동삼의 벅차오름]

강동삼 2024. 6. 8.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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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려지지 않은 여백의 절제미가 돋보이는 세한도… ‘세한연후지 송백지후조’를 만나다

날개를 편 박쥐를 닮기도 하고 바구니를 덮어놓은 모양을 닮은 바굼지오름은 단산이라고도 불리는 추사 김정희의 산이다. 동쪽 산방산쪽에서 바라본 모습. 제주 강동삼 기자
단산은 응회구로 제주도의 지질학적 층서구분에서 가장 오래된 화산쇄실성 퇴적층에 속하며 오름의 노두는 오랜 세월 파식과 풍식에 의해 지금은 그 골격만 남아있는 상태로 다른 오름들과는 달리 거칠고 험한 모습을 하고 있다. 남면은 비교적 완만하지만, 북면은 수직의 벼랑을 이루고 있다. 단산은 세봉우리로 되어 있는데 중앙의 봉우리는 높고 좌우의 두 봉우리는 주봉보다 낮아 마치 날개를 편 박쥐의 모양과 흡사해 바굼지오름, 바구미오름으로 불린다. 제주 강동삼 기자

‘세한연후지 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栢之後彫)’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잎이 시들지 않음을 비로소 안다.’

<33>추사의 산 바굼지오름

추사 김정희(金正喜·1786~1856)의 ‘세한도(歲寒圖)’를 서귀포시 대정읍 추사로 44 제주 추사관에서 보면서 문득 유배지에서의 삶을 그려본다.

늙은 소나무 한그루, 잣나무 3그루, 그리고 허름한 집 한 채가 전부인 세한도(歲寒圖). 그러나 세월을 초월해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간결함과 시리도록 눈부신 여백이 깊은 울림을 전해준다.

‘세한도’는 값을 매길 수 없는 국보다. 완당(阮堂) 또는 추사(秋史) 김정희가 59세 되던 해인 1844년에 제주도 유배 중에 그렸다. 누구도 찾아주지 않는 외롭고 처절한 유배생활을 하던 시절에 제자였던 역관 이상적(譯官 李商迪·1804∼1856년)이 중국 연경의 소식과 귀중한 서책들을 구해 스승에게 보내곤 했다. 권세를 모두 잃고 보잘 것 없게 된 자신에게 변함없는 정성을 보내는 제자에게 보답하고자 붓을 들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세한도’.

누군가 김정희를 ‘한칸 초가에 철저히 갇혀버린 천재’라는 표현을 썼다. 그 천재의 이상과 혼이 담긴 그림이 바로 국보 180호 ‘세한도’라고. 너비 24㎝. 길이 108㎝. 그림과 발문이 전부인 것으로 알지만 실상은 많은 이들이 요즘 말로 수많은 댓글로 찬양한 글까지 포함하면 길이만 14m가 되는 대표적인 추사의 대작이다.

특히 노송의 가지가 떠받치고 있는, 오른쪽 위에는 歲寒圖(세한도)라는 제목과 함께 ‘藕船是賞(우선시상)’, ‘阮堂(완당)’이라 적고 도장을 찍어 놓았다. 그 빨간 도장이 없었다면, 마치 방점을 안찍은 듯, 그림이 허전했을 법 하다. 우선은 이상적의 호이다. 또한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는 장무상망(長毋相忘) 인장을 더했으니 사제의 애틋한 정이 그림의 가치만큼 감동적이다.

흐릿한 한 채의 집과 고목이 풍기는 스산한 분위기가 추운 겨울의 분위기를 그대로 전달해주는 느낌이다. 묵의 농담만으로도 지조 높은 작가의 내면세계를 엿볼 수 있다.

그려진 것만 보고 그림을 평가할 수 없듯이 그려지지 않은 여백의 미, 그 처절하도록 쓸쓸한 외로움이 ‘세한도’의 백미인 지도 모른다. 텅 빈 여백에서 느껴지는 절제미의 걸작.

추사 김정희의 걸작‘세한도’의 모습. 추사관의 영상. 제주 강동삼 기자
추사 김정희의 걸작‘세한도’ 실사본의 모습. 제주 강동삼 기자
1846년 추사는 대정향교의 훈장 강사공의 부탁을 받고 동채에 ‘疑問堂 의문당’이라는 현판 글씨를 써주었다. 학문을 함에 있어서 항상 의문을 품고 진리를 찾을 것을 강조한 말이다. 이 현판은 현재 제주 추사관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제주 강동삼 기자
서귀포시 대정읍 보성리 제주추사관 내부의 모습. 제주 강동삼 기자
헌종 6년 55세 되던 해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제주도로 유배되어 헌종 14년까지 약 8년간 머물렀던 유배지로 초기에는 송계순의 집에 머물다가 몇년 뒤 강도순의 집으로 옮겨 왔다. 이곳에 머물면서 제주지방 유생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쳤으며 추사체와 생애 최고의 걸작 세한도를 남겼다. 건축가 승효상이 간결하게 지은 제주 추사관을 둘러본 뒤 뒤편으로 돌아가면 나온다. 제주 강동삼 기자
추사 김정희가 유배생활을 하며 생활하던 거처. 제주 강동삼 기자

# 유배지에서 탄생한 추사체… 그리고 추사체를 닮은 바굼지오름에 오르다

좀 샛길로 빠지는 듯한 이야기지만, 추사와 이상적의 사제의 정을 엿보는 세한도를 보다가 문득 여창수 제주도 대변인이 2019년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40일간의 여정을 솔직담백하게 담은 수필집 ‘까미노에서 만난 흰수염고래’에 나오는 한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술자리에서 한 선배가 ‘세상에서 누구 연줄이 가장 좋고 세다고 생각하나’라는 물음에 “청와대나 도지사 배경도, 사장· 회장 배경도 다 부질없네”라며 “가장 좋은 인맥은 후배”라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논어에 있는 ‘후생가외(後生可畏·나중에 나는 사람을 두려워하라)’를 얘기했다.

1819년(순조 19) 과거에 급제한 이후 출세가도를 달리던 추사는 당시 세도가문이었던 안동 김씨의 미움을 사게 되어 제주로 유배됐다. 그 시련의 계절을 견디고 있는 스승을 위해 제자인 이상적이 어렵게 책을 구해 보낸다. 어쩌면 그건 책이 아니라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생명줄이었는지 모른다.

추사는 유배지에서 글과 그림으로 극복해나갔다. 8년간의 제주 유배에서 풀린 후 1년간의 강상 시절을 거쳐 함경도 북청으로 두번째 유배를 가기도 한 그는 경기 과천에서 여생을 보내다 71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칠십평생 벼루 열개를 밑창냈고, 붓 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고 하니 치열한 학예 연찬의 결실을 확인할 수 있다.

추사체는 제주 유배의 절망을 딛고 탄생됐다. 그는 고졸(古拙)한 중국 전한시대의 글씨들을 열심히 옮겨 쓰면서 확고한 자기 틀과 형식을 갖춰나갔다. 전한시대 예서체(隸書體)의 멋과 정신을 곁들이면서도 개성미를 보여준다. 이를 두고 박규수(1807~1876)는 “구속받고 본뜨는 경향없이 대가의 장점들을 모아 스스로 일가를 이루게 됐다”고 평가했다.

바굼지오름을 오르면서 만나는 풍경들. 제주 강동삼 기자
바굼지오름 첫번째 봉우리에서 만나는 바굼지오름 동쪽 산방산의 모습. 제주 강동삼 기자
바굼지오름과 산방산의 모습. 제주 강동삼 기자
바굼지오름에서 바라본 농경지의 모습. 제주 강동삼 기자
바굼지오름에서 바라본 산방산 일대의 모습. 제주 강동삼 기자
바굼지오름 남쪽 멀리 형제섬이 보인다. 제주 강동삼 기자

# 산방산의 기운에도 주눅들지 않는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는… ‘김정희의 산’ 바굼지오름

‘추사 김정희의 산’이라 불리는 바굼지오름이 제주 추사관(월요일 휴무)에서 차로 5분여 거리에 있다. 추사체를 닮은 듯한 바굼지오름은 신령스럽고 깎아지른듯한 산방산 옆에 자그맣게 서있지만 결코 주눅들지 않고 당당한 모습으로 버티고 있다. 정상의 높이가 158m로 낮지만, 호락호락하게 보면 큰코 다칠 정도로 험하다.

고백하건대 솔직히 바굼지오름은 가고 싶지 않았다. 평소 내게 다가와 농담을 던지곤 하는 제주도청 강승훈 주무관이 나의 ‘벅차오름’ 연재를 지역신문 지면과 지역 인터넷 포털 기고를 통해 “글이 따뜻해서 읽다보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낯부끄러운 칭찬만 하지 않았어도 계속 미뤘을 오름이었다.

심지어 그는 그 기고 끝에 “고향에 있는 바굼지오름을 어떻게 담을 지 궁금하다”며 은근슬쩍 바굼지오름 연재를 공식적으로 압박해온 터였다. 하지만, 난 바굼지오름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있었다. 제주의 그 흔한 오름처럼 설렁설렁 올라가도 되는 오름인 줄 알고 덤볐다가 험한 탐방로에 그만 고개를 절레절레했던 트라우마가 있었기 때문이다. 최대한 차일피일 미루며, 빼고 가고싶은 오름이었지만 결국 화답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셈이다.

산방산쪽에서 보면 바구니를 덮어놓은 모양을 닮아 바구니의 제주어 ‘바굼지’라고 붙여졌다. 어떤 이는 소쿠리 단자를 써서 ‘단산簞山’이라고 부른다. 단산은 응회구로 제주도의 지질학적 층서구분에서 가장 오래된 화산쇄실성 퇴적층에 속하며 오름의 노두는 오랜 세월 파식과 풍식에 의해 지금은 그 골격만 남아있는 상태로 다른 오름들과는 달리 거칠고 험한 모습을 하고 있다. 세 봉우리로 된 단산은 중앙의 봉우리는 높고 좌우의 두 봉우리는 주봉보다 낮아 마치 날개를 편 박쥐의 모양과 흡사해 바구미오름, 바굼지오름으로 알려졌다.

몇년 전 바굼지오름을 대정향교 단산사가 아닌 단산로 주차장 입구에서 둘레길을 걸어 깎아지른 벼랑을 아슬아슬하게 타고 올라갔었다. 정비가 안돼 있어 밧줄은 너덜너덜하고 나무데크는 덜컹 거렸다. 절벽은 마치 관악산 절벽 어디메쯤 올라갈 때의 느낌과 흡사했다. 그 기억이 지금도 아찔해 이번엔 잔머리를 굴려 단산사 오른쪽 탐방로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아뿔싸. 이게 웬일인가. 이쪽은 반대편보다 더 험했다. 사람의 몸을 빌려 표현하자면, 마치 털털한 거친 산사나이의 강인한 풍채를 하고 있었다. 근육질 허벅지를 드러내듯, 굴곡진 암벽이 나타났다. 밧줄조차 보이지 않는다. 아침 일찍부터 탐방하고 내려오던 한 중년남자는 내리막길에 미끄러져 하마터면 크게 다칠 뻔 했다. 눈앞에서 그 모습을 목격하니 조심조심 발걸음을 떼야 했다.

가슴께로 올라갈수록 무성하게 자란 수풀. 그 풀을 헤집고 가야해서 진드기라도 달라붙지 않을까 조마조마해 후회막심, 진퇴양난이었다. 그러나 이미 너무 많이 올라왔다. 돌이킬수 없었다. 무성한 숲과 스산한 대숲 터널을 뚫고 꾸역꾸역 올라갔다. 목덜미 아래로 흘러내린 헝클어진 긴 머리카락은 나를 더욱 아찔하게 했다. 각진 턱 앞에선, 낡은 밧줄에 의지해 헉헉댔다. 한심하기 이를데 없는 남자의 모습이었다.

험했던 만큼 정상은 아찔한 절경으로 다가온다. 추사는 8년간 유배지에서의 외로움을 이 절경을 보며 달랬을까. 귀양살이를 하면서 누구를 그리워했을까. 산방산과 용머리, 송악산, 형제섬, 가파도, 마라도가 한눈에 펼쳐지는 곳. 서쪽으로는 모슬봉과 대정읍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 추사는 어떤 상념에 사로잡혀 있었을까.

대정향교에 서 있는 노송과 나무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에 등장하는 노송과 너무 닮아 놀랍다. 제주 강동삼 기자
대정향교 옆 용천수 세미물. 추사 김정희가 이곳의 물을 길러 차를 즐겨 마셨다고 전해진다. 제주 강동삼 기자

# ‘세한도’를 그대로 옮긴 듯한 대정향교의 소나무… 추사가 차를 마실때 쓰던 용천수 세미물

하산길은 올라왔던 그 험한 길로 돌아가는 걸 피했다. 서쪽보다 더 각진 턱을 자랑하는 동쪽 얼굴은 가파른 계단이지만 대신 풀들이 거의 없어 내려갈만 했다. 천천히 밧줄에 의지한 채 나무계단과 암벽을 조심스레 밟으면 됐다. 훨씬 수월하게 하산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지로 내려오자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추사의 산’ 바굼지오름에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산안개같은 당신 안녕.

바굼지 오름을 내려오면 빼놓으면 안되는 곳이 있다. 추사 선생이 자주 찾은 대정향교와 세미물.

‘세한도’처럼 노송이 오른쪽으로 기우뚱 서 있고 그 옆엔 잣나무는 아니지만 팽나무가 서 있다. 정말 신기하게도 ‘세한도’의 모습과 흡사해서 놀랄 지경이다.

이는 1811년 강사공이 삼강오륜을 상징하는 의미로 심은 소나무 세 그루와 팽나무 다섯 그루 중 일부라고 한다. 이 두 나무가 ‘세한도’에 등장하는 나무의 모델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올 만 하다. 그만큼 닮았다. 천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세한도’의 소나무가 살아있어 시간여행하는 기분이다.

대정향교는 조선 태종 16년(1416)에 처음 현성안에 설치되었으며 서기 1653년(효종4년)에 어사 이경억이 향교부지가 비좁고 지세가 나쁘다고 계청함에 따라 목사 이원진이 상지하여 지금의 자리에 정착했단다.

제주로 유배를 떠나온 추사는 이곳에 자주 들렀으며,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고 전한다. 1846년, 추사는 대정향교의 훈장 강사공의 부탁을 받고 동채에 ‘疑問堂 의문당’이라는 현판 글씨를 써주었다. 학문을 함에 있어서 항상 의문을 품고 진리를 찾을 것을 강조한 말이다. 이 현판은 현재 제주 추사관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대정향교 옆에는 세미물 용천수가 흐른다. ‘돌세미石泉’ 또는 ‘세미물’로 불리는 이곳은 옛날 주민들의 식수로 사용되었으며, 바굼지오름 아래에 있다고 해서 ‘바곤이세미’라 부르기도 했단다. 차를 즐겨 마셨던 추사도 이 물을 길어 차를 마시며 힘든 유배 생활에서 위로를 받았다고 한다. 물을 마실 순 없지만, 손수건을 적셔 땀을 닦자 온몸에 전해져 오는 얼음같은 차가움이 고마웠다. 그리고 대정항교 인근 작은 빵집 문 앞엔 그려진 ‘세한도’의 노송…. 현대를 사는 우리들 곁엔 늘 역사가 살아 숨쉬고 있었다.

수국으로 유명한 언덕위 정원 마노르블랑에서 바라보는 바굼지오름의 모습. 제주 강동삼 기자
마노르블랑에 만개한 수국과 정원의 모습. 제주 강동삼 기자

# 바굼지오름이 수국을 만났을때 수국의 언덕 ‘마노르블랑’

바굼지 오름이 수국과 한폭의 그림이 되는 곳이 있다. 특히 산방산, 형제섬까지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언덕위의 집 정원이다. 탄산온천 맞은 편 외길 언덕을 5분여 달리면 언덕 위에 카페 ‘마노르블랑’(서귀포시 안덕면 일주서로2100번길 46)이 반긴다. 차 한잔을 시키면 정원에서 마음껏 수국과 장미에 빠질 수 있다.

카페 내부에는 영국을 포함한 유럽의 아름다운 찻잔들을 감상할 수 있다. 핑크뮬리 가을도 아름다운 곳 마노르블랑은 지금 절정이다. 2000여 평에 수십가지 수국들이 만개했다. 제주 수국은 물론 전세계 30여종 7000여그루의 수국을 만나는 축제가 8월까지 이어진다. 호젓한 아침에 찾아가면 더 좋다. 커피 한잔을 하며 이런 단어들을 음미한다. 적적함, 외로움, 그리움, 유배, 귀양, 혹은 귀향….

글 사진 제주 강동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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