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텔 하나로… 트럼프 ‘세기의 재판’ 세계에 보여줬다

뉴욕/윤주헌 특파원 2024. 6. 7.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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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추문 입막음’ 재판 현장 그림에 담은 법정 화가 로젠버그
4일 미국 뉴욕 리버사이드 파크에서 만난 법정 화가 제인 로젠버그. 그의 스케치로 세계는 트럼프의 재판을 엿볼 수 있었다./윤주헌 특파원

미국 전·현직 대통령을 통틀어 역사상 첫 형사피고인이 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성추문 입막음’ 의혹 재판은 지난달 30일 배심원단의 만장일치 유죄 평결로 일단락돼 다음 달 선고를 앞두고 있다.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이 재판은 방송 중계가 일절 불허됐고, 법정 사진 촬영은 재판 시작 전 45초 동안만 허용됐다. ‘세기의 재판’을 바깥에 전달하는 유일한 통로는 ‘법정 화가’ 세 명이 그려낸 그림뿐이었다. 피고인 트럼프의 미세한 표정 변화, 트럼프와의 부적절한 과거를 주장하며 민망한 장면까지 증언한 전직 성인물 배우, 해결사에서 저격수로 돌변해 불리한 증언을 쏟아내던 전 트럼프 변호사, 그런 증인들을 거짓말쟁이로 거세게 몰아붙이던 변호인…. 이런 장면들을 담은 그림이 세계 언론을 통해 독자와 시청자들에게 전달됐다.

이번 재판에서 활약한 세 명의 법정화가 중 한 명인 제인 로젠버그를 4일 맨해튼 리버사이드 공원에서 만났다. 순간을 포착해 꼼꼼하게 그려내야 하는 예민한 직업적 특성 때문일까, 그는 인터뷰 도중 비행기가 창공을 가로지르면 지나갈 때까지 말을 멈췄고, “더 구체적으로 물어보라”며 다그치기도 했다. 인터뷰 뒤에는 “지하철역까지 데려다 주겠다”며 ‘츤데레(엄격해 보이지만 속은 따듯한 사람)’ 모습도 보였다.

-세계인들이 당신의 스케치로 역사적 트럼프 재판을 봤다.

“재판이 거의 매일 진행돼 너무나도 힘들었지만 내 직업에 자부심을 느낀 순간이었다. 배심원 선정 과정에서는 후보들이 너무 많아 법정에는 한 명만 들어갈 수 있었다. 나머지 두 명은 옆에 있는 ‘오버플로룸’에서 스케치를 했다. 이때는 우리도 순서를 정해서 돌아가면서 법정에 들어갔다. 본 재판부터 3명이 법정에 들어갔는데 앉는 자리는 달랐다. 트럼프의 얼굴이 잘 보이는 곳도 있고 그렇지 않은 곳도 있어서 공평하게 돌아가면서 앉았다.”

-가까이에서 본 트럼프는 어땠나.

“눈썹에 털이 많고 덥수룩해서 그리기가 편한 상대였다. 나는 그런 캐릭터를 가진 사람을 좋아하는데, 특색이 있어서 조금 더 쉽게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배심원 평결이 있던 날 운 좋게 그가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그를 아주 주의 깊게 지켜봤는데 배심원이 ‘유죄!’라고 하자마자 입술을 다물고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더라. 배심원을 쳐다보지도 않고 있다가 이내 다시 고개를 들어 그들을 쳐다봤다.”

-트럼프가 재판 도중 실제 잠을 잤느냐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다.

“내가 본 트럼프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그가 잠을 자는지 명상을 하는지는 모르겠다.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까지 알 수 없는 것 아닌가.”

-사진기자에게는 45초가 주어졌다. 스케치도 시간 제한이 있었나.

“아니다. 재판 내내 앉아서 그릴 수 있다. 다만 되도록 시계를 쳐다보지 않고 빨리 그리려고 했다. 내가 처음 일하기 시작한 1980년대만 해도 오후 6시까지 방송이 없었다. 그래서 오후 4시 30분까지만 마감을 하면 됐다. 지금은 정오에 ‘뉴스 쇼’ 같은 프로그램이 많기 때문에 오전 11시 30분까지는 첫 스케치를 마무리하는 것이 목표였다.(트럼프 재판은 오전 9시 30분에 시작했다.)

-작업을 마친 스케치를 어떻게 언론에 전달했나.

“이번 재판은 이전과는 모든 것이 달랐다. 복도와 법원 건물에 깔린 경찰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법원에 들어오고 나갈 때 금속 탐지기를 통과해야 하는 등 출입도 번거로웠다. 그래서 스케치를 마치고 유일하게 출입이 자유로웠던 화장실로 가서 쓰레기통 위에 작품을 올려놓고 사진을 찍어 이메일로 전송했다.” (법정에선 휴대폰 촬영이 금지돼있다.)

-스케치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어땠나.

“재밌게 잘 봤다는 반응이 대부분이라서 고마웠다. 나는 소셜 미디어를 하지 않기 때문에 이메일로 응원을 많이 받았다. 물론 뉴스에 달린 악성 댓글들도 있었다. ‘트럼프를 늙어 보이게 그렸다’ ‘그가 너무 뚱뚱하게 나왔다’ 같은 말들이었다. 내 스케치가 방송에 어떻게 나가는지 가끔 확인한다. 이번에 흥미로웠던 것은 다른 재판에 비해 방송에서 압도적으로 많이 이용했다는 점이다. 관심도가 그만큼 높았다는 것 아닐까.”

그가 트럼프 재판 법정화가로 나선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뉴욕주 정부가 트럼프그룹이 금융사기·탈세 행위를 저질렀다며 트럼프와 자녀들을 상대로 제기한 부당이득금 환수 재판에서도 법정을 스케치했다. 이 재판은 올해 초 트럼프 일가가 3억5500만달러(약 4874억원)를 물어내라는 1심 판결로 마무리됐다. 당시 트럼프는 로젠버그가 그린 스케치 앞을 지나가다 이렇게 말했다. “오, 내가 살을 좀 빼야겠소. 정말 대단한 직업이구려.”

지난달 30일 뉴욕 맨해튼 형사법원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재판에서 배심원단이 평결을 내릴 때 모습. 로젠버그가 그렸다./로이터 연합뉴스

-법정 화가는 얼마나 되나.

“처음 이 일을 시작한 1980년대엔 미국에 55명 정도 있었다. 지금은 뉴욕에 5명, 워싱턴 DC에 2명, 서부 캘리포니아에 3명 정도 활동한다. 작년에만 세 명이 은퇴를 했다. 일거리를 얻기 위해서는 싸워야 하기 때문에 결코 쉽지 않고 스트레스도 많다.”

-스케치를 할 때 어떤 부분을 가장 먼저 보나.

“얼굴을 그릴 것인지 전신을 그릴 것인지에 따라 다르다. 우선 고개가 기운 방향을 본다. 고개의 방향을 보고 나머지 공간에서 어떻게 그릴지를 생각하지, 처음부터 ‘이 눈썹은 이렇게 그릴 거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주로 파스텔을 사용하는데.

“파스텔로 하면 작업 속도가 빠르다. 각 아티스트는 자신이 좋아하는 도구를 선택한다. 이번 법정에 들어간 세 명 중 두 명은 파스텔을 사용했고 다른 한 명은 오일 크레파스를 이용했다. 서부 쪽에서는 수채화를 그리기도 한다. 정해진 규칙은 없다.”

-40년 법정화가로 활동하면서 기억에 남는 재판은.

“누군가 감전사한 재판을 스케치한 적이 있는데 너무 끔찍해서 역겨울 지경이었다.(그는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어떤 재판인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다 그리고 난 뒤 내 손이 더러워진 것 같았다. 너무 속상했던 사건도 있다. 한 엄마가 어린 두 아이를 익사시킨 사건이다. 재판 도중 눈물이 너무 나와서 내 파스텔에 눈물이 떨어져 스케치가 망가질까봐 걱정이 됐다.”

-몇 장을 그리는지에 따라 돈을 받게 되나.

“아니다. 하루에 정해진 금액을 받는다. 나는 손가락이 떨어질 것 같을 때까지 그림을 그린다.”

-혹시 얼마 받는지...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당연히 안 된다!”

-민주당과 공화당 중 어느 편인가.

“나는 저널리스트다. 정치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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