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협화음이 빚어낸 묘한 앙상블…전도연 주연 연극 '벚꽃동산'

오보람 2024. 6. 5.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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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적 감정에 빠졌어. 그냥 순수하게."

우아한 중년의 여인 도영(전도연 분)이 가족이 모두 보는 앞에서 딸의 남자친구에게 입을 맞추고는 능청스럽게 말한다.

도영을 연기한 전도연은 이 작품을 통해 1997년 '리타 길들이기' 이후 27년 만에 연극 무대에 섰다.

평범한 사람이 보기엔 매우 이상한 도영이 밉지 않고 오히려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건 전도연의 연기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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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년 만에 무대 복귀…현실감 없는 알코올 중독자 연기로 관객 압도
연극 '벚꽃동산' 공연 장면 [LG아트센터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오보람 기자 = "순간적 감정에 빠졌어. 그냥 순수하게."

우아한 중년의 여인 도영(전도연 분)이 가족이 모두 보는 앞에서 딸의 남자친구에게 입을 맞추고는 능청스럽게 말한다. 식구들은 경악하지만, 도영은 뭐 이런 걸로 호들갑을 떠느냐는 태도다.

재벌 3세로 태어나 고생 한 번 안 하고 살아온 그는 매사에 현실 감각이 떨어지고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인물이다. 사세가 기울어 언제 집이 넘어갈지 모른다는 경고를 들어도 "난 내가 원하는 건 항상 얻었다"며 대책 없이 손 놓고 있는다.

지난 4일 서울 강서구 LG아트센터에서 개막한 연극 '벚꽃동산'은 회사의 경영 악화로 저택을 빼앗길 위기에 처한 알코올 중독자 도영과 그의 가족 이야기를 그린다. 세계적인 연출가 사이먼 스톤이 안톤 체호프의 고전을 재해석해 극의 배경을 120년 전 러시아에서 2024년 서울로 옮겼다.

도영을 연기한 전도연은 이 작품을 통해 1997년 '리타 길들이기' 이후 27년 만에 연극 무대에 섰다.

이창동 감독의 '밀양'(2007)으로 칸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트로피를 안은 명품 배우 전도연이 출연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벚꽃동산'은 예매 시작과 동시에 많은 회차가 매진됐다.

이날 1천300여석을 가득 채운 관객들도 숨을 죽인 채 그의 연기를 지켜봤다. 무대 구석에서 대사 없이 어딘가를 바라만 보고 있어도 관객의 시선은 전도연에게 향했다.

연극 '벚꽃동산' 공연 장면 [LG아트센터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평범한 사람이 보기엔 매우 이상한 도영이 밉지 않고 오히려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건 전도연의 연기 덕분이다.

글로 봤다면 아무것도 아닌 말이 도영의 입을 거치는 순간 어느새 폭소를 유발하는 유머러스한 대사로 바뀐다. 도영이 몇 년 전 막내아들 해준을 잃은 상처를 웃는 얼굴로 가리고 있는 모습 또한 애처롭다.

영화·드라마 등에서 주로 활동한 배우들이 연극에선 어려움을 겪는 사례도 있지만, 전도연은 특유의 또랑또랑한 대사 처리와 풍부한 감정 연기를 무대에서도 그대로 보여준다. 연기를 잘하는 배우는 어디에서도 존재감을 발휘한다는 걸 새삼 실감하게 한다.

'벚꽃동산'에는 도영 외에도 속내를 알 수 없는 사업가 두식(박해수), 도영의 오빠이자 회사를 이끄는 재영(손상규), 도영의 두 딸 현숙(최희서)과 해나(이지혜), 도영·재영 남매의 사촌 영호(유병훈), 가정부 두나(박유림), 해준의 과외 선생이었던 동림(남윤호) 등이 나온다.

다양한 인물이 별채라 불리는 이층집 안팎에서 제각각 등장하는 만큼 이야기는 다소 산만하게 전개된다. 이들이 한데 모인 자리에서도 모두가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는 바람에 대화는 뚝뚝 끊긴다.

이대로 가다간 집안이 망한다며 회사를 팔라는 두식과 술이나 마시자며 냅다 춤추는 도영, 창고에서 꺼낸 레코드에 말을 거는 재영, 재영 남매에게 돈을 빌려달라는 영호, 혼자서 발끈해 사회 지도층의 부도덕을 비판하는 동림, 남몰래 연애에 몰두하고 있는 두나….

연극 '벚꽃동산' 공연 장면 [LG아트센터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이 같은 불협화음에도 배우들의 연기는 묘한 앙상블을 빚어낸다. 여기저기서 대사가 쏟아져 나오는 와중에도 결코 리듬감을 잃지 않아 캐릭터 각각의 개성이 빛난다.

말맛 살린 연기 덕에 관객은 분명 비극을 보고 있는데도 웃음이 나오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러시아 귀족의 몰락을 그린 원작과는 달리 이 작품은 우리 사회의 신(新) 귀족인 재벌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금수저'와 자수성가 사업가, 고용인과 피고용인 간 계급의 충돌이 중요하게 다뤄진다.

이런 불균형은 집의 모양에서도 드러난다. 도영이 열여섯살 생일 선물로 할아버지에게서 받았다는 이 집은 으리으리하면서도 아슬아슬해 보인다. 지붕을 중심으로 오른쪽은 가파른 계단으로, 왼쪽은 완만한 계단으로 이뤄졌는데 배우들은 이곳을 걸어다니며 긴장감을 놓을 수 없게 한다.

사이먼 스톤은 이 작품에 대해 "전쟁 이후 특권을 누려온 가정을 통해 한국적인 특수성을 반영했지만 사회적 불평등이나 부와 가난에 대한 오랜 갈등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담고 있다"고 소개했다.

'벚꽃동산'은 다음 달 7일까지 원캐스트로 공연한다.

연극 '벚꽃동산' 공연 장면 [LG아트센터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ramb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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