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방안, 노태우와 윤석열의 차이 [김연철 칼럼]

한겨레 2024. 6. 3.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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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오른쪽)과 강인덕 전 통일부 장관이 지난달 14일 오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통일연구원 주최, 통일부 후원으로 열린 ‘민족공동체통일방안 30년 평가 및 통일담론 발전방향’ 토론회에 나와 ‘원로 대담’을 하고 있다. 이제훈 기자

김연철 | 전 통일부 장관·인제대 교수

“몇 사람이 작업해서 올리고, 대통령이 무슨 중대 발표 식으로 낭독하던 시대는 이제 지나갔다.” 35년 전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만들 때, 이홍구 통일원 장관의 말이다. 그의 말처럼 통일방안을 만들려면 의견을 수렴해야지 일방적으로 선언할 일이 아니다. 윤석열 정부가 조만간 발표할 통일방안은 내용의 문제를 떠나 준비 과정이 퇴행적이다. 1989년에 태어나서 약간의 수정을 거쳤지만 여전히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통일방안인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35년 전에는 국회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때도 지금도 여소야대 상황이지만 노태우 정부는 야당과 소통하고 협력했다. 정부가 일을 하려면 당연히 다수를 차지하는 야당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 당시 국회는 통일정책특별위원회를 만들었다. 민정당과 더불어 김대중의 평화민주당,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이 각 당의 통일방안을 발표하고 서로 토론했다. 차이점도 분명했다. 야당은 민간 통일운동을 탄압하는 정부를 비판했다. 그러나 토론 과정에서 공통점도 확인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의견을 수렴하고 합의를 모으는 무대가 바로 국회다. 여소야대 상황에서 정부가 야당을 인정하지 않으면 일할 의지가 없다는 뜻이다.

35년 전에는 시민사회의 의견도 적극 수렴했다. 국회는 공청회를 열어 자유총연맹과 같은 보수 단체뿐만 아니라, 사실상의 이적 단체로 규정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도 초대했다. 북한과 접촉 창구가 있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도 불렀고 진보 언론이었던 한겨레신문 사장도 발언했다. 보수와 진보의 균형을 맞추고 흡수통일부터 주한미군 철수까지 다양한 의견이 분출했고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당시 통일원도 서울과 지방을 가리지 않고 258회에 걸쳐 각계각층의 의견을 들었다. 물론 정부의 통일방안이 충돌하는 의견을 모두 담을 수는 없다. 당시 야 3당이 정부의 통일방안을 지지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토론은 차이를 인정하며 공통점을 찾는 과정이다. 통일 3원칙 중 자주는 당연하고 평화는 상식이지만 민주의 원칙이 그래서 중요하다.

민주는 의견의 통일이 아니라 서로 다른 생각의 공존을 의미한다. 그래서 다수의 합의를 추구하면서도 소수의 생각을 존중해야 한다. 민주적 합의는 한번으로 닫지 않고 결론을 열어놓고 여러번 반복하는 과정이다. 35년 전의 통일방안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인정을 받았는데, 윤석열 정부의 통일방안은 왜 관심조차 끌지 못하는가? 바로 민주의 원칙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론을 정해놓은 의견 수렴은 민주가 아니다. 윤석열 정부의 결론인 ‘자유민주주의’는 자유와도 관계가 없고 민주주의와도 거리가 멀어 보인다.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이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아주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통일을 결과가 아니라 과정으로 이해했다는 점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처럼 현재 대북 정책의 무능을 통일 이후의 미래로 덮는 방식과 거리가 멀었다. 대화의 시대는 통일의 과정에 집중하고 대결의 시대는 통일의 결과만 강조한다. 통일 과정에서 남북한의 공존과 공영의 추구는 진보 정부가 아니라, 보수 정부인 노태우 정부부터 시작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은 바로 대화 시대의 통일 담론이었다. 노태우 정부는 통일방안을 발표하고 곧바로 남북대화를 추진했다.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대결 시대의 통일방안과 다르게 상대를 인정하고 흡수가 아니라 공존을 내세우고, 통일 과정에서 군사적 신뢰 구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윤석열 정부의 통일방안은 알고 보면 노태우 정부 이전, 즉 냉전 시대로의 후퇴를 의미한다.

접경에서 서해에서 다시 긴장이 높아지고 있다. 지금은 울림이 없는 냉전 시대의 통일방안을 다시 꺼낼 때가 아니다. 정부는 충돌 직전으로 흘러가는 한반도 정세를 관리해야 할 책임이 있다. 물론 발등의 불도 꺼야 하지만 미래도 생각해야 한다. 세월이 흐르고 세대가 달라지고 정세가 변하면서 통일 담론도 변한다.

새로운 통일 담론을 위해서는 35년 전처럼 담론의 문을 열어놓아야 한다. 야당의 의견도 듣고 시민사회의 목소리도 적극적으로 수렴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시끄럽고 시간이 걸리지만 그런 과정을 거쳐야 합의가 넓어지고 오래간다. 관변 학자를 동원해서 급히 만든 통일방안이 생명력이 있겠는가? 모래성 같은 관변의 논리는 정부와 함께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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