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탄 주검 행렬은 언제 멈추는가
벌써 여덟 번째다. 타랄 사예드 살만이 다시 짐을 싼다. 잿더미를 뒤져 불에 그을린 가재도구 중에 그나마 쓸 만한 걸 챙긴다. 대가족이 탄 낡은 승합차 지붕에는 땔감을 잔뜩 얹었다. 목적지는 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 남부 칸유니스 외곽 하마드로 정했다. 거기라고 안전할까? 거기라고 죽음이 없을까? 살만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이스라엘이 안전하다던 곳… 매일 죽어간다”
가자지구 북부 베이트라히야에 살던 살만 일가족은 2023년 10월7일 이스라엘군의 침공 이후 ‘안전’을 찾아 가가지구 전역을 떠돌았다. 이스라엘군은 툭하면 ‘대피명령’을 내렸다. 하늘에서 전단지가 내려오고, 휴대전화 경고음이 울렸다. 살만은 2024년 5월27일 아랍 위성방송 <알자지라>에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스라엘군)이 떠나라고 할 때마다 떠났다. 여기는 안전하다고 했다. 그런데 왜 공격하나? 완벽한 굴욕이다. 우리는 매일 죽어가고 있다.”
살만 일가족이 머물던 곳은 가자지구 최남단 라파 외곽의 탈알술탄이다. 5월7일 본격화한 이스라엘군의 라파 지상군 작전으로 일곱 번째 떠나온 곳이었다. 이스라엘군이 ‘대피지역’으로 지정한 그곳에 살만과 같은 피란민 수천 명이 간이천막을 치고 지냈다. 5월26일 저녁 8시45분께(현지시각) 어둠이 깔린 가난한 피란민촌이 섬광과 굉음에 휩싸였다. 예고 없이 날아든 폭탄 8발이 천막촌을 삽시간에 불구덩이로 만들었다. 다급한 외침과 비명이 사방에서 터져나왔다.
이튿날 팔레스타인 적신월사(이슬람권 적십자사) 쪽은 여성(12명)·어린이(8명)·노약자(3명)를 포함해 모두 45명이 숨지고 249명이 다쳤다고 밝혔다. 일부 희생자의 주검은 불에 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머리가 통째로 날아간 어린이 주검도 발견됐다. 국제사법재판소(ICJ)가 “라파에서 모든 군사행동을 중단하라”는 긴급 명령을 내린 게 불과 이틀 전이다. 세계가 새삼 경악했다.
이스라엘 제재 논의 나오는 유럽의 변화
“비극적 사건이다. 진상을 철저히 조사하겠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5월27일 의회(크네세트)에 출석해 이렇게 말했다. 참혹한 민간인 피해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그가 늘 내놓는 소리다. 이스라엘 쪽은 탈알술탄 공습으로 이슬람 무장 정치단체 하마스 고위인사 2명을 사살했다는 내용도 공개했다. ‘테러범’을 잡기 위한 공습이었으니, 민간인 피해는 ‘부수적’이란 주장을 하려는 건가?
유럽 쪽에선 사뭇 다른 얘기가 나오고 있다. 미할 마틴 아일랜드 외교장관은 5월27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유럽연합(EU) 외교이사회 회의 뒤 기자들과 만나 “유럽연합 차원의 회의에서 사상 처음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제재 문제가 실질적으로 논의됐다”며 “국제 인도주의법 체제를 지켜야 한다는 매우 분명한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말했다. 이스라엘이 국제사법재판소의 결정을 따르지 않으면 제재를 부과해야 한다는 주장이 커지고 있다는 얘기다. 나치의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에 대한 공통의 ‘부채 의식’으로 친이스라엘 편향이 강했던 유럽이 달라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일랜드·스페인·노르웨이 3개국은 예고한 대로 5월28일 팔레스타인을 정식 국가로 승인했다. 이로써 193개 유엔 회원국 가운데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한 나라는 모두 145개국으로 늘었다.
미 백악관은 여전히 “레드라인 안 넘었다”
“주말 새 라파에서 이스라엘군 공습으로 어린이를 포함한 무고한 팔레스타인 주민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다. 충격적인 사진과 보도를 보셨을 줄 안다. 가슴 아프고 끔찍한 일이다. 물론 이스라엘은 하마스 소탕에 나설 권리가 있다. 이번 공습으로 이스라엘 국민을 겨냥한 공격에 직접 책임이 있는 하마스 고위급 테러범 2명이 사망한 걸로 안다. (…) 이미 여러 차례 밝힌 것처럼 이스라엘은 무고한 인명 피해를 막기 위해 가능한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존 커비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전략소통조정관은 5월28일 언론 브리핑에서 이렇게 말했다. 유럽의 ‘개심’에 대해서도 “이 문제에 대해 국제사법재판소가 사법관할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제재 계획은 없다”고 선을 그었다. 탈알술탄 민간인 공습 사건을 두고 커비 조정관이 “비극적이지만, 이스라엘이 바이든 대통령이 무기 공급을 중단하겠다고 밝힌 ‘레드라인’(금지선)을 넘은 것은 아니다”란 주장을 내놓자, 기자들의 날선 질문이 꼬리를 물었다. 백악관이 공개한 브리핑 녹취록을 보자.
“어떻게 이번 사건이 바이든 대통령이 정한 ‘레드라인’을 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나?”(기자)
“대규모 지상전은 아직 벌어지지 않았다.”(커비 조정관)
“불에 탄 주검을 얼마나 더 봐야 대통령이 정책 변경을 고려할 건가?”(기자)
“단 1명의 무고한 목숨도 더 상하는 걸 원치 않는다. 질문이 약간 불쾌하다. 미국은 민간인 피해에 눈감지 않았고, 이번 사건을 포함해 이스라엘 쪽에 충분히 문제 제기를 해왔다. 현재 이스라엘 쪽이 진상조사를 하고 있다. 결과를 지켜보자.”(커비 조정관)
앞서 바이든 대통령은 5월8일 <시엔엔>(CNN) 방송과 한 인터뷰에서 “이스라엘군이 라파로 진입하면 미국산 무기 공급을 중단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이스라엘군이 아직은 국경지대에서 작전 중이다. 인구밀집 지역으로 진입하면 미국의 지원을 받지 못할 것이란 점을 네타나후 총리와 전시 내각에 분명히 밝혔다”고 덧붙였다. 커비 조정관은 브리핑에서 “라파 전역이 인구밀집 지역”이란 점을 인정하면서도, “탈알술탄 민간인 사망 사건은 공습으로 인한 것이며 라파에서 대규모 지상군 작전은 아직 벌어지지 않았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추가 포격 맞은 난민촌서 미국산 폭탄 파편 발견
커비 조정관이 브리핑을 한 5월28일 이스라엘군이 ‘대피지역’으로 지정한 라파 남서부 알마와시의 피란촌에 포격이 가해져 여성 12명을 포함해 21명이 숨지고 중상자 10명을 포함해 60여 명이 다쳤다. 같은 날 <로이터> 통신은 목격자의 말을 따 “이스라엘군 탱크와 장갑차가 라파 시내 중심가로 진입했다”고 전했다. <뉴욕타임스>는 5월29일 탈알술탄 사건 현장에서 미국산 정밀유도폭탄(GBU-39) 파편이 발견됐다고 전했다. 신문은 “라파 공세에 앞서 미군 쪽이 ‘대형 미사일보다 정밀도가 높아 민간인 피해를 줄일 수 있다’며 이스라엘 쪽에 사용을 권장한 무기”라고 덧붙였다.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이 펴낸 최신 자료를 보면, 2023년 10월7일부터 2024년 5월29일까지 이스라엘군의 공격으로 가자지구 주민 3만6171명이 숨지고 8만1420명이 다쳤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Copyright © 한겨레2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