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기 재야거목 사랑방 “6800명이 함께 만든 터전”

2024. 5. 28.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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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역 도보 3분...핫플 사이 ‘붉은벽돌집’
한 돌 쌓기 운동·백기완 기억하는 시민들
모금운동 거쳐 1990년 통일문제연구소 이전
통일꾼·노동해방꾼·예술꾼·이야기꾼 테마
백소장 미공개 시·사진·아꼈던 단어 공개
서울 종로구 대학로 ‘백기완 마당집’의 정원과 입구 전경. 왼쪽의 살구나무는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이 생전 벗이었던 신학철 화백(현 재단 이사장)으로부터 묘목을 선물 받아 기른 것이다. 창문에는 백 소장의 미공개 시 ‘헌 신문을 읽다가’와 이종구 화백의 작품 ‘별이 된 백기완’이 나란히 전시됐다. 김진 기자

서울 지하철 4호선 혜화역 3번 출구에서 걸어서 약 3분, 미로처럼 얽힌 좁은 골목 사이 ‘백기완 마당집’은 숨어 있다. ‘감성 맛집’으로 소개될 법한 카페와 식당들 틈 붉은 벽돌로 지어진 아담한 주택은 오히려 시선을 잡아 끈다. 고(故) 백기완(1933~2021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의 생전 붓글씨 모양을 본뜬 간판과 오래된 철제 대문을 따라 시선을 내리면 마당집의 뿌리를 알 수 있다. 1967년 백범 김구 선생의 이름을 딴 백범사상연구소를 출범, 1984년 통일문제연구소로 이름을 바꿔 이끈 그가 30년 넘게 저서를 집필하던 사무실이자 격동기 재야 인사들의 사랑방이다. 문패엔 오랜 벗인 문정현 신부가 서각한 ‘해방세상’ 네 글자가 이름 대신 새겨졌다. 이 집의 발자취를 소개하는 글은 이를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고, 그리하여 너도 잘살고 나도 잘살되, 올바로 잘사는 노나메기 세상을 꿈꾸고 실천하던 보금자리”라고 했다.

백 소장이 세상을 떠난 지 약 3년 만인 올해 노동자의 날(1일) 문을 연 마당집은 생전 백 소장에 대한 모든 것을 기억하는 공간이다. 백 소장이 1980년대 대학가 강연비와 민중모금운동이었던 ‘통일마당집 한 돌 쌓기 운동’을 통해 모은 자금, 김구 선생에게 받은 붓글씨 2점 등을 팔아 마련한 그의 사무실이 돌담벽을 허물고 시민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채원희 백기완노나메기재단 사무처장은 28일 “한 돌 쌓기 운동은 당시 500원이었던 벽돌 한 장, 담배 한 가치 아껴서 터전을 만들자는 데서 출발했다”며 “이번에도 선생님을 기억하는 분들과 십시일반 돈을 모아서 원형을 최대한 보존하면서 개관하게 됐다”고 말했다. 한 돌 쌓기 운동과 마당집 개관에 도움을 준 시민 6800여명의 이름은 건물 외벽에 내걸린 대형 동판에 새겨졌다.

서울 종로구 대학로의 백기완 마당집 계단 벽면에 전시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의 연보. 위쪽에는 백 소장의 생애가, 아래쪽에는 근현대사 주요 사건 및 민중운동사가 적혔다. 김진 기자

이 곳에선 마당의 살구나무 한 그루마저 백 소장에 대한 일화를 풀어낸다. 백 소장에게 살구꽃은 자연의 빛깔을 담은 ‘민중의 꽃’이었고, 현재 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는 신학철 화백이 선물한 작은 묘목을 정성 들여 키워냈다. 손수 키운 나무에서 꽃이 핀 어느 날엔 신경림 시인이 지은 ‘월악산의 살구꽃’을 담벼락 벽시에 새기고 읊었다고 한다. 살구나무 그늘이 드리운 건물 외벽 창문에서는 백 소장의 미공개시 ‘헌 신문을 보다가’를 볼 수 있다. “별빛에게 물어본다 / 힘이 있다고 사람을 짐승처럼 죽이고 찍어 누르고 / 뺏어대도 되는 건가.” 옆에 놓인 시 구절을 닮은 초상화 ‘별이 된 백기완’은 노무현 대통령의 초상화를 그린 이종구 화백의 작품이다.

백 소장의 장편 시 ‘묏비나리’ 구절 일부를 가사로 쓴 ‘임을 위한 행진곡’이 흘러나오는 실내로 들어서면 본격적인 전시가 시작된다. 우선 백 소장의 생애를 ▷통일꾼 ▷예술꾼 ▷이야기꾼 ▷노동해방꾼 테마로 분류해 소개하는 글과 관련된 작품들을 볼 수 있다. 특히 한글사랑운동을 펼칠 정도로 우리 말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백 소장이 특별히 아꼈던 단어 24개를 소개한다.

오늘날 일상적으로 쓰이는 새내기(신입생), 모꼬지(수련회)뿐 아니라 아주마루(영원), 잘잘(빠이빠이·bye bye), 어림빨(상상력), 한살매(한평생), 2018년 평창올림픽에서 공식 구호로 쓰인 아리아리(없는 길을 찾거나 길을 낸다·파이팅 대체어), 백 소장을 소개할 때 등장하는 불쌈꾼(혁명가) 등 주옥 같은 우리 말을 만날 수 있다. 묏비나리의 친필 원고, 강연을 계기로 인연을 맺은 거스 히딩크 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보낸 편지 등도 전시됐다.

백기완 마당집 1층에 마련된 옛살라비 전시관에 백 소장의 저서 50여권이 놓여져 있다. 옛살라비 전시관에는 백 격동기 재야거목 사랑방 “6800명이 함께 만든 터전”소장의 저서 외에 생전 입었던 옷과 아끼던 책, 벗들로부터 선물 받은 그림 등이 전시됐다. 김진 기자

상설 전시가 이뤄지는 1층 왼쪽 방은 백 소장이 글을 쓰고, 사람을 만났던 작업실을 재현한 ‘옛살라비(고향) 전시관’이다. 백 소장의 저서 50여권과 아끼던 책, 벗들이 선물해 준 그림 등을 볼 수 있다. 6월 항쟁 때 입은 흰색 무명 저고리, 1974년 긴급조치 1호로 군사재판을 받았을 때 입었던 겨울용 수의도 내걸렸다. 책상 뒤편에 걸린 그림 ‘가위질하는 엿장수’는 신 이사장의 작품이자, 백 소장이 마지막까지 팔기를 거부한 애장품이다. 목젖이 보일 정도로 크게 무언가를 외치는 엿장수를 그린 그림에서 백 소장은 ‘프레스에 손가락이 잘린 뒤 생계를 위해 거리를 전전하는 공장 해고노동자’를 봤다. 신 이사장은 “선생님은 설명하지 않아도 그림을 해석하는 안목이 뛰어났다”고 회상했다.

2층에서는 개관특별전 ‘비정규직 노동자 백기완’ 전시가 이뤄진다. 백 소장이 마지막 20년을 함께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기억하고 문제 해결을 바라서다. 2011년 2월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에 항의하며 영도조선소 내 크레인에 올라 고공농성을 벌이던 김진숙 전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을 백 소장이 희망버스를 타고 찾아간 사진도 처음으로 공개됐다. 백 소장이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적은 글귀도 ‘노동해방’ 네 글자와 ‘김미숙(김용균씨) 어머니·김진숙 힘내라’였다. 김 전 위원은 해고 37년 만인 2022년 2월 명예복직 및 퇴직에 합의하며 해고노동자에서 벗어났다.

1층과 2층을 연결하는 전시의 ‘알기(중심을 뜻하는 우리 말)’는 계단 위에 새겨진 연보다. 해방 전인 1933년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나 축구선수를 꿈꿨던 백 소장이 2021년 눈을 감기까지 여정과 맞닿은 근현대사의 파고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백 소장이 펼친 각종 민중운동의 역사적 배경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장치다. 채원희 사무처장은 “선생님의 한살매가 근현대사”라며 “선생님은 민중의 시선으로 세상을 봤기 때문에, 연보에 민중운동사를 녹여냈다”고 설명했다. 민중운동사는 진보 정치학자 손호철 전 서강대 교수가 정리했다.

한편 마당집은 매주 화요일부터 금요일 오후 1시부터 7시까지, 토요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문을 연다. 매주 일요일과 월요일, 공휴일은 휴일이다.

김진 기자

soho0902@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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