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은 장례식장 같았다”…민중미술 대가 오윤의 벽화 ‘평화’의 운명은

노형석 기자 2024. 5. 27.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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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운명
벽화가 암갈색 가림막으로 덮힌 우리은행 종로4가 금융센터 건물. 오른쪽 상단 사선 모양 벽체의 벽화 전돌 부분에서 표면이 벗겨지고 조각이 떨어지는 박락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가림막은 지난 1월 설치됐다. 노형석 기자

망자가 된 작가 오윤(1946~1986)의 이름을 다시 불러야 할 시점이 왔다. 1970~80년대 한국 리얼리즘 미술사에서 전통 연희와 민화, 불화 등의 미학을 계승한 목판화, 채색화들을 남기고 요절한 민중미술 대표작가다. 38년 전 숨진 그가 50년 전 동료 작가들과 합심해 만든 벽화 명작이 부슬부슬 바스러지고 있다. 요절한 작가를 따라 반세기 만에 작품의 운명을 다하려는가.

“현장은 장례식장 같았습니다. 오윤 선배와 제가 만든 작품을 장사 지내는…”

오윤의 대학 후배이자 벽화 작업동료였던 오경환(75) 작가는 아픈 기억을 꺼냈다. 지난달 중순 그는 종로4가의 우리은행 금융센터를 찾아갔다. 1974년 청년 건축가 조건영이 설계한 배 모양의 2층짜리 업무용 건물이다. 오윤과 자신이 치열하게 작업했던 작품 무대인 건물 외벽을 보고 오 작가는 망연자실했다. 건물 1층의 사다리꼴 모양 전면부에 가로·세로 30㎝ 두께 3㎝ 짜리 전돌 1000여개를 붙여 만든 테라코타 벽화 ‘평화’는 보이지 않았다.

외벽 벽화가 암갈색 가림막으로 덮힌 우리은행 종로4가 금융센터 모습. 노형석 기자
1980년대 상업은행 종로4가 지점 외벽 테라코타 벽화. 한겨레 자료 사진

50년 전 조건영이 배 모양과 닮은 예각의 사다리꼴 모양으로 이 지점 1~2층 건물을 지을 당시 자신과 오윤이 고대 전통 전돌에서 모티브를 얻어 전돌의 문양과 모양을 디자인하고 굽고 붙였던 역작이었다. 청년 시절 자신들의 분신과도 같은 이 벽화는 가림막 아래 묻힌 듯 덮여있었다. 촘촘한 그물코가 있는 암갈색 가림막으로 덮인 채 일부 돌출된 윤곽만 겨우 확인할 수 있었다. 오 작가는 “벽화 위 가림막은 관 위에 덮는 천 같은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건물 내부 은행 객장 벽에 백제의 산수문전 이미지를 모티브로 작업해 올렸던 그림벽 ‘산경문’(山景文)은 망실되진 않았지만, 실체를 볼 수 없었다. 육중한 콘크리트 벽을 올려 보는 시선을 가로막아 놓았기 때문이다.

함께 작업한 이들이 살아있을 적에 이런 모습을 보지 않아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오 작가는 저세상으로 떠난 당시 작업 동료들을 떠올린다. 한국 현대 리얼리즘 미술의 거장 오윤과 경주의 문화재 복원 전문가이자 공예장인으로 전돌가마를 운영하던 마지막 신라인 윤경렬의 아들 윤광주(1945~2021)였다. 벽화의 테라코타 벽돌은 모두 윤광주의 경주 공방에서 운반했던 것들이었다.

은행 쪽이 가림막을 친 것은 지난 1월 초부터였다. 매연과 세월의 풍화로 벽화 오른쪽 윗부분의 돌출부 조각들이 계속 부슬부슬 떨어지는 박락 현상이 심해졌다고 한다. 벽화 아래서 장사하는 노점상인들과 행인들의 안전을 우려한 조치로 가림막을 쳤다고 했다. 하지만, 벽화를 제작한 생존 작가 오씨나 오윤의 여동생과 남편 등 유족들은 이 사실을 전혀 몰랐다.

1975년 촬영한 상업은행 종로4가 지점. 앞부분이 예각인 배모양의 기단부 입면과 사다리꼴 모양으로 생긴 전면 벽화 부분이 보인다. 건축잡지 ‘공간’ 1975년 2월호에 실린 사진이다.

은행 쪽은 가림막을 치고나서 4월이 될 때까지 국립현대미술관 등에 문의하면서 자체적으로 대책을 논의해왔다고 한다. 오 작가와 오윤의 유족인 여동생 부부는 벽화 인근을 지나가다가 관 덮개 같은 가림막을 보고 놀란 지인들의 제보를 받고 뒤늦게 은행에 연락해 벽화 상태를 알게 됐다. 직접 수소문한 다음에야 벽화가 빈사 상태에 처한 사실을 접하게 된 점이 그들을 우울하게 했다.

이 벽화의 소유자는 상업은행의 후신인 우리은행이다. 1974년 건립 당시엔 애초 상업은행 종로4가 지점 벽화로 알려졌다. 지금은 조선시대 민화와 불화에서 모티브를 딴 민중미술 판화로 유명한 오윤이지만, 서울 미대 조소과 출신의 조각도였던 그를 처음 세상에 알린 작품은 공동작품인 이 대형 벽화였다. 애초 “미술이 어떻게 언어의 기능을 회복할 수 있는가”를 오랫동안 고민했던 고인의 조형감각과 영감을 확인할 수 있는 걸작이며, 서울 도심에서 테라코타 초벌구이 전돌로 만든 유일한 대형 공공미술작품이었다. 사실 개발독재 시대였던 1970년대 초중반에 건축과 공공미술에서 전통과 전위를 함께 내포한 이런 혁신적 개념의 건축물과 작품이 등장했다는 점이 놀랍다.

이 작품은 우리 고대 문화유산의 조형적 특질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지금은 건축자재로 거의 쓰지 않는 전돌로 부조와 회화의 두가지 장르를 내·외벽에 함께 구현해냈다. 조형성 못지않게 고고미술사적 의미가 지대한 작품이다. 오윤은 1970년 서울대 미대 조소과를 졸업한 뒤 71년 입대했다가 위궤양으로 수술을 받고 1972년 의가사제대하는데 73년 테라코타 전돌을 활용한 벽화에 큰 관심을 갖고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한다. 오경환과 윤광주의 벽화 작업에 합류해 조건영의 광화문 건축사무실에 별도의 프로젝트 방을 꾸리고 작업에 몰두했다. 그렇게 해서 이들은 상업은행 용산 삼각동 지점 벽화와 구의동 지점 벽화, 그리고 종로4가 지점 벽화를 잇따라 제작하게 되는데, 조형적 완성도나 규모면에서 가장 크고 의미심장한 성취를 이룬 것이 바로 4가의 벽화 ‘평화’다.

이 전무후무한 벽화 작업은 오윤의 서울미대 동창친구였던 임세택이 자신의 아버지였던 당시 상업은행장 임춘식에게 경복궁 자경전 꽃담 같은 작품을 해드리겠다고 제안한 데서 비롯됐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하지만, 실제로는 건축가 조건영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건물 정면 외벽을 종로 거리공간의 내벽으로 보고 벽화 화폭으로 송두리째 내어준 그의 파격적 배려 덕분에 제작이 가능했던 것이다.

오윤은 1971년 세기적인 대발견으로 기록된 충남 공주 백제 무령왕릉 발굴 출토품 전돌의 꾸밈새와 문양에서 큰 영감을 받았다. 두 개의 테라코타 전돌을 합체해서 하나의 연꽃무늬가 만들어지고 이런 방식으로 수백개의 전돌들이 무덤의 내벽을 구성하면서 벽체 구조와 장식 효과를 함께 내고 있다는 점에 착안해 바로 이 벽화를 만든 것이다.

벽화가 완성된 직후 1975년 잡지 공간 2월호(통권 93호)에서 오윤이 건물을 설계한 조건영 건축가 동료 평론가 최민과 함께 나눈 대담 기사에 이런 작업 내용이 나온다. 대담 내용은 ‘평화’라고 이름 붙여진 종로 4가 우리은행 건물 벽화를 어떻게 구상하고 작업과정에서의 애로점과 주안점이 무엇이었는지를 증언하고 있는데, 민중과 함께 교감하는 사회적 건축, 사회적 미술이 무엇인가에 대한 선구적 논의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 대담에서 조건영은 “건축에 콘크리트가 구사되면서 한국의 전통적인 재료가 무시되고 이질적인 또 유행적인 재료로서 외벽이 형성되어 왔는데, 이번 경우에 있어서는 전의 가능성이 실험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했고, 오윤 또한 값비싼 동이나 화강석, 지저분한 시멘트 같은 기존 근대식 산업재료 대신 전통의 숨결이 깃든 전돌의 제약을 새로운 가능성으로 바꾸기 위해 부심했음을 털어놓고 있다.

서울 종로4가 상업은행 벽화를 작업하기 위해 오윤이 그렸던 밑그림. 구름과 하늘을 배경으로 사람이 누워있는 듯한 형상이다. 2006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고인의 작고 20주기 회고전 도록에 실린 도판중 일부다.

대담 말미에 오윤이 말했듯이 전통 전돌 작업은 새로운 시대 공공미술을 실현할 수 있는 또 다른 대안으로서 대형화와 민중과의 만남이란 과제를 남겼다. 결국 이 벽화를 끝으로 더 이상 대형 테라코타 벽화 작업은 이뤄지지 않고 대형화의 과제도 미완으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대도시 서울 공간의 숱한 격변 속에서도 끈질기게 자취를 잃지 않고 살아남았다.

은행 쪽은 최근 찾은 오 작가의 항의 섞인 지적을 받은 뒤 우선 내달 3일 작가 입회 아래 작품 훼손 상황을 파악하는 조사작업을 벌일 예정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본격적인 현장 보수작업에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뒤늦게 오 작가가 보수 작업에 직접 관여하게 됐지만, 보수 과정에서 작품의 보존 환경에 대해 어떤 정도의 진단이 나오는지에 따라서는 작품의 복제품 설치, 이전 복원이나 원상태 보존이냐를 놓고 논란이 빚어질 소지도 있어 보인다.

“민중의 언어로 민중과 만나야 한다”는 ‘예술가의 자기극복’을 누누이 강조했던 오윤의 뜻이 어린 그의 첫 작품이었던 만큼 후배 오 작가와 은행 쪽이 충실한 논의로 벽화 복원과 보존에 성과를 내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글 ·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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