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광훈의 산인만필(散人漫筆) <38> 모란 이야기] “남은 꽃 다 지자 피어나니 좋은 이름 백화의 왕이라 불린다오”

홍광훈 문화평론가 2024. 5. 27.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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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우거 마당에서 꽃을 피운 고목 모란. /사진=홍광훈

‘모란(牡丹)’은 후한 말 장중경(張仲景)의 의서 ‘금궤요략(金匱要略)’에 처방 약재 중의 하나로서 처음 등장한다. ‘牡’는 동물의 수컷을 통칭하는 말이다. 16세기 후기에 이시진(李時珍)이 지은 ‘본초강목(本草綱目)’은 “모란이 비록 씨를 맺지만, 뿌리 위에서 싹이 생기므로 ‘모’라 하고, 그 꽃이 붉어 ‘단’이라 한다(牡丹雖結籽而根上生苗, 故謂牡, 其花紅, 故謂丹)”고 명칭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목단(牧丹)’으로 부르는 경우가 적지 않고 중국에서도 일부 그렇게 쓰이지만, 일본에서는 ‘牡丹’으로만 표기하고 ‘보탄(ボタン)’이라 읽는다. 중국의 옛 문헌에서 ‘牧丹’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모란을 읊은 수백 수의 당시(唐詩) 중에서 가도(賈島)의 ‘봉박릉고인팽병조(逢博陵故人彭兵曹)’라는 절구에서만 “이전까지는 목단 꽃을 아직 몰랐다(向前未識牧丹花)”고 되어 있다.

홍광훈 문화평론가국립대만대학 중문학 박사,전 서울신문 기자,전 서울여대 교수

중국의 서북쪽이 원산지인 모란은 주로 약재로 쓰이다가 수(隋)나라 때부터 궁중에서 관상용으로 재배하기 시작했다. 당(唐)나라 때에는 사회가 안정되고 경제가 번영하면서 귀족들의 정원이나 사원 등지에도 다투어 모란을 심었다. 그리하여 모란의 재배와 감상이 크게 성행해 하나의 시대 풍조를 이루었다. 당 중기의 노륜(盧綸·739~799)은 ‘배급사 댁의 흰 모란(裴給事宅白牡丹)’이란 절구에서 당시 사람들의 모란 사랑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장안의 부호 귀족들은 가는 봄 아쉬워, 거리 서쪽 자주색 모란 다투어 구경하네(長安豪貴惜春殘, 爭玩街西紫牡丹).”

백거이(白居易·772~846)는 ‘모란꽃을 아쉬워함(惜牡丹花)’이란 절구에서 그 애절함을 이렇게 드러냈다. “계단 앞 붉은 모란을 슬퍼하나니, 저녁 되어 두 가지만 남았구나. 내일 아침 바람 일면 다 불려 갈 테니, 이 밤에 시든 꽃 아까워 불 들고 보노라(惆悵階前紅牡丹, 晚來唯有兩枝殘. 明朝風起應吹盡, 夜惜衰紅把火看).” 그는 또 ‘모란방(牡丹芳)’ 이란 긴 시에서 “꽃이 피고 꽃이 떨어지는 스무날 동안, 온 성 사람이 모두 미친 듯하다(花開花落二十日, 一城之人皆若狂)”고 당시의 열기를 전해주고 있다.

유우석(劉禹錫·772~842)의 절구 ‘모란 감상(賞牡丹)’은 모란을 가장 아름다운 꽃으로 치켜세웠다. “뜰 앞 작약은 요염해 품격 없고, 못 위 연꽃은 깨끗해 정다움 적다오. 오직 모란만이 진정 천하절색이니, 꽃 피는 시절에는 도성이 들썩이게 한다오(庭前芍藥妖無格, 池上芙蕖淨少情. 唯有牡丹眞國色, 花開時節動京城).”

모란 애호가가 많아지자, 그 값도 치솟았다. 왕건(王建·765~830)은 ‘한설(閑說)’ 율시에서 “진 지방의 농주는 앵무새로 귀해지고, 왕후장상 집은 모란 때문에 가난해진다(秦隴州緣鸚鵡貴, 王侯家爲牡丹貧)”고 그런 세태를 풍자했다. 당시의 귀족들이 다투어 앵무새를 기르고 모란을 사들이는 바람에 앵무새가 많이 나는 농주는 귀한 대접을 받고, 비싼 값에 모란을 사들인 집안은 재산을 탕진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말이다.

백거이의 장시 ‘진중음(秦中吟)’ 10수 중 ‘매화(買花)’는 이렇게 시작된다. “제왕의 성에 봄이 저물려는데, 시끌벅적 수레와 말이 지나가누나. 함께 모란을 이야기할 때, 서로 따라 꽃 사러 간다네(帝城春欲暮, 喧喧車馬度. 共道牡丹時, 相隨買花去).” 상류층이 이처럼 사치를 즐기다 보니 “집집마다 익숙해져 풍속을 이루고, 사람마다 빠져들어 깨어나지 못한다(家家習爲俗, 人人迷不悟)”는 상황이 된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백성의 한숨 소리가 들려온다. “어느 한 시골 노인 있어, 우연히 꽃 사는 곳에 왔나니. 고개 숙여 홀로 길게 한숨 쉬는데, 이 한숨 아는 이 없더라. 한 떨기 짙은 색 꽃값이, 열 가구 보통 사람 세금이로세(有一田舍翁, 偶來買花處. 低頭獨長歎, 此歎無人喻. 一叢深色花, 十户中人賦).”

이러한 사회 현상은 많은 인사에게 모란에 대한 깊은 반감까지 갖도록 했다. 모란이 비싸다는 소문을 듣고 의아해하던 유혼(柳渾·714~789)은 꽃을 처음 본 소감을 다음의 ‘모란’ 절구로 빈정댔다. “근년 들어 모란을 어찌할 수 없어, 수만 전에 한 그루를 살 수 있다네. 오늘 아침에야 비로소 분명하게 보았나니, 접시꽃에 견주어 봐도 많이 다르지 않더라(近來無奈牡丹何, 數十千錢買一顆. 今朝始得分明見, 也共戎葵不校多).”

당 중기의 왕곡(王轂)은 ‘모란’ 절구로 이렇게 조롱했다. “요염한 모란은 사람 마음 어지럽혀, 온 나라가 미친 듯 돈을 아끼지 않네. 어찌 동쪽 뜰의 복숭아나 오얏과 같이, 열매 익어도 말 없고 스스로 그늘을 드리우랴(牡丹妖艷亂人心, 一國如狂不惜金. 曷若東園桃與李, 果成無語自垂陰).” 이 시는 ‘전당시(全唐詩)’의 왕예(王睿) 편에도 수록돼 있다.

북송 초에 재상까지 지낸 왕부(王溥·922~ 982)는 ‘영모란(詠牡丹)’ 절구로 실용적인 면에서 모란의 가치를 호되게 깎아내렸다. “대추 꽃은 지극히 작지만 열매 맺을 수 있고, 뽕잎은 비록 부드러우나 실을 토할 줄 안다. 말처럼 큰 모란은 비웃을 만하니, 한 가지 일도 이루지 못해 또한 빈 가지로다(棗花至小能成實, 桑葉雖柔解吐絲. 堪笑牡丹如斗大, 不成一事又空枝).”

모란에도 등급이 있다. 짙은 자주색 꽃을 제일로 치는 반면에 흰 꽃은 인기가 없었다. 이 같은 사정을 백거이가 ‘흰 모란(白牡丹)’ 절구에서 “흰 꽃은 냉담해 좋아하는 사람 없는데도, 또한 아름다운 이름 차지해 모란으로 불린다(白花冷澹無人愛, 亦占芳名道牡丹)”고 알려준다.

당 후기의 장우신(張又新)도 짙은 색 꽃이 필 것으로 기대했던 모란이 흰 꽃을 피우자, 그 실망감을 다음의 ‘모란’ 절구로 토로했다. “모란 한 송이에 천금 가치 있어, 지금껏 색이 가장 짙기를 바랐노라. 오늘 온 난간 가득 눈처럼 피어나, 일생의 꽃 보는 마음 저버리도다(牡丹一朶値千金, 將謂從來色最深. 今日滿欄開似雪, 一生辜負看花心).” 이 시와 관련해 다음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일찍 장원급제한 장우신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젊어서 명예를 얻었으니 벼슬 걱정은 하지 않는다. 다만 예쁜 아내만 얻는다면 평생의 바람이 족하겠다.” 그가 신뢰하던 선배가 이 말에 자기의 딸을 추천하자 예쁠 것이라 믿고 아내로 맞아들였으나, 알고 보니 심성은 곱지만 천하의 박색이었다. 그때의 난감한 심경을 이 시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맹계(孟棨)가 지은 ‘본사시(本事詩)’의 ‘정감(情感)’ 항목에 실려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오는 선덕여왕의 일화로 인해 모란꽃에 향기가 없다고 와전되기도 했지만, 사실은 매우 짙은 향기를 내뿜는다. 왕건(王建)은 ‘빌린 집의 모란꽃에 부침(題所賃宅牡丹花)’이란 율시의 마지막에서 “시들어 떨어진 꽃술이 가여워, 거두어들여 향으로 삼아 태운다(可憐零落蕊, 收取作香燒)”고 읊어 그 향이 진함을 증언하고 있다.

당 말기의 피일휴(皮日休)는 ‘모란’ 절구로 그 자태와 향기를 극찬했다. “남은 꽃 다 지자 피어나니, 좋은 이름 백화의 왕이라 불린다오. 하늘 아래 둘도 없는 요염함 다투어 자랑하고, 세상에 홀로 선 제일의 향기라오(落盡殘紅始吐芳, 佳名喚作百花王. 競誇天下無雙艷, 獨立人間第一香).”

또한 북송 초에 출간된 이야기책 ‘태평광기(太平廣記)’에는 “황제가 대전 앞에 천 잎의 모란을 심었는데, 꽃이 피기 시작하면 향기가 사람에게 덮쳐온다(上於殿前種千葉牡丹, 及花始開, 香氣襲人)”는 기록이 보인다.

모란과 가장 비슷한 꽃이 작약이다.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도 더러 있다. 그러나 모란은 목본이고 작약은 초본이다. 그래서 당나라 때부터 모란을 ‘목작약(木芍藥)’으로 부르기도 했다. 둘의 개화 시기도 다르다. 모란이 지면 바로 작약이 피기 시작한다. 북송(北宋) 초의 왕우칭(王禹偁·954~1001)은 ‘작약 꽃 피니 모란이 그립다(芍藥花開憶牡丹)’는 절구에서 “비바람 매정하게 모란꽃 떨어뜨리자, 계단 뒤덮은 빨간 작약 붉은 난간에 가득하다(風雨無情落牡丹, 翻階紅藥滿朱欄)”고 자기가 관찰한 바를 묘사했다.

모란도 여느 꽃과 마찬가지로 오래가지 못한다. 그야말로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다. “한날 밤 가벼운 바람 일더니, 천금으로 사려 해도 없다(一夜輕風起, 千金買亦無)”는 왕건의 ‘상모란(賞牡丹)’ 시구대로 모란이 지고 봄은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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