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상담심리학회] 국민소득 3만 달러와 정신건강 패러다임의 전환 – 영국의 선례

2024. 5. 27.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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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으로 훨씬 풍족해진 삶을 살아가는 우리는 그렇지 못했던 과거 세대보다 더 행복해졌을까? 이 질문에 대해 사람마다 다른 답을 가지고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나의 행복이 중요한가?”라는 질문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답을 하지 않을까? 

먹고 살기 어렵던 1960~1970년대 고도의 경제성장기와 뒤따른 IMF를 경험한 1980~1990년대에는 국가와 회사, 가족이 우선시됐고 개인의 행복은 삶의 우선순위에서 소외됐다. 이에 반해 2020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과거 어느 세대보다 경제적인 풍요를 누리고 있다. 한국이 이른바 선진국 클럽이라고 불리는 OECD에 가입한지도 어언 25년이 넘었다. 2017년에는 비로소 1인당 국민소득(GDP)이 기념비적인 3만 달러를 넘어섰다. 기본적인 의식주의 걱정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니 무엇이 행복인가, 나는 행복한가를 고민하게 된다.

혹자는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가 넘어야 사람들이 자신의 심리적 욕구에 주목하기 시작하고, 결과적으로 심리학이 널리 인기를 끌게 된다고 말한다. 그것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공교롭게도 우리가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넘어서고 6년이 지난 2023년 12월에 보건복지부에서 정신건강정책 혁신방안을 발표한 것을 보면 아마도 우리 정부가 우리 국민들에게도 그동안 뒷전이었던 자신의 심리적 욕구, 행복, 마음돌봄 등이 삶의 중요한 요소가 돼 가고 있다고 판단한 듯하다.

정신건강정책 혁신방향의 핵심 목표 중 하나는 2027년까지 국민 100만 명에게 전문 심리상담을 지원해 일상적 마음돌봄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정신건강 정책이 중증 질환에 대한 치료 중심의 구조였던데서 나아가 일상에서의 관리와 돌봄, 예방의 패러다임으로 확장하겠다는 변화의 방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필연적으로 정신건강 전문인력의 공급량을 늘리고 이와 동시에 전문성을 확보해야 하는 문제로 연결된다. 대국민 정신건강 서비스의 급격한 양적 확대가 결국 서비스의 질적 하락을 일으킨다면 서비스 이용자인 국민들이 피해를 입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를 방지하면서도 정신건강 정책의 패러다임이 효과적으로 전환되기 위한 구체적 방안이 마련돼야 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보다 앞서 비슷한 상황을 맞이했던 국가의 사례를 살펴보고자 한다. 신기하게도 한국과 비슷하게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넘어서고 6년 뒤에 치료 중심의 정신건강 패러다임을 일상적 돌봄 중심의 패러다임으로 확장한 국가가 있다. 바로 영국이다. 영국은 2002년에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넘어섰고 2008년부터 정부 주도로 심리치료 확대 프로그램(IAPT)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영국 정부는 중증 정신질환 치료 중심으로 운영되던 기존의 심리치료를 경증 정신질환이나 일반적인 수준의 정신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국민에게까지 확대했다. 현재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18세 이상 국민은 누구나 지역 병원이나 지역사회 공공기관, 봉사단체 등을 통해 무료로, 증상의 심각도에 관계없이 심리적 도움과 관리를 받을 수 있게 됐다. 

IAPT 시행 이전에도 중증 정신질환을 치료하는 인력들은 존재했다. 정신과 전문의, 정신건강 간호사, 임상 및 상담심리사 등이다. 이들은 법으로 보호받는 전문직으로 엄격한 수준의 전문성과 윤리성을 요구받는다. 전문의가 되기 위해서는 의대에서 학위를 취득해야 하고, 심리사가 되기 위해서는 영국 심리학 협회가 인준한 기관에서 심리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일정 기간의 실무수련 과정을 거쳐야 한다.

하지만 중증도 이하의 정신질환이나 일상적 어려움의 영역까지 심리치료의 대상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다른 인력들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IAPT는 ‘심리적 웰빙 실무자’라는 역할을 만들었다. 이들은 대상자가 경험하는 어려움의 정도를 파악하고, 스스로 정신건강을 관리해 나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역할을 한다. 심리적 웰빙 실무자가 되기 위해서는 특정 학위가 필요하지는 않지만 영국 심리학 협회가 인준한 일련의 교과목과 훈련과정을 이수해야 한다.

또 일상적 수준 이상의 어려움을 경험하는 이들을 담당하기 위해서 고강도 치료사라는 역할을 지정했는데 여기에는 임상 및 상담심리사 뿐만 아니라 인지행동치료사, 상담사 등이 포괄적으로 포함됐다. 그런데 이들이 공공 심리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에 대해 의문이 제기됐다. 인지행동치료사나 상담사 같은 직군은 대체로 준석사 과정이라고 불리는 실무중심의 심화학습 및 수련을 거치기는 하지만 심리사처럼 법적으로 그 전문성이 엄격히 관리되는 직역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영국 정부는 IAPT에 고강도 치료사로 참여하려는 자는 건강 및 사회복지 전문직을 감독하는 기구에 의해 인정받은 전문가 협회(영국 상담 및 심리치료 협회 등)에 등록돼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두었다. 특정 전문가 협회가 자신의 회원들이 IAPT의 치료사로 활동할 수 있도록 하려면 자신들의 전문성과 윤리성에 대한 기준을 상위 감독기관에 인준을 받고 지속해서 감시받도록 한 것이다.

즉 영국은 IAPT의 도입을 통해 공공 심리치료 서비스의 공급량을 확대하기 위해 전통적인 전문인력이 아닌 다양한 직역을 포함하면서도, 전문가 협회들을 감독하는 상위기관을 설치함으로써 직역 간 갈등을 방지한 것과 더불어 전문성이 자율적으로 규제되도록 하고 있다. 이를 통해 양과 질을 함께 확보한 영국의 IAPT는 명실상부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공공주도 근거기반 심리치료 및 관리 프로그램으로 자리를 잡았다.

개인의 행복이 점차 중요해지는 우리 사회, 그리고 이에 발맞춰 일상적 마음돌봄의 정신건강 정책을 시행하려는 정부. 서비스의 양적 확대에도 불구하고 질적 하락은 방지함으로써 정신건강 정책의 전환을 효과적으로 이뤄낸 영국의 사례에서 배울 점이 있어 보인다.

성현모 한국상담심리학회 법제화 위원회위원 (고려대학교 박사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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