⑤ 남은 이들의 기도···“더는 다치지 않게 하소서”[영웅들은 왜 돌아오지 못했나]

김현수 기자 2024. 5. 27.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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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석란정’ 화재 순직…두 유가족 이야기

“제가 부름을 받을 때에는/ 신이시여/ 아무리 강렬한 화염 속에서도/ 한 생명을 구할 수 있는 힘을 저에게 주소서/ 너무 늦기 전에 어린아이를 감싸 안을 수 있게 하시고/ 공포에 떠는 노인을 구하게 하소서.”

강원도 강릉시 경포해변 한쪽에 들어선 ‘소방관 추모비’에는 이 구절로 시작하는 ‘소방관의 기도’가 적혀있다. 불길 속에서 시민의 생명을 구하려는 소방관들의 간절한 마음을 담았다.

2017년 9월17일 불타 사라진 ‘석란정(石蘭亭)’ 자리에 세워졌다. 1956년 건축된 40㎡의 작은 목조건물 석란정은 화재로 붕괴하면서 두 소방관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영욱 소방위(당시 59세·순직 후 소방경 특진)와 이호현 소방사(당시 29세·순직 후 소방교 특진)다.

당시 이 소방위는 정년을 1년 앞둔 노장이었고, 이 소방사는 소방관 8개월 차 새내기였다. 추모비는 두 소방관을 ‘영웅 소방관’으로 칭하며 기린다. 남겨진 가족들은 ‘사람도 없고 문화재 가치도 없는’ 건물에 난 불을 끄다 소방관이 2명이나 숨졌다는 사실을 지금도 믿지 못한다.

경향신문은 지난 10일 강원도 강릉과 원주에서 두 소방관 가족을 만났다. 경기도에서 화재 현장에 출동했다가 동료 구급대원을 잃은 소방관이 어렵게 취재진에게 심경을 토로했다.

이들의 ‘기도’는 간절했다. “제발 소방관들이 가족 품으로 안전하게 돌아오게 해주소서.”

강릉 석란정 화재 사고로 순직한 고 이호현 소방관의 부친 이광수씨가 지난 10일 화재현장에 마련된 아들의 추모비를 어루만지고 있다. 정지윤 선임기자
2014년 이후 순직 소방공무원 현황

#할머니와 장난감 소방차

“할머니는 소방차 소리가 싫지?”

강원도 원주 이연숙씨(61) 집에 있는 장난감 소방차와 경찰차에는 모조리 건전지가 빠져 있다. 어린이집에 다니는 손녀가 경찰차와 소방차를 가지고 놀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손녀가 빨간색 장난감 소방차를 가지고 처음 집에 왔을 때 아들이 말했다. “엄마 미안해요, 아이가 워낙 좋아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손녀는 할머니가 소방차를 싫어하는 줄로만 안다.

7년이 지났지만, 이씨는 아직도 긴급 출동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먹먹하고 숨이 가빠져 온다. 소방서 앞을 지날 때는 눈을 꾹 감는다.

“손녀가 ‘이거 봐’ 하면서 장난감 소방차 버튼을 누르면 사이렌 소리가 나는데 죽을 것 같은 거야. 초등학생이 되면 ‘할아버지가 소방관으로 순직하셨다’고 설명해 줘야지.”

남편 이영욱 소방위는 강릉 석란정 화재현장에서 순직했다. 경포119안전센터에서 근무하던 이 소방위는 그날 두 번이나 석란정에 출동했다. 10여 분 만에 첫 화재를 진압하고 돌아왔는데 새벽에 불씨가 살아났다.

확실한 진압을 위해 이 소방위는 함께 출동한 이호현 소방사와 건물 나무 바닥을 뜯고 물을 집어넣었다. 이들이 밖으로 나오려던 순간 건물이 무너지며 굵은 기왓장과 기둥이 덮쳤다. 매몰 18분 만에 구조돼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두 소방관은 순직했다.

순직 이후 주변에서는 ‘소방 영웅’이라고 추켜세웠지만 남편 빈자리는 누구도 대신하지 못한다. 이씨는 “순직 소방관이 영웅으로 예우 되고 기억되는 기간은 장례 3일 정도였다”고 했다.

이 소방위는 1988년 소방관 생활을 시작했다. 1995년 강릉으로 옮겨왔고 2019년부터 경포119안전센터 화재진압 팀장을 맡았다. 30년 넘게 소방관으로 활동한 그는 순직 당시 정년을 1년 앞두고 있었다.

이씨는 “(사고)1년 전에 그만두라고 했으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겠지라는 후회를 한다”면서 “소방관 가족은 매일 가슴 졸이며 퇴근을 기다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사고가 나니 감당하기 어려웠다”고 했다.

강릉 곳곳에는 부부의 추억이 깃들었다. “불이 나면 빨리 소방서로 돌아가야 한다”는 이 소방위 때문에 부부는 강릉을 벗어나 나들이를 즐긴 적이 많지 않다. 휴가를 내고 여행을 가다가도 남편은 화재 소식을 들으면 차를 돌렸다.

그때마다 남편은 “퇴직하고 여행 많이 다니자”며 이씨를 달랬다. 강릉에서 불쑥불쑥 떠오르는 남편과의 기억은 견디기 어려웠다. 결국 아들이 사는 원주로 이사했다.

이씨는 그나마 남편의 죽음 이후 소방 인력이 대폭 늘어난 것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씨는 “남편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구나, 아주 허무한 죽음은 아니었다는 생각에 조금은 치유가 된다”고 말했다.

고통이 다시 찾아올 때가 있다. 이씨는 지금도 이어지는 소방관 순직 소식을 들을 때면 며칠 동안 잠을 못 잔다. “뉴스에 화재 현장이 나오면 ‘소방관이 다치지 않아야 한다’는 걱정부터 한다”는 그는 “제발 아무 일 없이 소방관들이 돌아올 수 있도록 해달라”고 했다.

강릉 석란정 화재 사고로 순직한 고 이호현 소방관의 부친 이광수씨가 지난 10일 화재현장에서 아들의 소방학교 수료식 사진을 살펴보고 있다. 정지윤 선임기자

#아버지와 ‘연금’

“아들이 사고 나기 며칠 전 그러더라고요. ‘아빠 혹시 내가 근무 중에 잘못되면 연금이 조금 나와. 그 돈 노후자금으로 쓰고 아무에게도 주지 마.”

이광수씨(61)는 “아들이 보내는 ‘용돈’을 받는다”고 했다. 많은 금액은 아니지만 매월 통장에 찍히는 ‘유족 연금’을 보면 진짜 아들이 용돈을 주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고 한다. 연금을 받을 때마다 “맛있는 거 먹고 이제 편하게 살라”며 입버릇처럼 말하던 아들이 떠오른다. “그래,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건강하게 살아야겠다.” 한때 술 없이 잠들 수 없었던 시간을 보낸 이씨는 “인제야 꿈에 나타난 아들을 편하게 본다”고 했다.

이씨 아들 이호현 소방사도 석란정 화재 현장에서 순직했다. 해병대를 전역한 뒤 대학 소방 관련 학과에 편입했던 이 소방사는 경력 특채로 소방관이 됐다. 2017년 1월 임용됐는데 첫 발령지가 경포119안전센터였다.

이 소방사는 아버지에게 “나중에 소방서장이 될 때까지 지켜봐 달라”는 말을 자주 했을 정도로 소방관 직업에 남다른 애착을 보였다고 한다. ‘응급구조사’ 자격증 취득도 준비하던 성실한 청년 소방관이었다.

아내와 이혼한 이씨에게 아들은 ‘친구’ 같은 존재였다. 그날 새벽 자고 있던 이씨집 현관문을 누군가 급하게 두드렸다. “아드님이 좀 다치신 것 같습니다.” 이씨는 “근무 잘하고 아침에 온다고 했던 아들이 뭘 다치긴 다치냐”며 병원으로 향하는 순간까지도 믿지 못했다.

아들을 잃은 뒤 삶도 무너졌다. 2∼3년은 술 없이 살 수 없었다. “아빠 문 열어줘”라는 말을 듣고 뛰쳐나가면 밖에 아무도 없었다. 아들은 이듬해 결혼을 약속한 동갑내기 여자친구도 있었다.결혼을 목전에 두고 세상을 떠난 아들이 가슴에 사무쳤다.

실의에 빠진 이씨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도 아들이었다. 이씨는 “아들이 혼자 남은 아버지가 걱정됐는지 자꾸 꿈에 나타나서는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더라”면서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정신을 차렸다”고 했다.

이씨는 이제 1주일에 서너 차례 경포해변 아들의 추모비를 찾는다. 아침 일찍 찾아가 비석을 닦고 쓰레기를 줍는다. 주변에 꽃 잔디도 심어 가꾼다.

아들처럼 순직한 소방관들의 가족들을 위로하며 힘이 되어주고 있다. 이씨는 2023년 3월 전북 김제 단독주택 화재와 그해 12월 제주 감귤창고 화재 현장에서 순직한 소방관들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올해도 지난 1월 경북 문경 공장 화재로 순직한 두 소방관의 장례식장에 다녀왔다. 이씨는 “앞으로 30년은 국민의 생명을 책임질 수 있는 이들이 너무 허망하게 떠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장례식장을 찾을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이길, 이번이 마지막이길 빈다”며 “최근 젊은 소방관들이 연이어 순직하면서 아들 생각이 더 많이 난다”고 했다.

아들은 국립 대전현충원 소방관묘역에 묻혔다. 이씨는 묘비가 늘어나는 것을 볼 때마다 괴롭다고 했다. “더는 현충원 아들 옆자리에 다른 소방관들이 들어오게 해서는 안 됩니다. 국가가 대책 마련을 서둘러야 합니다.”

강릉 석란정 화재 사고로 순직한 고 이호현 소방관의 부친 이광수씨가 지난 10일 화재현장에서 아들의 소방학교 수료식 사진을 살펴보고 있다. 정지윤 선임기자

김현수 기자 kh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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