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바닥 탐구한 비극적 천재…나림은 스승으로 여겼다

조광수 나림연구회 회장·전 한국아나키즘학회 회장 2024. 5. 27. 03:03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병주 문학과 인문 클래식 <6> 상처와 고통에 대한 공감: 도스토옙스키 ①

- 쉬운 문제도 어렵게 만든 거장
- 도스토옙스키의 끊임없는 탐구
- 인간 내면의 고뇌 치열히 다뤄

- 중학교때 ‘죄와벌’ 읽었던 나림
- 대학때 英·佛·日판 재탐독하며
- 인생의 실존적 의미 깨우치기도

- 나림 쓴 ‘허망과 진실’ 본 이문열
- 도스토옙스키 평전 쓸 생각 포기

도스토옙스키는 잔인한 천재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은 시종 난해하다. 도스토옙스키의 난해성은 인생의 난해성과 통한다. 깊고 어두운 그의 초상은 “인생에 과연 쉬운 문제가 있을까”라고 말하는 듯한 느낌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인생에 대한 답을 주는 대신 쉬운 문제도 어렵게 만드는 존재다. 그는 바닥에서 인간의 바닥을 탐구한 비극적 천재다.

도스토옙스키와 관련한 시각 자료를 검색하다 러시아 문화를 해외에 소개하는 포털 사이트(Revizor.ru)를 만났다. 거기 매우 인상 깊은 도스토옙스키 초상화가 있었는데 화가 글라주노프가 그렸다고 설명돼 있다.


나림 이병주는 평생 도스토옙스키를 교사 겸 우인(友人)으로 여겼다. 괴롭고 어려울 때 안식처나 의논 상대가 되어 준 소중한 존재다. 나림이 울적할 때는 ‘작가의 일기’ 속 도스토옙스키의 그 억지마저 육친의 아픔처럼 수긍했다. 그에게서 나림이 배운 가장 중요한 것은 인생에서 결코 쉬운 문제란 없다는 사실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천재성은 약한 자로서 인간을 관찰하고 탐구하는 데서 빛났다. 바닥에 닿은 약한 자, 해답이 없다. 예술가의 의무는 문제를 올바로 제기하는 것이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꽃의 이름을 물었더니’의 박태열은 학병을 피해 고향 원산에서 오지 중 오지 삼수로 피신하며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형제들’을 갖고 간다. 동경제국대 철학과 졸업반 박태열이 백두산 근처 산채에 짊어지고 간 책은 네 종류였다. 칸트와 톨스토이 그리고 니체와 도스토옙스키다. 네 작가 모두 나림이 깊이 읽고 몰두했던 천재들이다.

▮ 인간 내면 고뇌를 치열하게 쓰다

나림 이병주가 쓴 책 ‘루쉰·도스토옙스키와의 대화-자아와 세계의 만남’.


칸트의 세 비판서는 결론보다 치열한 사고 과정을 중시하는 철학 작업에 유용하다. 정신 체조의 텍스트로 그저 그만이다. 나림은 “모든 철학은 세 비판서 숙독의 바탕 위에 그래프로 좌표화 할 수 있다”고 했다. 나림의 유학 시절 대학생 사회에선 ‘데칸쇼’가 기본이었다. 데카르트 칸트 쇼펜하우어 읽기가 유행했다. 1950년대 한국 대학에서도 그런 흐름이 있었다. 문자 그대로 ‘쌍팔년도(단기 4288년을 서기로 환산하면 1955년이다)’ 이야기지만 요즈음 독서 풍조와 비교하면 과연 격세지감이다. 최근 쇼펜하우어 열풍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고전 읽기라는 면에서 반가운 현상이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는 인간을 역사의 규모로 관찰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인생의 정념으로 사물을 보고 역사의 규모로 사물을 평가하는 습성을 키우는 데 보탬이 된다. 톨스토이는 시간과 공간을 관류(貫流)하는 대하(大河)다. 역사를 풍경화처럼 쉬이 그리지만 심오하다. 건강 장수 부귀를 모두 누렸고 영광의 절정에서 세상을 떠났다. 니체의 ‘자라투스트라’는 세계를 방관하는 관찰자로서 수련 기록이므로 정신의 앙양에 도움이 된다. 한동안 산속에서 지내야 하는 박태열은 자라투스트라가 나이 서른에 고향을 떠나 산속에서 10년 수도하며 깨우치는 대목에서 격한 공감을 느낀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형제들’은 인간 내부에 전개되는 세계를 관조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인간 내면의 고뇌를 도스토옙스키만큼 치열하게 다룬 작가는 일찍이 없었다. 나림은 도스토옙스키를 톨스토이와 이렇게 비교한다. “톨스토이가 종래의 문학을 집대성해서 그 절정을 이룬 거장이라면, 도스토옙스키는 그 절정에서부터 문학의 새로운 기원을 창시한 거장이다.” 톨스토이 스스로도 자신 작품을 포함하여 모든 작품을 다 불태워도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만은 온전히 보존해야 한다고 유언할 정도로 도스토옙스키를 높이 평가했다.

나폴레옹 등장을 두고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비교한 나림의 통찰은 압권이다. 톨스토이는 역사적 인물 나폴레옹을 같은 규모의 무대를 설정해 그의 기고만장과 패퇴를 시간과 공간 순으로 정렬한 데 반해, 도스토옙스키는 인간 유형으로서 나폴레옹을 라스콜리니코프라는 고학생의 심상에 집어넣어 개인 나폴레옹의 의미를 나폴레옹적 인간의 의미로 심화 확대했다.

▮젊은 나림, 다시 읽다

도스토옙스키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모스크바의 마린스키 자선 병원 건물. 이 건물 곁에 도스토옙스키의 박물관이 있다고 한다. 위키 백과


나림이 처음 읽은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이 ‘죄와 벌’이다. 중학교 때 탐정소설로 생각하고 읽었다. 살인하고 고민하다 자수해 수감되고 회개하는 형사물 정도라고 생각했다. 유학 시절 법대생들이 라스콜리니코프 사건을 토론하다 난투극을 벌이는 모습을 보고 ‘죄와 벌’을 다시 읽는다. 하숙집 모의 법정에서 검사는 사형을 구형했고 변호사는 무죄를 주장했으며 재판관은 3년 징역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검사 역 학생은 잔인한 수법으로 두 명을 살해한 범죄자는 극형에 처해야 하는데 집행유예라니 법관 소질이 없다고 판사 역을 비난했고, 판사 역은 냉혈적인 자가 법질서란 명분으로 사람을 예사로 상하게 할 것이니 법관 자질이 없다고 응수하다 급기야 주먹다짐까지 하게 된 것이다.

장을 떠난 나림은 영어·프랑스어 번역본을 사고, 이와나미 문고판 일역을 구입한다. 먼저 영역을 일역과 대조하여 읽었다. 다음 프랑스역을 영역을 참조해 읽고, 일역을 한 번 더 통독했다. 다시 읽으니 탐정소설이 아니었다. 살인사건은 줄거리 중심이되 주제는 아니며, 주제를 부각하기 위한 계기로 활용했을 뿐이다. 살인사건 경위에만 주목해 주제를 놓쳐버렸는데도 어릴 때 읽었다고 치고 지나쳐 버릴 위험이 있었다.

고전 명작은 감수성과 독해력이 성숙하기 전에 읽으면 안 된다는 시사를 얻었다. 고전 섭렵이 그저 현학 취향에 그치면 오히려 읽지 않느니만 못하게 되기도 한다.

▮죄와 벌이 뜻하는 것

죄와 벌의 의미는 죄를 지었으니 벌받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인간이란 죄짓지 않곤 살 수 없는 존재이며 그렇다고 죄에서 면책될 수도 없다는 뜻이다. 인간 내면에 복수(複數)의 인간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람 마음속엔 극단적 에고의 이상주의자 라스콜리니코프도 있고 평균적이며 상식적인 인간 라주미힌도 있다. 이타적 인간 소냐도 있고, 무위와 나태의 상징으로 술독에 빠져 자멸하는 마르멜라도프도 있다. ‘죄와 벌’을 읽는 것은 스스로 마음 읽는 것과 다름없다. 누구에게나 마음속에 독사 한 마리는 있다. 성자조차 그 독사를 죽이고 나서야 비로소 성자가 된다.

도스토옙스키는 라스콜리니코프를 한 극단으로 소냐를 또 다른 한 극단으로 하여 인간 내부 심상을 상트페테르부르크 크기만큼 확대했다. ‘죄와 벌’은 궁핍에 허덕이던 도스토옙스키의 육맥과 심맥에 조명된 상트페테르부르크 풍물지다. 나림은 “도스토옙스키도 그 마음속에서 몇 번인가 라스콜리니코프의 도끼를 쳐든 적이 있었으리라고 추측하는 것은 작가에 대한 모독이 될까”라고 잠시 망설이지만, 결코 모독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도스토옙스키는 마음속에 쳐든 도끼의 의미를 탐구한 끝에 라스콜리니코프로 하여금 센나야 광장에서 무릎을 꿇게 한 것이다. 죄짓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뜻에서 죄와, 그렇다고 죄를 모면할 수도 없다는 뜻에서 벌이란 인식은 처절한 체험이 아니고선 나오기 어렵다는 의미다. 죄와 벌, 인생의 실존적 의미다. 도스토옙스키는 인성에 통달한 천재다.

▮치열한 섭렵, 기막힌 문필

나림은 도스토옙스키가 사형대에 서게 된 이유를 알기 위해 유럽·일본 자료를 치열하게 찾았다. 재판기록까지 샅샅이 살폈다. 이른바 페트라셰프스키 사건이다.

청년 지식인이 모여 서구 급진주의 사상을 공부했다는 이유로 15명이 사형판결을 받았다. 극적으로 극형을 면한 도스토옙스키는 5년 옥살이와 5년 병역으로 시베리아에서 버틴다. 10년 만에 자유를 찾았으나 말년 몇 해를 빼곤 시종 빈궁했다. 낭비벽에 도박 빚 게다가 가족과 연인에 대한 의무감에 기인한 지나친 관대함까지, 늘 쪼들렸다. “돈은 주조된 자유(coined liberty)”임을 절감했고, “지옥이란 어떤 공간이 아니라 상태다”라고 외쳤다.

궁핍과 굴욕의 바닥에서 도스토옙스키는 아름다움을 찾았다. 어둠 속에서도 빛은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몇 번의 연애와 결혼 실패 후 만년에 헌신적인 부인 안나를 만나 가정적으로 안정하고 라이프워크를 완성할 수 있었다. 나림은 섭리가 불우한 천재에게 베푼 유일한 은총이라고 말한다. 나림의 도스토옙스키론은 단연 압권이다. 이문열은 “나림의 글 ‘허망과 진실’을 읽고 도스토옙스키 평전 쓸 생각을 포기했다”고 썼다. 나림의 박학다식과 어재(語才) 그리고 치밀한 자료 섭렵과 기막힌 문필에 ‘야코 죽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Copyright © 국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