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동북아시아를 생각한다 [조선칼럼 김영수]

김영수 영남대 교수·정치학 2024. 5. 27. 00:1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14년 전 제주서 한일중 정상회의… 그때 구호도 “We are One”
하나의 동북아, 오랜 꿈이지만 현실은 끔찍했던 근현대사
6·25 이후 평화 유지했지만 성찰·반성 아닌 미국 힘 덕분
5년 만의 한중일 정상회의… 이제는 매년 대화·협력해야

2010년 5월 말, 제주도의 날씨는 싱그럽고 아름다웠다. 그곳에서 제3차 한일중 3국 정상회의가 열렸다. 회의 둘째 날 ‘3국 비즈니스 서미트’ 연설에서,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일본 총리는 벽에 걸린 ‘We are one’이라는 현수막을 손으로 가리키며 세 나라의 우애(fraternity)와 동아시아 공동체의 이상을 호소했다. 그의 조부인 전 총리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郎)는 하나의 유럽을 제창한 쿠덴호페 칼레르기(R. N. Coudenhove-Kalergi)의 정신적 후예였다.

‘하나의 동북아시아’, 삼국의 오랜 꿈이다. 세 나라는 모두 벼농사를 짓고, 젓가락을 쓴다. 한자와 유교, 불교라는 문화유산을 공유한다. 외모만 보아서는 국적을 가릴 수 없다. 이른바 ‘동문동종(同文同種)’이다. 지정학적으로는 영원히 이사 갈 수 없는 이웃들이다. 말 그대로 운명공동체다.

하지만 세 나라 사이에 벌어진 근현대사는 끔찍했다. 1894년 청일전쟁 이래 1950년 6·25전쟁까지 동북아의 대지는 세 나라 국민의 피로 적셔졌다. 일본은 1904년 러일전쟁에 이어 조선을 식민지화하고,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중국은 6·25전쟁에 135만의 병력을 보냈다. 삼국 간에는 그 상처와 원한의 강이 여전히 도도히 흐르고 있다.

하지만 하나의 아시아에 대한 열망도 작지 않았다. 일본의 대표적 근대 사상가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김옥균 등 한국 개화파를 지원했다. 동양 3국이 합심해 서구 제국주의에 대항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유민권주의자 미야자키 도텐(宮崎滔天)은 쑨원(孫文)의 중국 혁명에 헌신했다. 쑨원도 대아시아주의를 외쳤다. 1924년 일본 고베(神戸)고등여자학교에서 그는 중‧일이 함께 서구의 패도를 물리치고, 아시아의 왕도를 회복하자고 호소했다. 김옥균은 후쿠자와에게 동조해 동양 3국이 단결하자는 삼화주의(三和主義)를 주창했다.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했을 때, 윤치호는 황인종의 승리를 기뻐했다.

하지만 일본과 중국의 아시아주의는 쉽게 자국 제일주의나 대국주의로 변질되었다.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후쿠자와는 유명한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을 주장했다. 중국과 조선에 더 이상 희망이 없으니, 일본은 서구의 일원이 되고 두 나라를 희생양으로 삼자는 것이었다. 대동아공영권 이념은 그냥 가짜였다. 영‧미에 대항해 아시아를 해방한다고 했지만, 실은 “동아의 여러 민족의 단물을 빠는 것”이었다. 쑨원도 조공을 받던 옛 중국을 자랑스러워했고, 한국은 잃어버린 영토로 생각했다. 안중근은 한때 일본의 아시아주의를 믿었다. 그 믿음이 무너지자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동양 평화를 위하여 결행”했다고 천명했다. 사형을 앞두고는 “앞으로 한일 두 나라가 화합하여 동양 평화에 이바지하기 바란다”는 유언을 남겼다.

6·25전쟁 뒤 지난 70여 년간 동북아시아는 평화를 지켰다. 하지만 유럽처럼 역사를 철저히 성찰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미국의 강력한 힘 덕분이었다. 일본에서는 대동아공영권의 이념이 부활했다. 자유주의 사관에 따르면, 일본이 일으킨 전쟁을 “침략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자학일 뿐이다.”(石原愼太郞, 전 도쿄도지사) 1985년 이래 다수의 일본 총리들은 태평양전쟁 전범의 위패가 있는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하고 있다. 중국은 이런 일본을 비난한다. 하지만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 역사를 중국사에 편입했다.

지금 중국의 꿈은 세계 패권이다. 그 구상이 인류 운명 공동체(2012), 아시아 운명 공동체(2015), 중화민족 공동체(2017)의 비전에 담겼다. 문제는 그 질서가 화이 체제적 중화사상 위에 서있다는 것이다. 지금의 국제 질서는 모든 나라가 평등한 베스트팔렌 체제(Westphalian system)다. 하지만 중화 체제는 위계적이다. 사드 위기를 겪으며, 한국은 그 진상을 똑똑히 목격했다. 중국은 생각이 다르면 ‘공격성과 강압(coercion)’으로 굴복시키려 한다.

오늘날 ‘하나의 동북아시아’를 가로막는 첫 번째 장애는 왜곡된 역사 인식이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 긴장은 문명(civilization)과 정치체제를 둘러싼 대립이다. 현대 중국을 지탱하는 두 기둥인 중화주의에는 평등이, 공산주의에는 자유가 결여되어 있다. 그냥 ‘셰셰‘하면 끝날 문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나라는 대화를 이어가고 협력해야 한다. 신냉전의 세계가 점차 2차대전 발발 직전인 1930년대를 닮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제9차 한중일 3국 정상회의가 서울에서 열리고 있다. 4년 5개월 만이다. 이 회의는 어떤 일이 있어도 내년은 물론 해마다 열려야 한다. 그런 노력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가장 값진 헌신이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