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두 아이가 눈에 밟혀 돈 많이 버는 일이 필요했다” [용주골 사람들①]

윤준호 2024. 5. 26.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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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그녀가 ‘용주골 아가씨’가 된 이유
성매매여성 대상 설문조사 결과
절반이 가족부양·빚 상환 목적 시작
“정당화 어렵지만 각자 사정 있어”

<글 나가는 순서>
1화 그녀가 ‘용주골 아가씨’가 된 이유
2화 그만두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3화 시와 싸우는 여인들

<편집자 주>
‘쉽게 돈 벌려는 사람들’. 성매매 여성을 향한 세간의 인식은 곱지 않다. 생존권을 위해 시간을 달라는 말이 집결지 폐쇄 때마다 나오는 ‘앓는 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지난해부터 경기 파주시 성매매 집결지 용주골을 둘러싸고 시와 성매매 여성들의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 시는 집결지 가림막 철거와 집결지 내부 폐쇄회로(CC)TV 설치 등을 통해 폐쇄를 위한 절차를 밟고 있다. 성매매 여성들은 자립을 준비해 나갈 수 있도록 유예기간을 달라며 대치했다. 이번에도 성매매는 명백한 위법이니 유예가 아닌 즉각 폐쇄가 답이라는 목소리가 크다.
 
세계일보는 “나갈 만한 아가씨는 다 나갔다”는 용주골에서, 남아 있는 자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불법은 당장 폐쇄’라는 간편한 당위로 해결할 수 없는 취약계층 여성이 당면한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용주골에 남아 있는 성매매 여성 114명 가운데 63명을 설문조사하고 6명에 대해서는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다. 용주골 이야기를 3화에 걸쳐 보도한다.
 
지난 9일 경기 파주시 용주골 농성장 앞에 하루(42)씨가 서 있다. 파주=최상수 기자
“죽어야 하나 생각했어요”

경기 파주시 성매매 집결지 용주골에서 9년째 성매매를 하는 최보미(40대·가명)씨는 다른 일을 하지 않으려 한 게 아니었다고 말했다. 보미씨는 남편과 이혼하고 두 아이를 키웠다. 주부로 살다 간신히 호텔 프런트 일을 구했다. 남편이 사업하면서 만든 빚은 8000만원에 달했는데, 한달 200만원도 안 되는 월급으로 원리금 상환하고 공과금 내고 나면 생활비가 안 남았다. 친구와 가족에게 빌린 돈은 이미 많았고 카드로 돌려막을 수 있는 금액도 아니었다. 그는 죽음을 생각했다. 죽으면 이 모든 게 끝날 것 같았다.

그때 두 아이가 눈에 밟혔다. 보미씨는 “나는 죽으면 끝이지만 엄마 없이 클 아이들의 인생이 안쓰러웠다”고 했다. 살기 위해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직업이 필요했다. 그는 “큰 빚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건 혼자일 때 이야기”라며 “집도 월세였던 마당에 빚이랑 이자를 갚으면서 아이 둘까지 키우는 일은 일반적인 직장을 다니면서 도저히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가 용주골에 온 이유다.

보미씨는 울면서 출근한 용주골 첫날을 기억한다. ‘평범한’ 30대 여성이었던 그는 ‘평범한’ 삶을 위해 ‘평범하지 않은 일’을 택했다. 살아생전 성매매를 하게 될 거라 생각해 본 적 없었다고 했다. 무서웠지만 ‘내 몸을 파는 게 지금 삶보다 낫겠다’ 싶었다. 그는 “나만 참으면 삶을 포기하지 않고 아이들과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지난 9일 경기 파주시 용주골에 있는 성매매 여성들 농성장 모습. 파주=최상수 기자
세계일보는 성노동자해방행동 주홍빛연대 차차와 함께 지난달 19일부터 20일까지 이틀간 용주골 성매매 여성 63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조사 결과 응답자 절반가량인 29명(46%)이 가족부양과 빚 상환 등 경제적 이유로 성매매를 시작한 것으로 나타났다. 응답자 44명(69.8%)은 처음 목표한 종사 기간이 5년 이하였다고 답했다. 당장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매매를 택한 것으로 추론된다. 초기 목표한 종사 기간을 초과한 경우 가장 많이 꼽힌 이유는 가족부양 39명(61.9%)이었다. 돈이 급해 성매매를 시작한 여성들이 가족부양에 발목을 잡혀 그만두지 못하고 있는 셈이었다.

◆“취업도 해봤지만 비정규직 임금으론 감당 못 해”

보미씨는 용주골에 온 뒤 4∼5년 동안 착실히 빚을 갚았다. 얼마를 벌었든 무조건 버는 돈의 절반은 대출금 상환에 썼다. 대출금 외에 남편 주소지로 등록돼 있던 아이들 앞으로 연체된 건강보험비도 있었다. 지난해에는 아이들 휴대전화를 바꾸러 대리점에 갔는데 통신비가 미납돼 있었을 정도로 여기저기서 생각지 못하게 밀려 있는 돈들이 있었다고 했다. 보미씨는 현재 모든 부채를 갚았다고 말했다.

그가 용주골을 벗어나지 못하는 건 두 아이와 엄마 때문이다. 그는 대학교 2학년 딸과 고등학교 3학년 아들을 뒷바라지하고 있다. 열심히 빚을 갚는 동안 두 아이를 돌봐준 엄마는 이제 나이가 들었다. 보미씨는 엄마의 생활비를 달마다 챙겨준다. 그가 가족 3명을 부양하고 본인 생활비 등으로 쓰는 돈은 한달에 400만원 정도다. 빚은 다 갚았어도 여전히 그가 이전 직장에서 벌던 돈을 크게 웃도는 금액이 매달 들어가는 것이다.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용주골 성매매 여성 5명 중 4명가량(48명·76.2%)은 취업경험이 있었다. 이 중 57.7%가 비정규직으로 근무한 경험이 있었는데 대부분(71.2%)이 판매·서비스직이나 기능·작업·단순노무직에 종사했다. 이들이 퇴사한 이유로 가장 많이 꼽은 건 ‘낮은 임금’(43.1%)였다. 서비스직이나 단순노무직 비정규직으로 버는 수입으론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부족했다는 의미다. 취업경험이 없는 경우 가족 돌봄(78.6%)과 자격요건(학력) 부족(46.4%)이 이유로 꼽혔다. 응답자 85.7%가 최종학력이 고등학교 졸업에 그치기도 했다.
지난 9일 경기 파주시 용주골의 한 유리방 모습. 파주=최상수 기자
◆“고금리 학자금대출로 마이너스 생활” “실비보험 없는 아버지 병간호”

10년째 용주골에서 성매매를 하는 하루(42)씨 사정도 마찬가지다. 그가 용주골에 처음 발을 들인 건 대학교 학자금대출 때문이었다. 20여년 전 지금처럼 국가장학기금의 학자금대출과 장학금 제도가 없었을 적, 하루씨가 선택할 수 있는 건 고금리 캐피탈 대출이었다. 아버지의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부모님은 일찌감치 신용불량자가 됐다. 대신 대출을 받아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니 달에 상환해야 할 원리금이 70만원이었다. 관광학과를 나와 호텔리어가 되고 싶었던 그는 호텔 부대시설로 있는 커피숍에서 계약직으로 일했다. “여기서 일하다 보면 언젠가 호텔리어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지만, 지방 전문대를 졸업한 자신을 위한 자리는 없다는 걸 금세 깨달았다고 했다. 월세와 학자금대출 원리금을 내고 나면 한달간 허덕이며 살았다. 하루씨는 살면 살수록 “마이너스 생활”이었다고 말했다.

5년간 성매매로 학자금대출을 갚고 월세 보증금까지 모은 하루씨는 용주골을 떠났다. 처음 세운 목표를 다 이뤘기 때문이다.

그가 용주골에 돌아온 건 3년 만이었다. 이번엔 간암 판정을 받은 아버지 뒷바라지 때문이었다. 실비보험조차 없었던 아버지 치료에는 생돈이 들어갔다. 간병비가 비싸 누군가 직장을 그만두고 돌봄에 종일 매달려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돈은 돈대로 들어갔다. 하루씨는 “비급여가 왜 이렇게 많은지 당시 병실도 부족해 응급상황에 입원하려면 4∼5인실 자리가 나올 때까지 하루 20만∼30만원 드는 1인실에 있어야 했다”고 말했다.

2년 동안 아버지 항암 치료로 들어간 돈은 2억원이 넘었다. 고스란히 하루씨의 짐이었다. 그는 아버지 치료비를 벌러 용주골에 다시 오게 됐지만,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아버지가 아프지 않았다면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했을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하루씨의 뒷바라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이젠 혼자 남은 어머니 월세와 생활비, 보험료 등으로 150만∼180만원이 들어간다.
지난 9일 경기 파주시 용주골 한 유리방 안에 하루(42)씨가 있다. 파주=최상수 기자
◆대학 시절 갑작스럽게 찾아온 엄마의 병…“큰돈 당장 구할 데 없었어”

김지윤(40·가명)씨는 23살 용주골에 왔다. 마찬가지로 가족 뒷바라지에 필요한 돈 때문이었다. 엄마는 어느 날 급성백혈병에 걸렸다. 도박만 하는 아빠와 뇌전증으로 아픈 오빠 가운데 엄마 병원비를 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대학을 다니며 야간에 간호조무사로 아르바이트도 해봤지만 중환자실의 무균실에서 치료받는 엄마의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 

빚을 거의 다 갚아갈 때쯤 아빠는 돌아가셨다. 도박 빚과 오빠의 치료비는 지윤씨 몫이 됐다. 오빠가 하나 남은 가족이라는 그는 달마다 치료비로 400만원이 나간다고 했다. 이 돈을 사회에서 아르바이트로 버는 게 쉽지 않다고 했다. 지윤씨는 “환경이 어렵다고 모든 게 합리화되는 건 아니니까”라면서도 “누구는 쉽게 돈 번다고 간단하게 말할 수 있고 이 일이 나쁜 것도 맞지만, 살아온 환경이 각자 다르고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다는 걸 말하고 싶다”고 했다.

이들은 쫓겨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당장 그들이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을 돌보지 못하게 될까 봐 그렇다. 지윤씨는 “나앉으면 어떡할지 불안하고 돈이 걱정”이라고 말했다. 보미씨는 “내가 처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성매매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면서 “성매매를 하는 지금 생활에 만족하지 않지만 아이들과 엄마와 함께 지낼 수 있는 지금 삶은 행복하다”고 말했다. 하루씨는 “쫓겨난다면 여기서 산 내 인생이 허무할 것 같다”며 “그래도 나 고생했다, 말하지 못하고 성매매를 한 범죄자일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들은 각자의 사연을 짊어지고 오늘도 유리방으로 출근한다.

파주=윤준호·박유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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