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림, 고단한 삶이 ‘시’가 됐다…그래서 국민시인”

한겨레 2024. 5. 26.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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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이의 발자취] 신경림 시인을 추모하며

24일 오후 고인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을 시민들이 찾아 추모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1970년 늦여름 어느 날, 청진동의 ‘창작과비평’(창비) 사무실 건너편 다방 앞에서 누군가와 막 헤어지고 돌아서던 시인 신동문 선생이 그 다방으로 걸어오는 나를 발견하고는, 마침 잘 만났다는 듯이 내게 원고 하나를 건네주었다. 당시 신동문은 창비 발행인이고 나는 편집장인 셈이었는데, 그는 원고를 내밀며 작자에 대해 약간의 설명을 곁들였던 것 같다. 사실을 말하면 나는 그때까지 신경림이란 이름의 시인이 있는 줄도 몰랐다.

한국시의 새로운 개막 선언

다방에 앉아 다섯 편의 시를 단숨에 읽으며 나는 말할 수 없는 충격과 흥분을 느꼈다. 그것은 서정주나 김현승, 김수영이나 김춘수 등 그때까지 내가 익숙하게 알고 있던 시들과 너무나 다르면서도 문단의 지배적 관행에 가려져 있던 어떤 중요한 핵심을 여과 없이 드러낸 시라고 생각되었다. 이런 글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것은 잡지 편집자에게는 드문 행운이었다. ‘눈길’ 등 다섯 편이 실린 그해 가을호 창비가 시중에 나오자 주위의 벗들은 무릎을 치며 환호했고 독자들로부터는 신경림이 누구냐는 문의가 적지 않았다. 그것은 이제 새롭게 전개될 한국시의 개막선언이었다.

얼마 후 신경림 시인을 만났고, 만나자마자 나는 오래전부터 흠모하던 사람을 드디어 만난 것처럼 순식간에 그와 친해졌다. 그와는 문학에 대해 얘기하든 시국 문제에 대해 얘기하든 금방 공감이 되었고 말로 나타내기 이전에 감정으로 통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 무렵 창비 사무실에는 이호철·한남철·조태일·방영웅·황석영 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물론 이분들과도 차례로 인사를 트고 수시로 활기에 넘친 대화를 가졌다. 이렇게 하여 당시 문학출판사들이 많았던 청진동 골목에는 몇몇 소규모의 정서적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을 텐데, 1970년대 이후 사회의 민주화운동에 문인들이 본격 참여하게 된 배경에는 이러한 정서적 준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다들 알다시피 신경림 시인은 작은 체구에 곱고 단정한 얼굴이어서 별로 고생한 흔적이 없다. 그는 자기 생활의 고달픔을 좀체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도 나도 술을 좋아해서 수백 번 술자리를 함께했으되, 그에게서 신세 한탄을 들은 기억이 없다. 그렇다면 “아편을 사러 밤길을 걷는다 / 진눈깨비 치는 백리 산길 / 낮이면 주막 뒷방에 숨어 잠을 자다 / 지치면 아낙을 불러 육백을 친다”(‘눈길’ 앞부분) 같은 처절한 싯구는 어떻게 나올 수 있었나. 그리고 이어지는 작품 ‘파장’의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의 탁월한 해학과 낙관은 어떻게 가능했던가.

필자가 고인의 영결식에서 추모사를 읽고 있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1956년 ‘문학예술’지에 이한직 시인의 추천으로 발표된 데뷔작 ‘갈대’는 ‘눈길’이나 ‘파장’과는 결이 다르다. ‘갈대’는 중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널리 알려지고 평론가들의 뒤늦은 주목으로 더욱 유명해졌지만, ‘갈대’와 ‘눈길’ 사이에는 분명한 단층이 있다. 요컨대 1950년대 중엽의 예민한 감성과 섬세한 내면 투시가 1970년대의 강렬한 현실인식으로 변화하기까지 그에게는 녹록지 않은 고통의 시간이 있었던 것이다.

등단 뒤 시 접고 10년 떠돌이 생활

그는 초기작 네댓 편을 발표한 뒤 서울살이를 접고 낙향을 한다. 그리고 10년 가까이 힘든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된다. 그 자신은 그때 “글 한줄 안 쓰고 책 한권 안 읽으며” 살았다고 어디선가 썼지만, 아마 그것은 사실이 아닐 것이다. 다만, 그는 서울 생활의 복잡함이 싫었고 기성문단의 구태의연함에도 환멸을 넘어 거의 적대감을 가졌던 것 같다. 심지어 그는 한때 문학을 버릴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고단한 낭인생활 속에서 보았던 가난한 서민들의 힘든 삶이 그를 다시 문학으로 이끌었다. 사실 그는 공사판 같은 데서 막노동이라도 하고 싶었다고 한다. 하지만 감당할 체력이 안 되었다. 그래서 한동안 그는 시골을 돌며 약초나 약재를 거두어 서울 한약상에 파는 사람들의 길안내 일을 했다. 충북 북부지역과 강원도 남서부 일대의 후미진 산골길을 하루에도 백여 리씩 걸었다. 저녁에 여인숙에 들어 양말을 벗어보면 발이 벌겋게 부어 있고 물집이 잡혀 있었다.

이웃의 고단한 삶 보고 다시 문학으로

이런 고된 생활을 통해 도리어 그는 자신을 정리할 수 있는 계기를 얻었다고 한다. 그때 시골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한결같이 가난했고 세상에 대해 원한을 가지고 있었으며 복수심과 체념으로 조금씩 비뚤어져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전혀 그들 탓이 아니었다.”(수필 ‘눈길’, 1977) 이 깨달음은 그에게 정신적 안정을 주었고 다시 시를 써야겠다는 각성을 일으켰다. 다만, 이제 그는 좀더 확실한 의식을 가지고 문학에 임하겠다고 생각한다. “한때 시를 그만두려다 쓰기 시작하면서, 고생하면서 어렵게 사는 내 이웃들의 생각과 뜻을 내 시는 외면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바도 있지만...”(시집 ‘달 넘세’ 후기, 1985) 친구인 시인 김관식의 권유로 다시 상경하여 홍은동 등성이에 있는 김관식의 무허가 주택에서 아내와의 살림을 시작했고, 얼마 뒤에는 안양 비산동에 집을 마련하여 시골의 가족까지 모두 불러올렸다.

돌아보면 그의 시가 묘사하는 민중의 삶은 그가 유랑과 기행 중에 보았던 이웃 동포들의 것이자 그 자신의 생활이었다. 중년을 지나 노년에 가까워지며 형편이 좀 나아지기는 했으나 그는 서민적 삶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에게 삶은 그대로 시였다. 그는 누구에게나 친근하고 다정했으며 남녀와 귀천을 가리지 않았다.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시대의 한국인 누구나가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시의 거의 유일한 작자가 신경림 시인이란 점이다. 앞으로 이와 같은 의미의 국민시인이 다시 출현하기는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문학에서도 삶에서도 그의 별세로 생긴 공허는 너무도 크다. 그래도 어쩌랴, 시대적 임무를 마치고 떠나는 시인께 눈물 어린 경의의 별사(別辭)를 바치는 수밖에!

염무웅/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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