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을 해설해 드립니다, 자막 아니고요 [6411의 목소리]

한겨레 2024. 5. 26. 18:5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영화 ‘올빼미’의 화면해설 작업을 하고 있다. 필자 제공

홍미정 | 화면해설작가

얼마 전, 집안 경조사 때나 가끔 보는 이종사촌 동생을 만났다. 누나는 무슨 일을 하냐는 질문에 제대로 설명할까 대충 둘러댈까 잠시 망설였다.

“난 화면해설작가야. 텔레비전(TV) 드라마 볼 때 ‘에이(A)가 커피를 마신다’ 이런 식으로 등장인물의 행동을 설명해 주는 거 들어 본 적 있어? 시각장애인은 대사만 들을 수 있고 동작은 볼 수가 없잖아. 화면에 나오는 장소나 등장인물의 동작 같은 걸 설명해 주는 게 화면해설이야.”

“아, 맞아. 어쩌다 보면 그런 거 나오더라. 그거 어떻게 끄는 거야? 뭘 계속 떠들더라고.”

동생의 말이 반은 농담이었지만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들이 많기에 서운하진 않았다. 그보다는 화면해설에 대해 열심히 설명했는데 고개를 끄덕거리며 듣고 있던 사람이 ‘화면 밑에 나오는 자막 같은 걸 쓰는 거야?’ 할 때 허탈하다. 시각장애인이 어떻게 자막을 읽는단 말인가.

올해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화면해설이 국내에 도입된 지 25주년이 되는 해다. 짧지 않은 역사라고 생각되지만 시각장애인 가족이나 지인이 없는 이들에게 화면해설은 미지의 영역이다. ‘화면해설’이란 시각장애인을 위해 영상 속 장면의 전환이나 등장인물의 표정, 몸짓 그리고 대사 없이 처리되는 상황을 말로 설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시각장애인의 눈이 되어 화면을 해설하는 원고를 쓰는 게 직업인 사람이 ‘화면해설작가’다. 우리의 글은 성우들의 목소리에 실려 시각장애인들에게 전달된다.

같이 사는 가족도, 오래된 친구도 화면해설이 뭔지 모르는 경우가 허다해서 2년 전에는 이 일을 시작한 지 만 10년이 된 작가 다섯명이 10주년을 기념하며 화면해설작가의 세계를 알리는 ‘눈에 선하게’(사이드웨이, 2022)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눈에 보이는 대로 쓰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려워?’ 하고 묻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지금 당신 앞에 보이는 풍경을 말로 설명해 보라고 하면 곧바로 이해할 것이다. 저 그림 같은 풍경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눈으로 보면 단박에 이해할 수 있지만 말로 풀어서 설명하기에 난해한 상황은 부지기수다.

멜로드라마에서 남녀 주인공이 키스를 할 듯 말 듯 쳐다보기만 하며 3분 이상 시간을 끈다면 그 3분 동안의 상황을 계속 설명해야 한다. 자연 다큐멘터리에서 짙푸른 바다가 끝없이 펼쳐지는 장면이 거듭 반복된다 해도 매번 ‘짙푸른 바다가 펼쳐진다’라고 해설할 수는 없으니 여러 형용사를 동원해서 가능한 한 상세하게 해설 원고를 써야 한다.

별다른 상황의 변화 없이 긴 영상이 이어지는 화면을 해설하기도 어렵지만 반대로 짧은 시간에 많은 일이 벌어지는 상황도 난감하다. 화면해설은 원영상의 내레이션이나 등장인물의 대사를 침범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예능 프로그램은 화면해설 하기 어려운 장르 중 하나다. 리얼 버라이어티 형식이 많다 보니 대본이 따로 없어서 등장인물들의 말을 화면해설작가가 따로 기록해야 한다. 최근엔 음성을 텍스트로 변환해 주는 프로그램 덕분에 시간을 덜게 됐지만 몇년 전까지만 해도 일일이 받아쓰기를 해야 했다. 출연자들이 특정 동작을 하면서 계속 말을 하고, 화면엔 자막이 뜨는데 갑자기 폭소가 터진다면 동작과 자막을 해설하는 동시에 왜 웃음이 터졌는지도 해설해야 한다. 그것도 예능 프로그램의 빠른 흐름을 끊지 않으면서 말이다. 비시각장애인 시청자는 화면을 보며 바로 웃었는데 시각장애인은 긴 해설을 듣고 20~30초 후에나 웃음을 터트렸다면 제대로 된 화면해설이라고 하기 어렵다. 그 상황에 딱 맞는 해설을 쓰기 위해 같은 화면을 몇번씩 돌려보다 보면 단 5분짜리 영상의 화면해설원고를 쓰는 데 두세 시간을 훌쩍 넘기기도 한다.

일에 애정이 있다 보니 더 잘 쓰고 싶어서 스트레스를 받고, 그렇게 애쓰다가 건강이 상하기도 한다. 실제로 10년 이상 된 작가들은 너무 오랜 시간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보니 대부분 목, 어깨, 허리 등에 한가지 이상씩 질환이 있다.

“화면해설이 없는 방송도 본 적이 있는데 화면해설을 듣고 나서 이렇게 재미있는 프로그램인지 새삼 알았습니다. 다음 회차를 기대하게 하는 해설이네요.”

이런 시각장애인의 격려에 힘을 얻어 지금 이 장면에서 제일 중요한 정보가 어떤 것일지, 그것을 해설하는 데 가장 적절한 표현은 무엇일지 찾고, 쓰고, 고치고, 또 쓰는 지난한 작업으로 다시금 들어선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