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부로 애틋하게, 지역의 여성 청소년에게 [서울 말고]

한겨레 2024. 5. 26.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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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영화 ‘땐뽀걸즈’. 한국방송 제공

김희주 | 양양군도시재생지원센터 사무국장

종종 애정은 애틋함으로 이어진다. 함부로 애틋한 마음을 품는 게 오지랖일지라도 마음이 향하는 대상이 있다. 며칠 전 속초여자고등학교에 다녀왔다. 속초교육도서관이 주관한 작가와의 대화에 초대되었다. 2022년에 책 ‘서울이 아니라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낸 후 몇 차례 독자와 만날 기회가 있었다. 내 고민에 귀 기울여주는 이들과의 대화는 늘 반갑다. 이번 강연이 특히 의미 있었던 건 모인 이들이 여고생이었기 때문이다. 유난히 마음 쓰이는 대상 중 하나가 지방의 청소년, 특히 여자아이들이다. 지방에서 나고 자라며 거쳐 온 삶이기 때문이고, 그때의 나와는 다른 내일을 살아갈 이들에게 일종의 책임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강연을 준비하면서 또 다른 여자아이들을 떠올렸다. 지방의 삶을 더욱 진지하게 고민한 계기였던 다큐멘터리 영화 ‘땐뽀걸즈’의 거제여자상업고등학교 땐뽀반(댄스스포츠 동아리) 학생들. 충동적으로 양양에 집을 사고 서울을 떠날 준비를 하던 2017년에 ‘땐뽀걸즈’를 보았다. 거제는 2010년대 중반 조선업 침체로 지역 전체가 위기를 맞았다. 산업도시인 탓에 조선업 불황은 상업고등학교 졸업 후 취업이 불안해진 학생과 구조조정으로 실직하거나 식당 손님이 줄어든 부모의 삶에 직접적인 타격을 줄 수밖에 없었다. 미래는 불투명하지만, 한편으로 학교 다목적실에서 경쾌하게 땐뽀 스텝을 밟는 아이들의 얼굴은 밝았다. 영화의 울림이 커서 계속 생각하다, 영화의 제작기를 담은 책 ‘쓸데없이 찬란한 – 땐뽀걸즈와 함께한 2년의 기록’을 기획해 발행했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서, 졸업 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해서, 사람들이 그들에게 따뜻한 응원의 마음을 보내길 바라서.

지난달 다녀온 여행도 ‘땐뽀걸즈’의 기억을 소환했다. 김해 본가에 간 김에 멀어서 좀처럼 마음먹기 어려운 남쪽 지방을 여행했다. 남해, 여수, 진도, 군산을 향하는 길에 사천, 광양, 고성, 목포 등을 지나쳤다. 지방 도시의 비슷한 풍경이 이어지는 가운데 때때로 예상하지 못한 광경을 만났다. 광양 제철소와 여수 산단이었다.

학생 시절 외운 지식으로 광양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제철소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공장들은 예상보다 훨씬 놀라운 규모였다. 밤바다와 포장마차로 떠올리던 여수의 첫인상도 예상하지 못한 어마어마한 규모의 석유화학 산단이었다. ‘여기가 여수라고?’ 싶은 풍경이었다. 알고 보니 여수 밤바다에서 보이는 반짝이는 불빛은 산단의 그것이었다. 낭만과 힐링의 관광지가 아닌 산업도시로서 여수를 맞닥뜨리면서 자연스레 산업도시의 흥망성쇠와 그 속에서 춤추던 거제여상 학생들을 떠올렸다.

전통의 관광지인 속초도, 국가산업단지에 급부상한 관광 지역까지 있는 여수도 양양이나 여타 다른 지방에 비하면 사정이 나은 편이다. 하지만 바닷가 소도시는 관광객 대상 서비스업 외에 청년 일자리가 열악하고, 지방의 튼튼한 버팀목이던 남동임해공업지역이 점차 수도권의 생산 하청기지가 되면서 더 이상 정규직 생산직도 안정적 일자리와 장밋빛 미래를 보장하지 않는다. 지방의 청년이 그 지역에 살면서 지역을 키우는 구조는 점차 성공이 요원해지는데, 곧 어른이 되고 일자리를 찾는 청소년의 앞날은 어떨까.

이런 현실에서 속초여고 학생들에게 지역에서 나고 자라 서울에서 오랫동안 살았지만 젊은 나이에 강원도 시골로 이주한 나의 이야기는 복잡한 맥락 속에서 사려 깊게 전해져야 했다. 내 경험과 고민이 하나의 사례로서 미처 생각하지 못한 가능성을 고려하는 실마리가 되길 바랐지만, 얼마나 전해졌을까. 강연을 마치고 나오니 운동장에 춤 연습을 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어수선한 마음에 뙤약볕 아래 진지한 얼굴로 몰두한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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