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을 향한 ‘아날로그’ 일본의 무리수 [권상집의 논전(論戰)]

권상집 한성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 2024. 5. 26. 15:02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日, IT 패러다임 경쟁에서 뒤처진 불안감 드러내
플랫폼 리더십 역량 여전히 부족…글로벌 기업 신뢰도 ‘흔들’

(시사저널=권상집 한성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

이른바 '네카라쿠배(네이버, 카카오, 라인, 쿠팡, 배달의민족)'는 한국 IT 산업을 대표하는 기업이다. 물론 일부 기업은 국적 논란에 휘말렸지만, IT 업체 입사를 희망하는 이들은 5개 기업이 한국 기업이라는 점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중에서도 특히 라인은 남다르다. 국내 기업이 지금껏 차지하지 못한 일본 시장에서 라인의 존재감은 독보적이다. 미국의 유수한 경영대학원(MBA)이 라인 사례를 연구할 정도다.

일본은 유독 다른 나라 기업에 배타적이다. 애플의 아이폰 등을 제외하면 일본 시장에서 사랑받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국내 대기업은 일본 시장 진출을 위해 항상 일본법인을 설립했지만, 10년도 안 되어 철수하기를 반복했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10대 그룹부터 K콘텐츠의 전도사 역할을 자처한 CJ ENM까지 일본 시장을 공략했지만 성과를 내지 못했다. 오직 라인만이 유일하게 '철옹성' 일본에 깃발을 꽂았다.

5월14일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 주최로 열린 '역사, 영토, 기업까지 강탈! 일본 정부 규탄' 기자회견 참석자들이 라인 사태와 관련해 양국 정부를 규탄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기술에만 집착한 일본, 스스로 고립

라인 경영권에 관한 음모, 라인을 빼앗으려는 일본 정부와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노림수에 관해 국내 모든 언론사가 주요 기사로 다뤘다. 특정 기업의 지분율을 거론하며 아예 회사를 빼앗으려는 찬탈 계획을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만, 음모론을 배제하고 일본이 어떤 특성을 지녔는지, 그리고 왜 라인에 집착하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본의 배타적 특성과 한계를 읽어야 한다.

몇 년 전, 국제 학술 세미나에서 일본의 명문 대학에서 기술경영을 가르치는 일본인 교수의 강연을 경청했다. 그는 일본의 기술력이 다른 나라에 비해 압도적이라며 섬세한 기술력, 일본 연구진의 장인정신에 관해 호평을 늘어놓았다. 일본인은 우수한 기술력에 기반을 둔 제품 또는 산업 패러다임을 뒤바꾸는 창의적 제품 아니면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점을 자랑스럽게 강조했다.

바로 이 점이 일본의 한계다. 자국의 기술과 제품이 항상 세계 1위라는 자신감. 그리고 다른 나라의 제품과 기술력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오만함. 일본은 스스로 '갈라파고스'(섬 안에 갇혀 다양성을 외면하고 독자적으로 진화하는 모습)의 고립된 길로 들어갔다.

2016년 국제비즈니스리뷰 학술지에 '글로벌 혁신 시스템과 관련된 일본의 네트워크 분석'이란 논문이 게재되었다. 템플대와 오하이오주립대 연구진은 세계 최고의 연구개발(R&D)과 특허를 보유한 일본이 왜 미국과 유럽에 비해 혁신 국가로 부상하지 못했는지에 대해 연구를 진행했다. 1975년부터 2010년까지 전자, 제약, 자동차, 로봇 등 첨단산업의 기술 특허가 다른 국가와 얼마나 상호 연결되었는지 등을 연구진은 분석했다.

그 결과, 흥미로운 점이 발견되었다. 일본의 기술혁신 역량과 투자 규모는 독일, 덴마크 등 유럽 개별 국가를 항상 압도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인접한 다른 국가의 혁신기업, 그리고 타 국가와의 네트워크 연결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전형적인 폐쇄 구조를 유지해 왔기에 일본은 혁신 국가로 발돋움하지 못했다는 점을 연구진은 논문의 시사점으로 내놓았다. 기술에 집착한 일본의 폐쇄적 면모가 혁신을 가로막았다.

조합형으로의 패러다임을 놓친 日

일본 정부의 라인 경영권 개입을 안보 관점에서 설명한 언론이 많았다. 네이버의 라인을 활용하는 일본 국민이 9600만 명인데, 이들의 대화 및 메시지가 고스란히 네이버를 통해 한국의 정보기관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음모론이다. 황당하지만 일본 국민에게 안보 불안을 유발하기에는 최고의 첩보 스릴러 소재다. 때마침 AI 시대, 데이터 주권 이슈까지 떠올랐다. 일본이 태클을 걸기 쉬운 환경이 조성됐다.

그렇다 해도 일본 정부가 특정 기업의 지분을 넘기라고 요구하는 것는 터무니없고 과도하다. 그 근본에는 디지털 패러다임에서 밀려난 일본과 일본 기업의 우려가 담겨있다. 후지모토 다카히로 도쿄대 교수는 모노즈쿠리 경영(최고의 기술력과 장인정신에 중점을 둔 경영) 개념을 정립했다. 그는 과거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전기차, 자율주행차가 대세지만 여전히 자동차의 80%는 내연기관 차라며, 아날로그 경쟁력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러나 IT 패러다임은 일본의 소망과 달리 아날로그에 초점을 둔 기술에서 디지털에 비중을 둔 아이디어로 전환됐다.

학문적 관점에서는 이를 통합형(Integral)에서 조합형(Modular)으로의 전환으로 부른다. 통합형은 복잡한 부품의 기능과 구조를 세밀하게 연결하는 기술력과 제품을 말한다. 반면, 조합형은 부품의 기능과 구조가 1대1로 매칭되는 단순 구조의 제품을 말한다. 쉽게 말해, 통합형은 일본이 경쟁력을 유지해온 아날로그 제품을 상징하며 조합형은 스마트폰, 전기차 등 소프트웨어 기반 제품과 디지털 플랫폼을 상징한다.

라인으로 전 국민이 콘텐츠를 보며 금융과 쇼핑을 경험하고 행정 처리를 논스톱으로 하는 상황을 지켜본 일본과 일본 기업은 자국민의 라인 사랑을 보면서 산업 패러다임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통합형에서 조합형으로 완벽히 전환되었다는 점을 100% 체감했다. 라인에 일본의 기업임을 강요하는 국적 논란을 유발한 기저에는 IT 패러다임 경쟁에서 뒤처진 일본의 불안감이 존재한다.

일본이 라인을 빼앗는다고 해서 그들이 조합형에 기반을 둔 디지털 패러다임을 선도할지는 의문이다. 일본은 집요한 탐구 정신을 통한 원천기술력은 뛰어나도 트렌드 리서치, 선제적 시장 기회 포착, 창의적 아이디어 등 플랫폼 리더십에 필요한 역량은 여전히 부족하다. 시대가 바뀌었는데도 뺏으면 된다고 생각했다면, 이는 일본의 결정적 패착이다. 앞으로는 글로벌 기업 누구도 일본과 일본 기업을 믿지 못할 테니 말이다.

Copyright © 시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