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옥 장로 "제주에서의 전도, 제주 아픔에 우선 공감해야"

김영미PD 2024. 5. 26.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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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인터뷰_사람꽃]법환교회 허정옥 장로
매년 4월 되면 4.3 관련 책, 자료 읽어
현재 102세 치매 어머니, 강인한 해녀의 지난 삶 존경해
예수만을 위한 삶을 산 아버지 신앙, 눈물 날 정도로 진실해
"축복은 이를 위해 준비된 기도가 반드시 필요"
사회복지사 자격증 취득 "사회복지사가 더해진 전도사 역할 하고파"
로드인터뷰_사람꽃
■ 방송 : CBS 라디오 <로드인터뷰_사람꽃> FM 제주시 93.3MHz, 서귀포 90.9MHz
■ 방송일시 : 2024년 5월 11일(토) 18일(토) 오후 5시 30분
■ 대담자 : 법환교회 허정옥 장로
어머니와 함께. 허정옥 장로 제공

삶이 아름다운 크리스천을 만나는 시간, 로드인터뷰 사람꽃. 오늘은 법환교회 허정옥 장로를 제주CBS목회자 기자인 서귀포성결교회 이기원 목사가 만나봅니다.

이기원> 얼마 전 KBS인간극장을 통해 치매를 앓고 있는 102세 어머니를 모시는 삶이 감동을 줬는데요. 어머니는 언제부터 아프셨습니까.

허정옥> 치매는 92세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미국에서 오신 후 제가 22년 간 어머니와 함께 살았고요. 9남매 가운데 7번째 딸인데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저와 살고 싶어 하셔서 그때부터 쭉 함께하고 있습니다. 사실 어머니는 당시 초등학생 아들 둘을 데리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저를 도와주고 싶어 하신 것 같습니다.

이기원> 어머니가 강인한 제주여성을 대표하는 해녀였죠?

허정옥> 어머니 하면 가슴이 먹먹한 게, 5살 때 제주도에 함경환 사건이라는 게 있었어요. 1928년으로 기억합니다. 제주분들이 일본에 가서 돈을 벌려고 타던 여객선인데, 중문에서는 저희 고향 대포마을의 몰레바당(지금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앞 주상절리가 있는 곳)에 정박해서 중문면 일대 주민들을 실었습니다.

저희 할아버지도 일본으로 가서 돈을 벌어 빚도 갚고 막내딸 꽃신도 사 오신다며 그 배를 타려다가 사고사를 당했습니다. 대포 포구에서 풍선(지선)에 중문면 일대 승객 30여 명을 싣고서 막 함경환에 닿을 즈음, 갑자기 돌풍이 불어서 풍선이 전복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40대 건장한 할아버지는 사투 끝에 함경환에 오를 수가 있었답니다. 그런데 옆집 아주머니가 등에 업고 있는 아기를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소리치는 통에, 다시 바다에 뛰어들었다가 밀려든 파도에 실종되고 말았습니다.

외할머니는 중문면 도순리에서 시집을 온 분이라 물질을 못했습니다. 그래서 바닷가를 누비며 몇 년 동안 할아버지의 신발이나 옷가지라도 찾을 수 있을까 하며 헤맸습니다. 그래서인지 막내딸인 저희 어머니가 어릴 때부터 물질을 배웠고, 17살에는 강원도 속초, 삼척 등에 원정 물질을 하면서 생계를 돌봤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예정된 은혜였는지 17살에 담벼락을 사이에 둔 이웃집 총각과 결혼하면서부터 마치 아버지를 만난 것처럼 외로움을 벗어나 행복이란 것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한편, 저희 할머니는 돈을 벌려고 일본에 갔던 할아버지가 귀국하는 길에 항구에서 만난 처자와 새살림을 차리면서 버려졌습니다. 그 충격으로 정신이 온전치 못했던 건지, 치매가 아주 빨리 왔던 건지, 많이 외롭고 고통스러운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 마을 월평에 사는 감리교회 소속 전도부인이 대포마을에 전도하러 왔습니다. 당시는 기독교를 믿으면 서양 귀신이 들린다 해서 아무도 전도부인을 상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희 할머니는 약간 정신이 없는 데다가 워낙 박해와 서러움, 외로움이 컸던 차라 전도부인을 반갑게 맞았고, 그가 전하는 성경말씀에 고개를 끄덕이며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그야말로 대포마을 최초의 기독교 신자가 되었던 것이죠.

2001년에 발간된 대포의 마을지인 '큰개마을'에 보면, 종교 편에 저희 할머니 김현승 씨가 최초의 기독교인으로 기록되어 있고, 그 아들인 저희 아버지 '허태행'이란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의 월평마을에서 인근 지역 감리교회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와 회의를 하는 행사가 열렸습니다. 아마도 제주도 전체 감리교 목회자분들이 모이는 행사라 규모가 꽤 컸던 것 같습니다. 돼지를 잡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래서 그 일을 할 도감이 필요했고, 할머니께서 아버지에게 도감을 부탁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당시 초신자인 할머니가 왜 도감 찾기에 나서게 됐는지, 그것도 하나님의 계획이요, 역사의 시작인 듯 합니다. 아버지는 당연히 서러운 어머니의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행사장에서 고기를 썰어서 접시에 넣는 일을 하고 있는데, 그 행사의 대표 격인 감리사님이 아버지에게 다가와서 예수를 믿으라고 권면했습니다.

감리사님 성함은 도인권으로, 이승만대통령의 가까운 친구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는 6.25 사변 중 제주도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피난을 와 있었고, 그 권위와 분위기에 눌려서 아버지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러자 감리사님은 바로 아버지에게 세례를 베푸시고, 당신의 양복 윗도리를 벗어서 아버지에게 입혀주셨습니다.

아버지는 그때 처음 '하나님 아버지'라는 호칭을 들었고, 그때까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었던 처지라, 너무도 감격이 컸던 것 같습니다. '아, 나에게도 아버지가 계시는구나' 하는 성령의 감동에 휩싸여서, 그렇게 아버지는 할머니와 함께 대포마을 최초의 그리스도인이 되셨습니다.

이기원> 당시에 예수를 믿는다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허정옥> 맞습니다. 우리 대포마을에서 예수 믿는 게 마치 큰 죄인이나 몹쓸 사람으로 취급되어, 저희 부모님이 마을에서 추방되었습니다. 다행히 두 분이 건강하고 부지런해 서귀읍으로 가서 삼매봉 근처에 있는 남의 논을 병작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종손인 데다 워낙 할아버지가 어려서부터 키워왔던 터라, 다시 아버지를 부르셔서 회유도 하고 꾸중도 하셨습니다. 또한 일가친척들이 아버지에 대해 비난하고 할아버지에게 장손의 도리에 대해 간섭하며 참견했습니다.

어느 날 할아버지가 일가친척들을 다 집에 불러 모으고, 아버지를 마당에 꿇어앉힌 후, '이 집안의 장손으로서 조상 제사를 지내고 재산을 물려받아 가문을 잘 일구어 나가겠느냐, 아니면 예수를 믿어서 당장 이 집에서 쫓겨나겠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아버지는 '예수를 버릴 수 없다'고 답했고, 바로 친척들이 달려들어 몰매를 때린 후 멍석에 말아 짓밟고 핍박을 가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와 어머니는 할아버지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래도 다행이었던 것은 교회를 하려고 아버지와 성도들이 마련해 놓은 허름한 헛간이 있어서, 그곳으로 가서 밤을 지새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외가에서 '예수를 믿으면 너도 가문과 마을에서 쫓아낸다'는 강압과 강권에 시달려 낳은 지 얼마 안 되는 핏덩어리 셋째 딸을 업고 제주시로 도망을 갔습니다.

이튿날부터 당장에 먹을 게 없는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하나님의 '여로와 이레' 은혜였을까요. 다행히 아버지가 6.25 때 모슬포에서 병원의 조수로 일하면서 배운 의료기술이 있어, 마을 사람들이 급하면 의료행위를 했습니다. 그 대가로 음식이나 찬거리를 받아서 허기를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어머니가 제주시에서 머문 곳이 피난민 천막이었는데, 때마침 그곳을 관장하며 심방하던 도인권 감리사님 눈에 붙잡혀서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후 2남 7녀까지 자손이 증가했습니다.
 

허정옥 교수의 책. 본인 제공


이기원>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라는 책도 출판하셨죠.

허정옥> 그때가 2008년도 제주 선교 100주년이 되는 해였거든요. 때마침 제가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 대표이사 사장이기도 해서, 그 책을 쓰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ICC JEJU가 위치한 자리는 저희 대포 사람들이 논과 밭을 경작하던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지경을 '너배기(넓은 들판)'라 불렀는데, 어려서 일하던 그 땅이 중문관광단지로 편입되면서, 일자리를 잃어버린 셈입니다.

그런데 제가 ICC JEJU의 대표이사, 사장으로 발령 나자, 제주도내 언론들이 야단법석이었습니다. 어떻게 40대 중반에 불과한 여성이 그토록 막대한 일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요. 당연한 말이어서 저는 제주도내 일간신문에 저의 입장을 기고문 형식으로 게재한 적도 있습니다.

밭에서 김 매고 논에서 모 심던 제가 자라서 경영학을 배우고 바로 그 지역에 설립된 탐라대학교의 경영학과 교수, 시민대학장, 대학원장 등을 했으니, 바로 그 주인정신으로 사력을 다해 피땀 흘려 일할 수 있을 것이며, 누구보다 더 헌신하고 사랑하면서 주어진 일을 감당할 수 있을 거라고요.

그리고 2008년도 제주 선교 100주년을 맞았을 때, 주변의 요청에 따라 쓰게 된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라는 책을 통해 제주도의 선교 역사와 부모님의 신앙 여정 등을 평신도 입장에서 담담히 그려보고자 했습니다.

ICC JEJU에 대한 열정과 사랑을 고백함으로써 도민 주주들의 염려도 덜어드리고 싶었습니다. 회고해 보면 하나님은 제가 그 시기에 그런 글을 쓸 수 있도록 어려서부터 미리 준비시켜 주시지 않으셨나 싶습니다.

이기원> 이제 대학 강단을 내려왔고 공직도 내려놓았는데요. 지금은 어떤 일을 하고 있습니까.

허정옥> 제가 제주평생교육장학진흥원장을 2022년 말에 은퇴하면서 평생교육사 자격증을 취득했습니다. 그러고 나니 무언가 사회를 위해서 책임 있는 일을 계속해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주장수복지연구원'이라는 사단법인을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기반해서 제주 사회의 노년층을 위한 장수와 복지 제도들에 대해 연구하고, 제주도 노인들의 행복도 조사를 하는 한편, 노인대학마다 다니면서 '장수의 비결'이나 '노년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특강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102세 어머니를 모시면서 필요하다 싶어서 요양보호사 자격을 취득하고, 사회복지사 자격도 취득했습니다.

문득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돌아보니, 어느덧 우리나라도 사회복지사회에 접어들었고, 특히 서민들이나 노년층, 취약계층에 대해 사회복지를 제대로 적용해야만 하는 사회가 되어 있더라고요. 앞으로 교회가 사회복지에 참여할 수 있는 정보나 지식이 필요할 때 더불어 일하고 싶고, 교회가 사회복지에 참여해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역할을 더욱 적극적으로 수행해 나갈 수 있는 분위기에 참여하고 싶습니다.

사실, 어르신들은 80세가 넘으면 요양원에 들어갈 생각에 쓸쓸해하십니다. 저희 어머니는 22년 전 미국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한국으로 모셔올 때 '요양원만은 보내지 말아 달라'는 게 부탁이요, 소망이었습니다. 교회마다 형편은 다르겠지만 어르신들이 믿지 않는 곳에서 불편하게 지내시기보다는 끝까지 예수님 안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시다가 행복하게 천국으로 가실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습니다.

뜻을 같이 하는 교회들이 연합해서 제도와 시설을 만들어 교회 내 어르신들을 교회의 한 울타리에서 모실 수 있으면 참 좋을 듯합니다. 그렇게 되면, 무엇보다도 제주도의 토박이 어르신들이 자식들의 교회 출석을 반기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기원> 해녀 학교도 나온 걸로 아는데요. 해녀로 활동하고 있습니까.

허정옥> 아니요. 그게 제가 이루지 못한 소원이에요. 저는 제주시의 한수풀해녀학교, 서귀포시의 법환좀녀마을을 다 수료했는데, 서귀포에서는 제1기의 반장까지 했답니다. 그리고 지금 사는 보목동 포구에서 3개월간 보목 해녀를 멘토로 두고서 해녀 실습도 마쳤습니다. 그런 과정을 완료한 다음, 해녀가 되려면 거주하는 마을의 해녀 회장님과 어촌계장님의 승인 도장을 찍고, 해녀 삼춘들이 100% 찬성을 해주셔야 수협 조합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거주하는 보목마을은 해녀분들은 많지만 바다 면적은 고향마을 대포 바다보다 좁아요. 삼춘들 보기에는 저같이 배우고 멀쩡한 사람이 해녀가 된다는 건 취미나 사치처럼 보였을 수도 있고요. 그래서 삼촌들의 100% 동의를 받지 못해, 결국 해녀의 꿈은 수평선 너머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삼춘들의 반대를 충분히 이해합니다. 결국 해녀는 이루지 못한 꿈이 되어 버렸습니다만, 이마저도 한편으론 하나님 은혜라 생각하게 됩니다. 대포마을에서 50년을 물질하신 상군해녀 어머니가 '해녀는 목숨 걸고 하는 거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극구 손사래를 치시게 된 게 하나님 뜻이란 생각이, 이제 와서 새삼 가슴 뜨겁게 다가옵니다.

사실 물질은 바당 밭을 꼭 필요로 하는 분들에게 하나님 아버지께서 선물로 주신 공짜 밭이니, 물질에 기대어 살아가는 분들에게 주어져야 하는 것이 맞기도 하고요.

색채테라피 연구회 전시회에서. 허정옥 장로 제공

 
이기원> 혼잡한 시대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떻게 살아가야 될지 조언의 말씀을 해 주시죠.

허정옥> 제대로 된 학자나 공직자가 못 되어서, 지나고 보니 하나님 아버지께 죄송하고,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운 게 많습니다. 하지만 꼭 해주고 싶은 말은 '결코 타협하지 말아라, 절대 주님의 말씀을 자기 뜻에 맞추어서 변용이나 응용하지 말라'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저희 가족은 2남 7녀에 모두가 예수쟁이였고 저희 아버지의 신앙은 정말 제가 눈물 날 정도로 진실합니다. 또 박해가 많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참 좋았을 거다' 싶은 분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그런 믿음의 초창기를 걸었던 조상과 같은 삶을 사셨는데, 저는 아버지와 다르게 제가 마주한 세상과 굉장히 타협을 많이 했어요.

특히 직장생활을 하면서 '내가 예수의 향기를 그대로 드러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후회가 참 깊습니다. 그때는 대학을 마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성공하면 '하나님 덕분에 여기까지 오르게 되었노라'고 고백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이라 여기기도 했거든요. 그래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세상적으로 살면서 교회는 성가대 정도 하는 선데이 크리스천처럼 살았던 시절이 가슴 아프도록 후회됩니다.

사실 저는 그냥 제주도에 오게 된 것이 아니고, 어느 날 어떤 상황이 제가 새벽 기도를 가지 않으면 안 되게 강권적으로 만들어지더라고요. 저희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이 새벽 기도였고, 저도 그 모습을 늘 봐 왔기 때문에 그 길을 모방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주도로 내려오기 전에, 저는 부산에서 결혼을 하고 세 살 된 아이를 데리고, 둘이서 살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밟느라 혼자 미네소타에 살았고요. 그러니 직장생활을 하기 위해 아이를 아침저녁으로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출장을 가게 되면 여러 사람 손을 거치는 삶이 너무 답답하고 외롭고 아프더군요.

사실 부산에서는 부산상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홍일점으로 은행에 수석으로 들어가서 은행장이 되는 꿈을 꾸는, 소위 잘 나가는 은행원이었는데, 삶이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새벽 기도가 너무 간절해졌습니다.

그 시절, 한 3년 동안 새벽 기도를 하면서 그야말로 하나님 아버지께 엎드려서 '오직 예수'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세 살짜리 아이를 혼자 두고 새벽 기도 나가면서 방안에 칠판을 두고 '엄마가 없어도 울면 안 돼, 엄마는 새벽 기도 가서 아빠와 성인이 너를 위해 기도 많이 하고서 얼른 달려올 거야'라고 써놓고 나갔습니다.

그런 생활 중에 갑자기 제주에 탐라대학교가 생겼고, 하나님께서 서귀포의 은사님을 통해 저를 이끌어 주시더라고요. 그때를 되돌아보면, 우리가 어떠한 뜻하지 않는 기회나 축복의 물꼬가 터지는 건, '그 부분에 대한 준비된 기도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기도 외에는 어떠한 뜻이나 길, 기적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다시 곰곰이 생각을 해보아도, 소위 성공이나 출세, 꿈과 같은 것들이 모두 하나님 손에 달려 있다 싶습니다. 청년들이 결코 세상 기준으로 성공의 길을 가지 말고 하나님 중심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볼 때는 느려 보여도 하나님 중심으로 삶을 살면서 '자기의 꿈을, 소망을 하나님께 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기원> 제주 토박이로서 복음화와 관련해서 제주 교회들이 제주 사람들에게 어떻게 다가가면 좋을지 조언 부탁드립니다.

허정옥> 제주 4.3사건도 있지만 역사적 경험치는 우리한테 알게 모르게 형성된 보호 본능과 같은 방어 기제예요. 저는 4월이 되면 4.3 관련 자료도 보고 책도 읽어요. 이번에는 '작별하지 않는다'라는 한강의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제주 사람인데도, 4.3의 상처나 믿지 않는 분들의 아픔을 잘 몰랐구나, 이들이 드리는 제사를 우상숭배라고 생각하며 배척하고 간과했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제주에서 믿음의 전도를 할 때는 그들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가슴으로 같이 아파해야 한다고 보고요. 또 한 가지는 우리에게도 믿지 않는 이들과 유사한 차원에서 기복 신앙이 있어요. 예수 믿으면 잘 된다는 것. 복을 구하는 것. 어느 정도 이 부분도 맞는 적용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는 것을 기복이라고 너무 억제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당당하게 복을 구하라고 말하고 싶을 때도 있어요.

제주 땅에서는 4.3을 교회에서도 이해하고 품고, 그리고 그걸 우상처럼 여기지 말고 같이 참여해 주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에는 현기영 선생의 '제주도우다'라는 연작 소설 3권을 읽었습니다. 여기에서는 제주 토박이들이 바라보는 기독교인에 대한 시선이, 당시 가장 큰 세력인 서북청년단과 맥락을 같이 하면서 낯설고, 이질적으로, 동떨어지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사랑이 아니라 독선처럼 보이는 겁니다. 가슴이 아플 정도로 반성이 되는 부분입니다. 우리 기독교인의 단면을 믿지 않는 동네 사람들이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점에 대해, 우리가 제대로 알고 생각해 볼 점이 있다고 봅니다. 이 점에서 우리 기독교 청년들과 학생들이 제주 역사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제주 선교 역사뿐만 아니라 아픈 역사들도 같이 배워두면 더 깊이 도민사회를 이해하고 공감하면서 기도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이기원> 앞으로 소망이나 기도 제목이 있으면 나눠주십시오.

허정옥> 저희 어머니가 이제 102세입니다. 그래서 제가 두 마음이에요.'어머니 덕분에 살았구나. 어머니가 소망하시는 대로 오래오래 사셔야 하는데' 하는 마음과, 이젠 어머니가 천국 소망을 가지시고 천국을 가셔야 되는데 어머니가 정말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잠자듯 하나님 품에 안기셨으면 좋겠다', 그렇게 편안하게 아기처럼 가셨으면 좋겠다는 소원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솔직히 일을 한 번만 더 진하게 하고 싶거든요. 지금 제가 64세지만 우리 어머니는 102살이잖아요. 어느덧 우리는 100세를 사는 시대에 접어들었어요. 그래서 마음속으로는 '교회의 사회복지 전도사 같은 역할을 해보았으면 좋겠다' 싶은 겁니다.

이런 생각에 이어서, 아주 비공식적으로 저는 일주일에 한 번씩 어려운 어르신들을 방문해서 예배를 드리고 얘기를 나누는 심방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개인적인 소소한 수준의 일이 아니라, 기회가 된다면 사회복지사로서 '혼자 사는 어르신들께 어떠한 사회복지 혜택을 접목시킬 수 있을까' 그런 제도와 방법들을 연구하고 실생활에 적용하면서 교회 어르신들을 방문하는 사회복지사 역할을 해보고 싶습니다.  '사회복지사 플러스 전도사'와 같은 사역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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