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헤란의 도살자’ 차기 최고지도자 사망…이란 정치, 격랑 속으로

이동진 프랑스통신원 2024. 5. 26.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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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으로 갈린 이란 국민, 애도하거나 환호하거나

(시사저널=이동진 프랑스통신원)

이란 현지시간으로 5월19일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 호세인 아미르압돌라히안 외무장관을 포함해 총 8명의 이란 고위공직자가 탄 헬기가 추락했다. 아제르바이잔 국경 지역에서 돌아오는 길에 이란 북서부 지역을 비행하다 사고가 났다. 당일 이란 북서부 지역 상공은 짙은 안개 속에 비가 내렸는데 타고 있던 헬기가 1979년 이전에 구매한 노후화된 미국산 기종 '벨212' 헬기였다고 이란 언론들은 보도했다. 이란 당국은 5월20일 탑승자 전원 사망을 공식화했고 전국에 5일간 국가 애도 기간을 선포했다.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이 5월19일 헬기 사고로 사망하자 이란 국민은 애도하거나, 환호하거나 두 부류로 나뉘고 있다. ⓒEPA연합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이 5월19일 헬기 사고로 사망하자 이란 국민은 애도하거나, 환호하거나 두 부류로 나뉘고 있다. ⓒEPA연합

대통령 헬기 추락사…승계 위기 맞은 이란

라이시 대통령의 죽음을 두고 이란 국민은 두 부류로 갈리는 듯하다. 한쪽은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며 추모하는 반면, 다른 한쪽은 파티를 벌이고 축하 폭죽까지 쏘아올렸다. 이란 여성인권운동가 마시흐 알리네자드는 이번 사고가 "혹여 누가 살아남았을까 걱정하는 역사상 유일한 추락 사고"라며 5월19일을 '세계 헬리콥터의 날'로 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미국 바이든 정부를 비롯해 유엔 안보리(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유럽연합(EU), 나토(NATO)의 고위급 인사들이 애도를 표명하자 알리네자드는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는 마치 라이시 대통령에게 희생당한 "희생자의 뺨을 때리는 격"이라며 민주사회 국가 지도자들이 이란 국민의 진짜 의중을 잘못 판단하고 있다고도 했다.

라이시 대통령은 어릴 때부터 표준 교육 대신 이슬람 성직자가 되기 위해 신학을 공부했다.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 이후 이슬람공화국이 들어서자 샤리아(이슬람 율법)를 잘 아는 인사들이 지방 사법행정에 필요했고 당시 만 19세였던 라이시는 인구 250만 규모의 카라지시의 차관 검사로 임명된다. 이후 단기간에 승진해 1988년에는 수도 테헤란에 있는 이슬람공화국 창립자 아야톨라 호메이니에 대한 명예훼손을 벌하는 이슬람혁명재판소 부소장으로 임명된다.

이란 이슬람공화국은 이슬람 혁명 이후 정권에 반대하는 반체제 인사들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이때 남녀 불문 5000명이 넘는 반체제 인사들의 사형을 집행한 이른바 '죽음 위원회' 5명 판사 중에 에브라힘 라이시 당시 이슬람혁명재판소 부소장도 있었다. 이로 인해 라이시는 '테헤란의 도살자'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게 되는데, 국제앰네스티의 2018년 보고서에 의하면 1988년 당시 정치범들을 비밀리에 처형하고 시체를 유기하는 반인도적 범죄가 자행됐다. 여전히 이란 정부는 시체를 유기한 장소에 대해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고 있지만, 2019년 트럼프 미 행정부는 미성년자들을 상대로 사형을 선고·집행하는 등 반인도적 범죄를 저지른 이유로 라이시 대통령을 제재 대상에 올리기도 했다.

이란계 캐나다인 인권변호사 카페 샤루즈는 이란 인터내셔널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라이시 대통령을 혹평했다. "정권의 노선을 따르며 추잡한 일을 수행하는 것 외에 특별한 재능은 없는 사람이다." 샤루즈에 따르면 현 이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가 1989년 정권을 잡고 나서 자신에게 맹목적 충성을 할 사람을 찾았고 에브라힘 라이시가 그 적격자였다는 것이다. 1989년부터 2021년 대통령에 당선될 때까지 라이시는 오랜 기간 사법부 부국장 그리고 2014년에는 사법부 장관을 역임했다. 2021년 대선에서 이란 사법부는 상대 후보 자격을 박탈하면서까지 라이시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라이시 대통령의 죽음이 중동 정세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라이시 대통령의 이러한 역사와 관련해 내다볼 수 있다. 영국 세인트앤드루스대학의 이란 정치 전문가 시아부시 란즈바르-다에미 교수는 언론 인터뷰를 통해 "이란 대통령은 전통적으로 그리고 헌법에 따라 최고지도자의 뜻대로 움직이는 자리"라며 "실제 모든 권력은 현 최고지도자인 85세 하메네이에게 집중되어 있다"고 했다. 라이시 대통령의 죽음이 국정 운영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것도 이 같은 이란의 독특한 권력 체계 때문이다. 미국 내 이란 전문가들도 이와 같은 이유로 라이시의 죽음 때문에 이란의 외교정책 기조가 바뀌는 일은 없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다만 라이시 대통령이 고령의 최고지도자 후계를 이을 유력한 차기 후보였기에 그가 갑작스럽게 사망함으로써 이란 국내 정치는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관측이 나온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의 이란 전문기자 슌 엔젤 라스무센은 "현재 이란이 '이중 승계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봤다. 새로운 대통령을 임명해야 할 뿐만 아니라 하메네이를 계승할 수 있는 차기 최고지도자를 뽑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선 이란 헌법에 따라 부통령인 모하마드 모크베르가 임시 대통령직을 맡았다. 앞으로 50일 내에 대통령 보궐선거를 실시해야 하는 원칙에 따라 오는 6월28일에 선거가 치러질 것으로 전망된다. 대통령 선출보다 더 큰 문제는 하메네이를 이어 권력의 1인자가 될 차기 최고지도자를 뽑는 일이다.

차기 지도자 선출에 혁명수비대 영향력 클 듯

현재 하메네이 최고지도자의 둘째 아들 모즈타바 하메네이가 부각되고 있으나 권력 세습 자체가 이슬람 혁명 정신에 위배되기 때문에 고위 종교 관료들의 반대가 심할 것으로 카네기국제평화기금의 이란 전문가 카림 사자푸르 선임연구원은 내다봤다. 그는 "만약 하메네이의 아들이 최고지도자가 된다면 권력 유지를 위해 군(혁명수비대)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할 것"이라며 이는 앞으로 이란이 군사정권으로 전환하는 시기를 앞당기거나 최악의 경우 이란 이슬람공화국의 잠재적 붕괴를 가속화할 수 있다고도 전망했다.

미국 존스홉킨스 국제관계 대학원의 이란 전문가 발리 나스르 교수는 "이제 후보가 없으니 특정 세력이나 혹은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할 수 있는 문이 열렸다"고 보기도 했다. 현재 이란 전문가들이 예측하는 가장 유력한 미래는 물리적 힘을 가진 정부 조직 내부 인사들의 권력투쟁이 촉발될 가능성이다. 특히 지난 10년 동안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국민적 반감이 커져감에 따라 종교지도자들의 입지는 점점 줄어드는 추세지만 아직도 군은 사회 전반에 걸쳐 엄격한 통제를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차기 최고지도자 선출에 혁명수비대의 영향이 클 것이라고 이란 인터내셔널은 보도했다.

미 워싱턴 근동정책연구소 선임연구원 메흐디 칼라지는 "고인이 된 라이시 대통령처럼 군과 사법부를 어느 정도 장악한 '한 손에는 무기를, 다른 손에는 감방 열쇠를 쥔 자'가 차기 최고지도자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다.

일각에선 만에 하나 하메네이가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고 서거한다면 이란이 1979년에 겪었던 내부 분열보다 몇 배는 심한 분열을 경험할 것이란 우려도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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