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 음탕하게 놀던 ‘이곳’…반란군이 칼 씻은 홍제천 옆에 있었다 [서울지리지]

배한철 기자(hcbae@mk.co.kr) 2024. 5. 26.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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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옛 정자의 자취로 읽는 조선의 정치권력史
세검정(19세기말~20세기초). [국립민속박물관(헤르만 산더 기증 사진)]
“서울 안에서 놀 만한 곳은 삼청동이 제일이다. 인왕동이 그 다음이고, 쌍계동, 백운동, 청학동이 또 그 다음이다.”

조선전기 학자 성현(1439~1504)이 쓴 <용재총화>가 꼽은 옛 서울의 명소다. 삼청동은 북악산, 인왕동·백운동은 인왕산의 이름 난 곳이다. 쌍계동은 성균관 윗쪽 골짜기이며 청학동은 남산(중구 필동)에 위치했다. 모두 한양도성을 둘러싼 내사산들이다. 이들 산에는 경치가 아름다운 장소가 많아 풍류를 즐기기 위한 누정(樓亭)들이 빠짐없이 세워졌다.

성현이 으뜸으로 꼽은 삼청동은 도심에서 가까우면서도 숲이 울창하고 골이 깊다. <용재총화>는 “지위가 높고 점잖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논다”고 했다. 순조의 장인이자 조선후기 세도정치의 서막을 연 장동(신안동) 김씨 김조순(1765~1832)의 별장 옥호정(玉壺亭·종로 삼청동 133-1)이 삼청동에 있었다. 옥호는 ‘옥으로 만든 작은 병’으로 신선의 세계를 의미한다. 김조순은 병자호란때 삼학사로 알려진 김상헌을 필두로 노론의 중심인물인 김수항, 김창집의 직계 후손이다. 이조판서, 양관 대제학, 병조판서, 훈련대장을 지내며 조정의 실권과 군사권을 장악했고, 막강한 권력은 아들 김유근에게 대물림됐다. 옥호정 역시 김유근에게 상속됐다.

삼청동·인왕동·백운동 등 명소에 권력자 누정 자리···세조정치 김조순의 별장 옥호정 궁궐 방불
순조때 최고 실력자 김조순의 삼청동 별장 옥호정(19세기). 건물과 풍수배치가 궁궐을 방불케한다.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옥호정도’를 보면, 당대 최고 권세가 정자의 화려한 면모를 가늠할 수 있다. 정자 터는 북악산 동쪽 산자락의 명당에 자리한다. 드넓은 공간에 정원수 사이로 띄엄띄엄 호산방(玉壺山房) 편액을 건 본채, 죽정(竹亭)과 산반루(山半樓), 첩운정(疊雲亭) 등 아름다운 정자각, 행랑채가 조화롭게 배치돼 있다. 집터 뒤로는 송림이 울창한 아름다운 산록이 에워쌌고, 오른 편은 계곡에서 흘러내려온 물이 집 앞으로 돌아흐른다. 집과 냇가 사이에는 버드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다. 산정상 해돋이 장소의 일관석(日觀石), 초가 정자 뒤 바위의 옥호동천(玉壺洞天) 각자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옥호동천 각석 옆의 암벽에는 ‘을해벽(己玄壁)’을 새겼다. 을해년은 1815년으로 김조순이 정치적으로 가장 세력이 왕성했던 시기다.

기묘한 형상의 바위가 산재하고 노송이 빽빽한 인왕산도 권력자들이 애호했다. 인왕산 동쪽으로 내리뻗은 돌산 중턱에 터잡은 석파정(石坡亭·종로 부암동 산16-1)은 김흥근(1796~1870)의 별장이었다. 김흥근은 19세기 중반 장동 김씨 세도정치기에 활동했던 인물로 김조순의 5촌 조카다. 집안 후광으로 철종 때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고, 고종이 즉위한 후에는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이 장동 김씨 세력을 정계에서 몰아내는 과정에서 대립했다. 김흥근은 석파정만은 지키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 흥선대원군에게 강탈당했다. 대원군은 건물 터의 형상에서 정자이름을 바위언덕, 즉 석파정으로 정했고, 자신의 아호도 석파라고 했다.

석파정에서 북쪽으로 700m지점의 세검정(洗劍亭·종로 신영동 168-6)은 인조반정과 관련이 깊어 일반인에게도 낯익다. 이귀, 김류 등은 광해군을 폐위키로 결의하고 1623년(광해군 15) 음력(이하 음력) 3월 12일 홍제천에 집결한 후 창의문을 도끼로 부수고 들어가 인조를 새로운 왕으로 옹립했다. 이후 반정군들은 홍제천에서 칼을 씻어 칼집에 넣었다. 세검(先劍)은 태평성대를 맞이했음을 상징한다. 정자도 반정군이 거사 성공을 자축하며 건축했다고 알려져 있다.

세검정은 층층의 바위와 어지럽게 쏟아지는 물줄기가 볼만했다. <동국여지비고>는 “정자가 돌 위에 있으며 폭포수가 그 앞을 지난다. 장마 때마다 도성 사람들이 나가서 넘쳐흐르는 물을 구경한다”고 했다. 다산 정약용(1762~1836)도 1791년(정조 15) 여름, 폭포를 구경하기 위해 세검정으로 달려갔다. <다산시문집>은 “이때에 비바람이 크게 일어나더니 산골 물이 갑자기 흘러내려 눈 깜짝할 사이에 계곡은 메워지고 물 부딪치는 소리가 아주 요란하였다. 흘러내리는 모래와 구르는 돌이 내리치는 물속에 마구 쏟아져 내리면서 물은 정자의 초석을 할퀴고 지나갔다. 그 형세는 웅장하고 소리는 맹렬하여 서까래와 난간이 진동하니 모두들 오들오들 떨며 불안해했다. 내가 ‘어떻냐’고 물으니 모두들 ‘이루 말할 수 없이 좋다’ 하였다”고 적었다. 아쉽게도 1944년 2월 25일 주변의 화재로 전소됐고 현재의 건물은 1977년 신축됐다. 부근에 주택가가 형성되고 도로가 나면서 옛날의 운치 있던 분위기는 퇴색됐다.

인조반정군이 칼 씻었던 세검정, 장마때마다 폭포물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장사진
세검정(일제강점기). 지금은 주변에 주택가가 들어서고 도로가 생기면서 운치있는 분위기가 많이 퇴색됐다. [국립중앙박물관]
유숙(1827~1873) 필 세검정. [국립중앙박물관]
영화 ‘서울의 휴일(1956년)’ 中 벽수산장 모습. 여성들 뒤로 친일파 윤덕영이 송석원 터(종로 옥인동)에 지은 프랑스풍 대저택 벽수산장이 보인다. [영화 ‘서울의 휴일’ 캡쳐]
종로 옥인동 주택가 골목에 방치된 벽수산장 잔해. [배한철 기자]
세검정 옆에 연산군이 1506년(연산군 12) 1월 27일 건축한 탕춘대(蕩春臺·종로 신영동 128-1) 터도 있다. 탕춘대는 지붕을 청기와로 장식해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탕춘대는 폭군 연산군의 음란한 놀이터였다. 1506년(연산군 12) 7월 7일 실록은 “경복궁에서 대비에게 잔치를 베풀고 잔치가 파하자 내구마(內廐馬) 1000여 필을 들이게 하여 흥청(興淸·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는 여악)을 싣고 탕춘대로 가 나인들과 간음했다”고 적고있다. 탕춘(蕩春)은 절정의 봄을 의미한다. 봄의 절정은 찰라처럼 지나가듯, 탕춘대를 지은 그해 9월 2일 연산군은 쫓겨난다. 1747년(영조 23) 서울 외곽을 방어하는 총융청을 탕춘대로 옮기면서 건물명도 연융대(鍊戎臺)로 교체했다.

종로 배화여고 뒤편 필운대(弼雲臺)는 이항복(1556~1618)의 집에 있던 정자였다. 이항복은 백사를 포함해 여러 개의 호를 갖고 있었으며 필운대도 그 중 하나다. 주변에는 봄이면 꽃이 만발해 필운대에서 굽어보기 좋았다. <동국여지비고>는 “주변 인가에서 꽃나무를 많이 심어 경성 사람들의 봄철 꽃구경은 반드시 먼저 이곳을 손꼽게 되었다”고 했다. 옛터에 필운대 각석이 남아있다. <동국여지비고>는 “석벽에 새긴 필운대 세 글자는 곧 이백사의 글씨”라고 했다.

옥인동 송석원(松石園)은 정조 때의 평민시인 천수경(1758~1818)의 집이었다. 1786년(정조 10) 천수경은 송석원에서 중인 시인 13명과 시사(詩社·시동인)를 결성했고, 하급계층의 한문학 활동인 위항문학운동의 구심적 역할을 했다. 천수경 사후 주인이 여러 차례 바뀌었으며 이후 장동 김 씨 일가를 거쳐 순종의 계비 순정황후 윤 씨의 백부인 친일파 윤덕영의 소유로 넘어갔다. 윤덕영은 1914년 송석원 터에 프랑스풍 대저택 벽수산장(碧樹山莊)을 지었다. 저택은 방이 40개나 돼 ‘경성의 아방궁’이라 불리기도 했지만 지금은 주택가 골목에 돌기둥 등 일부 잔해만 쓸쓸히 남아있다.

서촌 배화여고 뒷편의 필운대. 이항복 집터 뒷편에 있던 정자터다. 이항복 친필의 필운대 각자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 [배한철 기자]
남산 기슭의 필동 노인정(일제강점기). 세도정치가 조만영의 정자다. 이곳에서 갑오개혁 안건이 결정됐다. [국립중앙박물관]
궁궐의 안산(案山·풍수지리의 남쪽산) 남산에도 정자가 흔했다. 노인정(老人亭)은 필동 맨 안쪽에 자리잡았다. 1840년(헌종 6) 조선말 세도정치가 풍양 조씨의 핵심인물 조만영(1776~1846)이 지은 정자다. 조만영은 익종(효명세자)의 장인이자 조대비 신정왕후의 아버지다. 노인정은 도교에서 장수를 주관하는 남쪽 하늘의 노인성(老人星)에서 땄다. 이곳에서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안건을 결정하기 위한 조선과 일본 대표간 역사적인 회담이 세 차례 진행됐다. 이를 ‘노인정 회담’이라고 한다. 현재 정자는 흔적없이 사라졌고 서쪽 바위 벽에 ‘조씨노기(趙氏老基)’란 글자가 희미하게 남아있다.
서울 정자들 근대사의 아픔도 간직, 도성의 서쪽 연못에 있던 천연정은 일본공사관으로 사용
근대사 아픔을 간직한 천연정(일제강점기). [국립중앙박물관]
천연정(天然亭·서대문 천연동 금화초등)도 근대사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조선왕조는 도성의 넘치는 불의 기운을 차단하기 위해 도성 밖 동, 남, 서쪽에 3곳의 인공 연못을 팠다. 동지(東池)는 흥인문 동쪽에, 남지(南池)는 숭례문 아래 김안로의 집터에, 서지(西池)는 경희궁 서쪽에 위치했다. 서지에서는 기우제를 지냈고 천연정(天然亭)을 지었다. <태종실록> 1408년(태종 8) 5월 19일 기사는 “모화루(慕華樓)의 남쪽 연못이 완성되니 … 구경(舊京‧개성) 숭교사(崇敎寺) 못의 연(蓮)을 배로 실어다 심었다”고 했다. 조선후기 서지에 경기 중군영이 설치된다. 천연정(天然亭)은 군영의 부속건물로 지어졌다. 그러다가 1880년(고종 17) 일본공사관으로 사용되며 청수관(淸水館)으로 호칭됐다. 청수관은 1882년 임오군란 때 불에 탔다. 서지는 1919년 매립돼 초등학교가 들어섰다.

굽이굽이마다 절경이 널려있는 한강에는 상류에서 하류로 내려가면서 정자들이 빼곡했다. 기록을 종합하면, 한강에는 대략 75개의 누정이 존재했다. 광나루와 동호 일대에 18개, 용산강에 9개, 서호에 35개, 노량진에 3개, 양천에 10개의 누정이 있었다. 동호와 서호의 경치가 뛰어나 상대적으로 누정이 집중됐다.

중랑천이 한강과 만나는 지점은 호수를 연상하게 할 만큼 강폭이 넓어 ‘동호(東湖)’로 호칭됐다. 저자도, 두모포, 응봉 등 동호 주변은 예로부터 한강변에서 경관이 수려하기로 유명했다. 조선전기 권신 한명회(1415~1487)의 압구정(狎鷗亭)이 동호 정자 중 하나다. 애초 여의도에 있다가 1476년(성종 7) 동호로 옮겨왔다. 한강개발로 압구정 일대가 완전히 달라졌지만 정자 터는 대략 동호대교와 성수대교 사이 현대5차 아파트로 추정한다. 압구(狎鷗)는 갈매기와 허물없이 가깝다는 뜻으로 세상사에 욕심이 없다는 의미가 담겼다. 김수온의 <압구정기>는 “(한명회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한림(翰林) 예겸(倪謙)에게 정자 명칭을 부탁하여 압구를 받았다”고 했다. 한명회는 압구정을 호로 삼았다.

한강 굽이굽이에 75개 누정 존재, 호수처럼 넓고 주변 경치 뛰어난 동호, 서호에 정자 즐비
막강한 권력의 한명회는 임금도 우습게 알았다. 조선 중기 문신 이정형(1549~1607)의 <동각잡기>는 “명나라 사신이 정자를 구경하고자 하니 한명회가 용봉차일(龍鳳遮日·임금의 행차 때 쓰는 장막)을 가져가 화려하게 꾸미려고 하였다. 성종이 허락하지 않자 한명회가 화난 기색을 드러내니 대간이 나서 임금에게 무엄하다 하며 죄주기를 정하였다. 한명회는 외지로 귀양 갔다가 곧 풀려나 돌아왔다”고 했다. 매월당 김시습은 “젊어서 사직을 위태롭게 하더니(靑春危社稷),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히네(白首汚江湖)”라고 비판했다. 압구정은 한명회 사후 선조의 사위 유정량(1591~1663), 선조의 증손 진평군 이택(1659~1717), 참판 윤양후(1729~1776), 형조판서 조정철(趙貞喆, 1751~1831), 이조판서 남병철(1817~1863), 한성판윤 김세호(1806~1884) 등 주인이 수도없이 교체됐다.

용산강의 대표 정자는 용양봉저정(龍驤鳳䎝亭)이다. 한강대교 남쪽 노들나루공원 옆 언덕(동작 본동 10-30)에 있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화성 현륭원에 참배하러 갈 때 한강을 건너 잠시 휴식할 목적으로 1791년(정조 15) 완공한 행궁이다.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는 “북쪽에는 높은 산이 우뚝하며 동에서는 한강이 흘러와 마치 용이 꿈틀꿈틀하는 것 같고, 봉이 훨훨 나는 듯하다. … 이에 대신들에게 명해 ‘용양봉저정’이라고 크게 써 문위에 걸게 하였다”고 했다.

화성에 갔던 정조가 환궁하기 위해 한강을 건너는 장면을 묘사한 ‘한강주교환어도’에 용양봉저정이 그려져 있다. 정조 이후 헌종도 용양봉저정을 종종 찾았고, 1867년(고종 4) 9월 9일에는 고종이 행차해 수군의 군사훈련을 보고 밤에는 횃불을 올리는 것을 관람하며 밤을 지새웠다. 용양봉저정 건물들은 고종때 유길준(1856~1914)에게 하사됐다가 1930년 일본인의 손에 들어가면서 온천장, 운동장 등 오락시설과 요정으로 운영되다가 광복후 국유로 환원됐다.

당대 최고 권력자들 정자 여러곳 소유, 권력무상 보여주듯 지금은 대부분 희미한 흔적만 남아
정선 필 ‘경교명승첩’ 중 서호 일대를 담은 양화환도(보물). 한강에서 풍광이 좋기로 이름난 서호 일대의 모습을 담고 있다. 오른쪽에 선유도가 있고 왼쪽에는 잠두봉과 양화진나루터가 보인다. 한강개발로 자연과 정자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경치는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다. [간송미슬관]
마포 일대 한강인 서호(西湖)에서는 망원정(望遠亭·마포 합정동 457-1)이 이름난 정자였다. 세종대왕의 형인 효령대군(1396~1486)이 1424년(세종 6) 처음 세웠다. 정자에 오르면 전체 서호 전경과 선유도가 조망된다고 했다. 전국적으로 가뭄이 계속될 때 세종이 정자에 잠시 들렀는데 때마침 비가 와 정자 명칭을 희우정(喜雨亭)이라고 했다. 문종이 세자시절의 작품인 동정귤(洞庭橘)시도 여기서 지어졌다. 심수경(1516~1599)의 <견한잡록>에 따르면, 세종과 세자 문종이 여러 신하들과 며칠동안 정자에 머물렀다. 안평대군이 성삼문, 임원주 등과 함께 강가에서 달구경하며 술을 마시는 모습을 본 세자가 동정귤 두쟁반을 보내주며 쟁반에 “가장 사랑하는 것이 동정귤이니(最愛洞庭橘), 코에도 향기롭고 맛도 달구나(香鼻又甘口)”라고 썼다. 이에 귤을 선물받은 신하들이 감동받아 차례로 답시를 짓고 안견은 그림을 그려 시와 그림을 하나로 묶었다. 이 기록이 ‘도원몽중도첩’이며 아쉽게도 지금 일본 덴리대학에서 소장하고 있다. 그 후 1484년(성종 15) 성종의 형 월산대군(1454~1489)이 과거의 영화로운 자취를 잃어버린 채 쓰러져 가는 정자를 다시 고쳐 지으면서 망원정이라 했다.

서울의 누정들은 하나같이 당대 최고 권력자들의 소유였지만 지금까지 그 명맥이 유지되는 것이 극히 드문 실정이다. 다시금 권력의 무상함을 느끼게 된다.

<참고문헌>

1. 조선왕조실록. 동국여지비고. 용재총화(성현). 다산시문집(정약용). 동각잡기(이정형). 홍재전서(정조). 견한잡록(심수경)

2. 서울의 누정.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2012

3. 명승 관련 신사료 연강정사기를 통한 18세기 한강 연안 명승의 현황 및 복원방향 연구. 국립문화재연구소.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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