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제국 초석 세웠는데 친구에게 다 뺏겨”…배관공 출신 ‘이 남자’ 기구한 인생 [추동훈의 흥부전]

추동훈 기자(chu.donghun@mk.co.kr) 2024. 5. 26. 10:39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흥부전-54][브랜드로 남은 창업자들-46]데이비드 뷰익

‘브랜드로 남은 창업자들’ 은 이름 그 자체가 브랜드가 된 창업자의 스토리를 들려드리는 콘텐츠입니다. 아래 기자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더욱 알차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글로벌 자동차 제국 GM은 어떻게 시작됐나
169개 국가에서 자동차를 판매하고 자회사만 28개를 둔 자동차 왕국. 전 세계서 손꼽히는 자동차 그룹사 GM(제너럴 모터스)은 이름 그대로 자동차 브랜드의 대명사로 불립니다. GM 산하에는 쉐보레, GMC, 캐딜락 등 이름만 들어도 알법한 회사들이 편입해 있는데요. 20세기 최고의 마차회사를 운영하던 윌리엄 듀랜트가 GM을 창업하며 처음 인수한 회사는 쉐보레도 캐딜락도 아닙니다.
데이비드 뷰익
GM의 초석이 된 회사는 3개의 방패 로고로 유명한 브랜드, 바로 뷰익입니다. 저도 처음 해당 로고를 도로에서 봤을 땐 저게 무엇인가 싶었는데요. 국내에선 정말 가뭄에 콩나듯 한 번씩 볼 수 있었던 뷰익. 그런데 이 뷰익을 창업한 사람이 화장실 배관공 출신이란 사실 알고 계신가요. 오늘의 브랜드로 남은 창업자 주인공, 데이비드 뷰익의 험난했던 인생을 같이 살펴보겠습니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스코틀랜드 소년의 꿈
데이비드 뷰익은 1854년 스코틀랜드 앵거스의 아브로스에서 태어납니다. 아버지는 목수로 일했고 어머니는 여관종업원이었던 뷰익 가족은 넉넉치 않은 집안 형편에 근근히 먹고 살아가는 전형적인 시골 가족이었습니다. 안 그래도 가난했던 뷰익 가족들은1845년부터 7년간 이어졌던 아일랜드 대기근의 여파로 먹을 것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어려운 생활이 이어졌습니다.
뷰익 로고
결국 뷰익가족은 이를 버티지 못하고 뷰익이 2살이 되던 해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건너가는 ‘아메리칸 드림’을 택합니다.

그리고 뷰익 가족이 정착한 곳은 다름 아닌 미국 미시간주의 ‘모터시티’ 디트로이트였습니다. 어쩌면 미국에 도착했을 때부터 뷰익은 자동차와의 끈질긴 인연이 시작된 셈입니다. 사실 지금이야 제조업으로 유명한 디트로이트지만 1850년대만 해도 농산물을 유통하고 거래하는 상업의 중심지였습니다.

하지만 그들 가족의 기대는 3년만에 꺾이고 말았습니다. 바로 아버지 뷰익이 사망했고 어머니가 재혼하며 어린 뷰익에거 큰 혼란을 가져다 줬습니다. 결국 뷰익은 1869년, 15살도 채 되지 않은 나이에 공부 대신 일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취업전선에 뛰어듭니다. 당시만 해도 10대에 일을 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던 분위기였던만큼 뷰익 역시 이러한 길을 택한 셈입니다.

뷰익은 되는대로 일했습니다. 거리에서 신문을 팔거나 농장으로 떠나 막노동을 하며 하루하루 근근이 버텨갔습니다. 또 한 기계가공업체에서도 일하며 기계에 대한 관심도 키워갔습니다. 그러다 그는 배관용품을 만드는 ‘Alexander Manufacturing Company’라는 회사에서 일을 배웠습니다.

뷰익 인생을 뒤바꾼 배관공 생활
당시는 산업혁명의 도래와 더불어 각종 일상생활에서도 수많은 변화과 이뤄지고 있던 시점이었습니다. 각종 기계들이 삐걱삐걱 소리를 내며 작동하기 시작했고 건축기술에 기반한 새로운 집들이 계속 지어져 나갔습니다. 집을 새로 짓고 도심을 정비하며 배관시설도 더 많이 필요했습니다.

배관 사업이 호황을 누리던 가운데 직원이던 뷰익 역시 특유의 근면·성실함으로 회사에서 인정받으며 성장했습니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어린 시절과 달리 일도 잘 하고 돈도 잘 벌기 시작하며 그의 인생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승승장구하던 배관회사는 경영에 문제가 발생하며 1882년 파산을 맞게 됩니다. 경영 실패로 문을 닫게되며 졸지에 실업자가 될 뻔 했던 뷰익은 그의 동료 윌리엄 셔우드와 함께 아예 회사를 인수키로 했습니다. 회사 이름은 ‘뷰익&셔우드 매뉴팩쳐링 컴퍼니’로 지었습니다. 뛰어난 기술자였던 뷰익과 경영감각이 뛰어난 셔우드의 동업은 성공적이었습니다.

뷰익&셔우드 매뉴팩쳐링 컴퍼니 청구서 영수증
특히 이들은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던 욕조와 세면대 등 현대화된 화장실에 눈을 뜨게 됩니다. 당시 주철로 만들어졌던 차가운 욕조와 세면대 대신 ‘자기’를 활용해 따뜻한 느낌의 화장실을 표방했습니다. 관련 특허를 12개나 보유했던 기술자 뷰익의 화장실 설비는 큰 인기를 모았습니다.

결국 뷰익의 회사는 1890년대 초반 디트로이트에서 가장 큰 배관 회사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쫄쫄 굶던 아이가 이제는 지역에서 제일가는 사업가가 된 것이죠.

배관관련 기술에선 경쟁자가 없었던 뷰익의 눈에 다시 새로운 기계가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1890년대 본격적으로 시작된 산업혁명의 정수, 바로 자동차가 그 대상입니다. 배관기술 연구소 한쪽에서 시작된 내연기관 엔진에 대한 연구는 점차 뷰익의 주된 관심사가 되기 시작합니다. 수십년간 해온 배관 사업에 대한 지겨움과 권태가 커졌던 그는 점차 엔진에 매몰되며 배관 사업 자체를 멀리하기 시작합니다.

화장실 배관공, 자동차 엔진에 도전하다
하지만 동업자인 셔우드는 이러한 뷰익의 모습을 참지 않았습니다. 결국 둘의 동업은 끝이 났고 1899년 뷰익은 기존 배관회사를 처분한 채 아예 자동차 엔진을 생산하는 회사를 세웁니다. 바로 ‘뷰익 오토빔 & 파워 컴퍼니’입니다. 하지만 단순한 배관 구조와 달리 엔진 기술은 차원이 다른 고급 엔지니어링 기술이었습니다. 회사를 처분해 얻은 돈은 계속해서 연구개발에 쓰이며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뷰익은 스스로 엔진을 개발하기를 멈추고 월터 마르와 유진 리처드라는 엔진 전문가를 영입해 새롭게 진용을 꾸립니다. 그렇게 사업 시작 4년만인 1902년 뷰익은 첫 엔진 개발에 성공합니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고집과 집념의 사나이였던 그의 의지는 아무도 꺾을 수 없었습니다. 특히 그가 개발한 엔진은 자동차 역사를 바꿨다고 평가받는 뛰어난 엔진이었습니다. 현대의 엔진들도 대부분 이 오버헤드 밸브식을 채택했기 때문에 모든 자동차 엔진의 아버지가 뷰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기존 사이드 밸브식 엔진이 갖고 있던 약한 출력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핵심으로 한 ‘오버헤드벨브 엔진’이 바로 그가 발명한 새로운 엔진입니다. 당시 사이드 벨브 엔진의 경우 최고 시속이 30km/h에 불과했지만 그의 엔진이 달린 자동차는 50km/h로 달리며 자동차라는 발명품에 걸맞은 기술 역량을 선보입니다.

오버헤드 밸브 특허
엔진 개발을 마친 뷰익은 ‘뷰익 매뉴팩처링 컴퍼니’라는 완성차 제조사 브랜드로 회사명을 바꿉니다. 그리고 이제 승승장구만 남았다고 기뻐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불행은 지금부터 시작이었습니다.

연구개발에 매진했던 4년간, 뷰익이 판매한 차는 고작 1대였습니다. 사실상 아무런 수익을 내지 못한채 연구개발에만 매몰되며 배관회사서 벌어들였던 돈을 다 썼을 뿐 아니라 계속해서 대출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혁신적인 기술은 갖고 있었지만 돈이 없던 뷰익은 하는 수 없이 자본가에 기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세계 최고의 엔진 만들고도 회사 뺏긴 뷰익
그에게 손을 내민 자는 벤저민 브리스코라는 인물이었습니다. 철재 사업을 하는 사업가였던 그는 돈을 빌려주는 대신 뷰익의 회사를 주식회사로 바꾸며 지분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급전이 필요했던 뷰익은 브리스코의 제안을 대부분 받아들였고 이는 뷰익의 발목을 잡는 덫이 되고 맙니다.

뷰익이 돈을 갚지 못하자 브리스코는 아예 회사 경영권과 기술을 전부 빼았고 아예 회사를 제임스 하이팅에게 매각해버립니다. 그리고 브리스코는 직접 맥스웰-브리스코 컴퍼니를 설립해 직접 자동차 생산에 나서죠. 맥스웰-브리스코 컴퍼니는 당시 미국에서 자동차 생산량 3위를 기록하며 뷰익의 성과를 가로챘습니다.

뷰익 모델 B
그 사이 뷰익의 회사를 사버린 제임스는 뷰익을 생산 담당자로 뽑아버립니다. 결국 뷰익은 자신이 만든 회사의 직원으로 강등된 채 자신이 개발한 엔진을 제임스를 위해 제작하고 생산해야하는 처지에 쳐하게 됩니다. 당시 그의 나이가 50세였습니다.

그래도 다시 마음을 다잡은 뷰익은 자신의 이름을 딴 최초의 자동차 ‘뷰익 모델 B’를 완성하는데 성공합니다. 세계최초의 오버헤드 밸브 엔진이 장착된 이 자동차는 빠른 속도와 멋진 디자인으로 인기를 모았습니다. 하지만 1년 동안 해당 차량은 37대가 판매되는데 그쳤습니다. 대량 생산을 해야 했지만 회사를 인수한 제임스가 생산 공장에 투자를 제대로 하지 않은 탓이었죠.

결국 전전긍긍하던 제임스는 그의 친구 윌리엄 듀랜트를 찾아가 SOS를 청합니다. 당시 미국 최대 규모의 마차 생산업체를 운영 중이던 듀랜트는 마차의 시대가 끝나고 자동차의 시대가 올 것임을 예감했습니다. 특히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뷰익의 차는 그의 눈에 확 띄었습니다. 듀랜트는 곧바로 뷰익자동차의 지분을 사들여 경영권을 인수합니다.

자동차 제국 만든 마차 회사 오너
그리고 그의 자본이 투입된 뷰익 자동차는 이듬해인 1905년 750대, 1906년 1400대를 생산하며 기하급수적으로 판매대수를 늘립니다. 뷰익 자동차 판매가 증가하고 회사가 성장할 수록 정작 데이비드 뷰익의 처지는 계속 나빠집니다. 듀랜트의 영향력이 커지며 뷰익의 입지는 더 좁아졌고 결국 뷰익은 뷰익 자동차를 생산하는 한 직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됐습니다.

결국 불만이 쌓인 뷰익은 1906년 듀랜트의 회사를 떠났고 듀랜트는 뷰익을 비롯해 자동차 회사를 자회사로 둔 지주회사 GM을 설립하며 자동차 왕국을 만들게 됩니다.

윌리엄 듀랜트 GM 창업자
또다시 외톨이가 된 뷰익은 퇴직금으로 받은 10만 달러로 새로운 투자를 결심합니다. 바로 서부 개발에 주목해 캘리포니아 석유사업과 플로리다 지역의 부동산 투자에 나선 것인데요. 이 역시 실패로 돌아갑니다. 결국 말년에 무일푼이 된 뷰익은 디트로이트에 있는 무역 학교에서 강사로 일하며 생계를 꾸려갑니다. 결국 1929년 3월 74세의 나이에 대장암으로 사망하며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노년에 맞은 파산, 이름만 남긴 뷰익
가난하게 태어나 가난하게 마감된 그의 삶. 사실 그의 삶 자체는 처량하고 불행했지만 자동차 역사에서 그가 세운 기념비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입니다. 뷰익의 브랜드는 GM의 주요 축으로 여전히 역할을 하고 있고 그가 만든 오버헤드밸브 엔진은 여전히 가장 모범적인 엔진 모델로 불립니다. 그는 1974년 자동차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습니다.

만약 그가 잘했던 배관과 화장실 설비에 집중했다면 그의 삶은 어떻게 변했을까요? 아마 더 부유하고 더 행복하게 살았을지 모르겠지만 반대로 자동차 산업에서 그의 발명품이 더욱 늦게 또는 다르게 개발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지금의 GM왕국 역시 그가 배관공으로 머물렀다면 탄생조차 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흥’미로운 ‘부’-랜드 ‘전’(傳). 흥부전은 전 세계 유명 기업들과 브랜드의 흥망성쇠와 뒷야이기를 다뤄보는 코너입니다. 브랜드로 남은 창업자들, 오리저널 시리즈를 연재 중입니다. 아래 기자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더욱 알차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