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하는 사람들의 ‘거룩한 말’은 위험하다 [노원명 에세이]

노원명 기자(wmnoh@mk.co.kr) 2024. 5. 2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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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업가의 ‘거룩한 말’은 불안하게 들린다 <사진출처: LSE 비지니스 리뷰>
산업 분야 취재기자들의 취재력은 CEO와 개인적으로 통화할 수 있는가, 필요할때 정식 인터뷰를 성사시킬수 있는가로 측정된다. 그 이상의 평가 방법이 있을수 없다. CEO가 곧 기업이므로.

그러나 CEO를 취재하기는 쉽지 않다. 한국의 기업 오너들은 신비주의를 선호한다. 그들은 페이스북은 해도 인터뷰는 안한다. 월급쟁이 CEO 인터뷰는 쉬운가? 더 어렵다. 오너 눈치를 보기 때문이다.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리는 것을 ‘무엄함’으로 여기는 문화가 뿌리깊다. ‘월급쟁이 CEO를 바로 경질시키는 방법은? 오너와 월급쟁이 CEO 사진을 나란히 실으면 된다.’ 오래된 신문업계의 농담이다. 기업을 취재할 때 이런 문화가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이렇게 눈치를 보는 조직에서 무슨 창의가 나오겠나 하는 걱정도 들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게 한국 자본주의의 저력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미국식 자본주의에서 전문 경영인은 오너 눈치를 보지 않는다. 그에게는 막강한 자율권이 주어지는데 그가 책임져야 할 것은 오직 주가 뿐이다. 이익을 높이고 그 결과 주가가 올라가면 임기는 계속 연장된다. 한국은 훨씬 복잡하다. 성과도 내야 하고 기업체질도 바꿔야 하고 사고나 잡음은 없어야 하고 가장 중요하게는 오너의 신뢰를 잃지 않아야 한다. 한국기업 CEO의 사명은 주가 관리가 아니라 더 경쟁력있는 조직을 만들고 후임에 인계하는 것이다. 오너의 명을 받들어 단단한 회사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한번 쭉 빨고 몸값 높여 다른 기업으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한 기업 안에서 ‘명예의 전당’에 들고 싶어한다. 성과는 오너가 인정해주면 되는 것이지 신문에 나가서 좋을 것이 없다. 결론적으로 한국 CEO는 포장보다는 본질에 신경쓸 확률이 높다. 이것은 경쟁력이 될 수 있다. 기자들이 기사를 얻기는 어렵겠지만.

최근 한 대기업의 CEO가 전격적으로 교체되었다. 그 분야를 담당하지 않아 깊은 내막을 알지 못한다. 다만 교체된 전임 CEO가 그 기업의 전통적 CEO들과는 달리 언론에 ‘어록’이 자주 보도되었던 기억이 난다. 그는 엔지니어 출신이지만 조직문화 혁신과 소통에 관심이 많았다. 밑의 직원들로부터 상찬에 가까운 별명으로 불렸다. ‘좋은 회사’의 기준을 나름대로 정의하는가 하면 임직원들이 일하는 방식을 다시 디자인할 것을 주문했다. 사내 직급 표시를 없애버리고 ‘프로’로 통일한다는 기사도 있었다. 대학 강연에서 말한 자서전적 이야기가 신문에 난 적도 있다. 사장이 된 비결로 ‘1만 시간 법칙과 집중력’을 강조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기억하는 그의 말은 ‘무엇을 했다’는 것 보다는 ‘이렇게 하겠습니다’가 많았다. 때로는 비장하고, 때로는 거룩하게 들렸다. 그런 말을 접할 때마다 ‘저 회사에 무슨 문제 있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무슨 근거가 있어서가 아니라 대개 잘 나갈때는 말이 필요 없고 허할수록 말이 많아지는 법이니까. 그의 임기중 그의 회사는 결정적인 승부처에서 주도권을 놓쳤다는 비판을 듣고 있다.

알리는 쉼없이 떠벌리면서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복싱을 했다. 훌륭한 복서는 떠버리일수도 있고 과묵할 수도 있다. 떠벌리는 것과 복싱 사이에는 아무 상관성 혹은 인과성이 없다. 한국 기업 문화에선 말이 상당히 조심스럽다. 토론이 없는 기업은 발전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CEO가 ‘토론하는 기업 문화를 만듭시다’ 말하고 이것이 언론에 보도된다해서 그 기업에 좋을 것은 없다. CEO는 생산적으로 토론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면 되는 것이다. ‘이대로 가면 큰일 납니다’ 같은 경고성 발언도 한두번은 모를까 자주 하면 면피성으로 들릴 수 있다. 큰일 나지 않게 막는 것이 CEO가 할 일이다.

정치는 말로 하는 업이고 본질적으로 허업이므로 말을 거룩하게 한다고 해서 손해볼 것이 없다. 오히려 정치에선 거룩하게 말하는 기술이 경쟁력이다. 반면 실업을 하는 사람들은 말도 거룩하기 보다는 생산적인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정치인처럼 말하는 실업가를 보면 왠지 불안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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