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깔벼로 논에 ‘한폭의 그림’ 수놓다…‘논아트’ 아시나요

김보경 기자 2024. 5. 26.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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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과 예술의 만남 ‘논아트’
전남 순천 별량면 올 7년째 시행
‘시 상징·순천만풍경’ 표현 예정
온통보라벼 등 5종 이용 모내기
밑바탕 이앙기로…그림은 손수
지역특산물·명소 홍보 농촌활력
충북 괴산·경기 여주 등도 선봬
2022년 전남 순천시 별량면 논아트 전경

농업과 예술의 만남, 생각만 해도 설렌다. 실제로 오늘날 농업은 먹거리 생산뿐 아니라 예술의 새로운 자원으로 자리매김하려는 시도가 곳곳에서 이뤄지고 있다. 그 가운데 들녘에 멋진 그림을 구현하는 ‘논아트’는 단연 눈길을 끈다. 논아트는 드넓은 논에 유색벼(색깔 있는 벼)를 그림과 글씨 모양으로 심은 뒤 자라면서 표현되는 작품을 일컫는다. 논아트를 이용해 지역을 새로운 명소로 탈바꿈한 전남 순천의 한 마을을 찾았다.

전남 순천만에서 가져온 갈대로 표시한 밑그림을 따라 참가자들이 모를 심고 있다.

“모자와 장화를 착용하시고 왼쪽 논부터 들어가서 모내기를 시작해주세요.”

23일 아침부터 순천시 별량면 봉림리 일대가 모내기 준비로 떠들썩하다. 별량면 주민자치회는 2018년부터 매년 5월 논아트 모내기 행사를 진행한다. 올해로 7년째인 이 행사는 각종 유색벼로 모내기해 논아트를 구현한다. 별량면 주민자치회를 비롯해 순천별량중학교 3학년 학생, 순천로컬푸드 소비자단체 등 100여명이 참여했다.

2024년 제 7회 별량면 논아트 도안.

“갈대로 표시한 밑그림을 따라 모를 심으면 됩니다. 주변에 심은 모가 흐트러지지 않게 조심하세요.”

허벅지 끝까지 오는 긴 장화를 신고 한명씩 논으로 들어간다. 양팔을 벌린 채 중심을 잡고서 유색벼를 심을 자리까지 걸어간다. 이날 그린 도안은 새로운 순천시 상징(CI)과 순천만풍경(S자 수로) 그림이다. 이는 올해초 순천시민을 대상으로 ‘별량면 논아트 이미지 공모전’을 진행해 채택됐다. 도안은 매년 달라진다. 지난해엔 ‘굿바이 코로나’ 문구와 역사 속 인물 나폴레옹, 2022년엔 정원박람회 홍보 문구와 영화 ‘타이타닉’의 한 장면을 그렸다. 그림에 쓰이는 유색벼는 ‘온통보라벼’ ‘자도벼’ ‘연두벼’ ‘황색벼’ ‘하얀벼’ 등 5종이다.

0.9.142순천로컬푸드 소비자단체, 별량면 부인회 등 여러 공동체가 손모내기로 드넓은 논에 멋진 그림을 표현하고 있다.

논아트를 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섬세하다. 이날 작업하는 1만3000㎡(4000평) 면적의 논엔 모판 400여개가 들어간다. 모내기를 하기 전 밑그림을 그리는 게 먼저다. 드넓은 논을 도화지 삼아 위성으로 좌표를 찍어 30㎝ 간격으로 순천만에서 가져온 갈대를 꽂아 표시한다. 갈대를 따라 흰색·붉은색·황색 등 유색벼를 심고 초록색인 일반벼는 바탕색으로 사용한다. 큰 그림과 밑바탕을 만들 땐 이앙기로 벼를 빠르게 심지만 주요 그림을 구현할 땐 수작업이 필요하다. 깔끔한 선과 입체감은 섬세한 손끝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허리를 펼 새 없이 오와 열을 맞춰 준비된 모를 모두 심었다. 지금은 형태를 알아보기 어렵지만 서서히 벼가 자라 7월이 되면 그림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때 그림 사이 빈 부분이나 잘못된 부분을 손으로 채운다.

논아트에 쓰이는 유색벼 ‘자도벼’. 자색빛이 나는 잎이 특징이다.

순천시 오천동에 사는 박주미씨(50)는 논아트 모내기에 5년째 참여하고 있단다. “순천이 고향이지만 모내기해볼 기회는 없었는데 이렇게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어서 좋아요. 처음엔 논에 들어가는 것도 어려웠는데 매년 모내기 실력이 늘고 있어요. 호호. ”

논아트는 예술작품을 넘어 농촌관광과 지역홍보에 큰 힘을 싣고 있다. 이는 지방소멸 위기를 겪는 농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도시와 농촌을 연결하는 도농 상생의 매개체 역할을 한다.

현영수 별량면 주민자치회 회장은 “논아트가 마을 대표 관광자원이 된 후 방문객이 많이 늘어난 걸 매년 체감한다”며 “연간 120명씩 인구가 줄어드는 위기를 논아트를 통해 극복하고 앞으로 마을이 100년 이상 지속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논아트로 지역회복에 성공한 해외 선례도 있다. 일본에서는 1993년 아오모리현 이나카다테에서 처음 논아트로 마을 살리기에 성공한 후 지방자치단체 30여곳으로 확산됐다. 2010년부터는 매년 전국 논아트 서밋이 열리는데 연간 수십만명이 이를 보기 위해 지역을 찾고 있다.

2023년 충북 괴산군의 논아트.

국내는 순천 이외에도 경기 여주, 충북 괴산 등 여러 지역에서 논아트를 선보인다. 국내 논아트 원조는 괴산이다. 2008년 괴산군 감물면 백양리 논에 상모놀이 그림이 처음 선보였다. 이색적인 장관으로 여러 지자체가 관심을 보였고 전국에서 논아트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논아트를 시작한 괴산군농업기술센터는 유색벼 논그림 기법으로 특허를 출원하고 다른 지역에 기술이전을 시행하며 국내 논아트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했다. 이달 31일엔 괴산의 17번째 논아트 작업이 진행된다.

여주에서도 ‘대왕님표 여주쌀’과 세종대왕을 기리는 지역 역사·자원을 논아트로 표현한다. 이곳 논아트는 여주쌀 대표 품종인 ‘진상벼’를 이용해 밑그림을 그리는 게 특징이다. 올해 논아트 디자인은 ‘세종대왕과 명성황후생가’ ‘건국 최초 쌀산업 특구 여주대왕님표 여주쌀’, 그리고 여주 도자기 공동브랜드 ‘나날’ 등이다. 14일 여주보 전망대 인근에 있는 논을 마지막으로 3곳의 논아트 모내기를 모두 마쳤다.

여름에 푸르렀던 들녘은 가을이 되면 황금색으로 다시 칠해진다. 올가을 지역 곳곳에 그려진 논아트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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