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이 정치에게] ② ‘의치한약수’ 블랙홀 이대로 괜찮나

이천종 2024. 5. 26. 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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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치한약수’를 아시나요?
신자유주의와 경쟁적 입시구조가 낳은 ‘의대 블랙홀’
‘아무리 달려도 주변 세계가 함께 달려 결국 제자리’ 붉은 여왕 신세

24일 오후 <27년만의 의대 증원 확정>을 알리는 뉴스 속보가 포털에 쏟아졌다. 올해 최대 이슈인 의대 증원과 관련된 입시 절차가 사실상 마무리됐다는 거다. 정치사회적으로는 의정 갈등이 이를 계기로 봉합 국면으로 갈지 파국으로 치달을지가 최대 관심이다.

서울 시내 한 의과대학 앞으로 의료진들이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뉴스1
다른 한 켠에서는 대학 입시에 미칠 파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의대 증원에 따른 여파로 올해 대입을 준비하는 수험생과 그들을 뒷바라지하는 학부모들에게 큰 고민거리가 생겨서다. 현재 의대 정원의 50% 정도가 한꺼번에 늘어나는 건 대입에 ‘대형 폭탄’이 터진 셈이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에 따르면 올해 치러질 2025학년도 의대(의전원 포함) 모집인원은 전년도 3058명 대비 1509명 늘어난 40개 대학 4567명이 된다. 수능 당일에는 출근 시간을 늦추고, 비행기 시간까지 조정하는 ‘입시의 나라’ 아닌가.

현역 의대 준비생 뿐 아니라 이미 대학에 다니는 학생, 심지어 20~30대 직장인까지 의대 준비반을 기웃거린다. 그 뿐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자녀를 지역으로 보내 지방 의대 진학을 준비하게 하는 ‘지방유학’이 인기라고 한다. 지방 교육청과 학원가 등에는 의대 진학에 관해 묻는 문의가 쏟아진다. 의대 광풍이다. 그러다보니 극도로 서열화된 대입 구조가 흔들리면서 의대 준비생이 아닌 이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야만적인 한국의 경쟁적 입시체제의 민낯이 다시한번 고스란히 드러내는 순간이다.

서울 시내 대학병원에서 의료진이 이동하고 있다. 뉴스1
◆의치한약수를 아시나요?

대학 입시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으면 한번 쯤 들어봤을 용어가 ‘의치한약수’다. ‘의치한약수(의대·치대·한의대·약대·수의대)’의 준말이다.

수험생 상위 1%는 적성과 무관하게 대체로 의치한약수를 꿈꾼다. 입시메카인 대치동에는 초등학생들을 위한 의대 진학반까지 있다. 서울 주요 명문대에서 자퇴하거나 등록 포기를 한 중도 탈락자가 해마다 늘고 있는데 이들 상당수가 의대에 도전하기 위해서다. 서울대 자연계는 중도 탈락자 비율이 80% 가량이다. 이들 대부분은 의학계열로 이동했다고 추정된다. 서울대 자연계가 ‘의대생 양성소’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이제 의대 입시는 N수는 기본이 됐다.

국회 교육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강득구 의원이 교육부에서 받은 '2023학년도 전국 의대 입학생 고3·N수생 분포 현황'을 보면 36개 의대 입학생 2860명 가운데 고3 재학생 출신은 1262명에 불과했다. 반면 2022년 2월 이전에 졸업한 재수생·기타 출신은 1598명이었다.

과학 인재 요람인 카이스트를 비롯해 국가가 과학 영재를 위해 학비를 지원하는 과학기술원에서도 의대 진학으로 인해 이탈자가 늘고 있다.

서울 시내 한 의과대학 도서관에서 의대생이 공부하고 있다. 연합뉴스
올해 서울대 의대 정시 합격생 25% 가량이 영재학교·과학고 출신(국회 교육위원회 소속 강득구 더불어민주당 의원실 자료)이라고 한다.

취업 잘되기로 유명한 주요 대학 반도체학과도 최초합격자 대부분이 의대로 옮겼다는 게 입시업계 분석이다. 종로학원이 분석한 2024학년도 이공계 상위권 학과 정시 미등록률 현황을 보면 2024년도 대입 정시 모집에서 연세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최초합격자 25명 중 23명(92%)이 이 학과에 등록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전년도 정시 최초합격자 미등록 비율 70%보다 22%포인트 상승한 것이다. 연세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는 삼성전자와 계약 해당 기업으로 취업이 연계되는 학과다. 고려대의 삼성전자 계약학과인 차세대통신학과 미등록률은 지난해(50%)보다 증가한 140%다. SK하이닉스 계약학과인 반도체공학과 미등록률은 올해 100%를 나타내 지난해(63.6%)보다 증가했다.

초등교사 출신으로 첫 한국교총 회장에 당선되고, 총선에서 지역구로 당선된 국민의힘 정성국 의원은 세계일보 인터뷰에서 “의대 정원이 증원되면 의료 서비스가 좋아지는 건 긍정적인데 입시에서는 안 그래도 쏠림 현상이 심한 의대 집중화가 더 가속화되는 측면이 있다”면서 “이런 부분들에 대해 교육계는 충격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했다.

서울 목동 학원가에 부착된 의대 입시 홍보 현수막. 연합뉴스
◆‘의대 쏠림’은 언제부터 가속화됐을까

한국의 대학 입시를 되짚어보면 의대는 지금은 로스쿨로 시들해진 법대와 함께 언제나 인기였다. 그렇지만 지금처럼 압도적인 쏠림 현상이 나타난 건 대체로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로 본다. 정성국 의원은 “(1971년생인)제가 대학 다닐 때만 하더라도 공과 대학이 의대하고 거의 선택권이 비슷할 정도였다”면서 “최근 의대 쏠림이 나타나면서 공대조차도 의대로, 모든 게 의치한약수 이런 순서가 됐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IMF 외환위기 직후 평생직장의 신화가 깨지고, 하루 아침에 직장에서 버림받는 일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세대가 대안으로 찾은 직업이 전문직인 의사였다. 신자유주의의 피바람을 몸소 겪은 세대들은 그들이 부모가 되자 자녀들을 초등생, 아니 유치원 때부터 의대를 보낼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사교육을 시키는 데 올인한다.

눈치빠른 이들은 너도 나도 대치동으로 향했다. 좋은 학군과 최고의 사교육 인프라를 자랑하는 대치동은 초등학생 전학이 쇄도했다. 그러다보니 대치동 초등학교 학생수는 저학년은 적고, 고학년은 많은 역피라미드 분포를 이루기도 했다.

사교육업계에서는 대치동에 상대적으로 상속형 부자보다는 자수성가형 부자가 많다고 분석한다. 대치동 학부모들은 학벌이 좋은 경우가 많아 예전부터 “선경아파트에서 관직 높음을 자랑하지 말고, 우성아파트에서 학벌 자랑말라”는 말이 있을 정도라고 한다. 자신들이 학벌을 매개로 성공했기 때문에 학벌을 통해 성공할 수 있다는 경험적 확신이 있으므로 자녀에게 학벌을 유산으로 물려주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이들 상당수가 자녀를 의대로 보내기 위해 총력전을 펼치는 것이다.

이들이 선망하는 의사 직군은 전문직 중에서 압도적 수입을 자랑하고 있다.

최근 공개된 보건복지부의 ‘의사 인력 임금 추이’ 자료를 보면 2022년 병의원에 근무하는 의사 인력 9만2570명의 평균 연봉은 3억100만원이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자료를 토대로 동네 의원부터 상급종합병원까지 전체 요양기관에서 근무하는 의사들의 소득을 분석한 자료다. 다만 인턴, 레지던트 등 전공의는 제외됐다. 이 자료에서 의사들의 평균 연봉은 2016년 2억800만원에서 2022년 3억100만원으로 연평균 6.4% 증가했고, 6년 새 44.7% 뛰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023년 보건 통계에 따르면 한국 병의원 봉직의의 연간 임금 소득은 2020년 19만 2749달러(약 2억 6200만원)로 통계가 잡힌 회원국 가운데 1위로 집계됐다.

서울 시내 한 의과대학. 연합뉴스
◆조선에도 N수생은 있었다?

신분 상승의 사다리를 오르기 위해 여러번 과거를 보는 ‘N수생’은 조선에도 있었던 모양이다.

조선 후기로 가면서 과거에만 매달린 채 평생을 보낸 과거 장수생들이 쏟아지면서 사회문제가 된다. 당시 과거 응시에 연령 제한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실제로 조선 후기에 60세 이상 고령자들의 응시자가 많아지자 ‘기로과’(耆老科)라는 특별 과거를 마련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재옥의 책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의 디지털 아카이브와 인적관계망>에 따르면 문과의 최고령 합격자는 고종 27년(1890) ‘기로응제시’(耆老應製試)에 85세로 합격한 정순교(丁洵敎)였다. 최연소 합격자는 고종 3년(1866) 별시 문과에 13세의 나이로 합격한 이건창(李建昌)이었다. 이건창과 정순교의 사례에서 보듯 과거에 대한 도전 시기는 적어도 13세 이전부터 시작돼 합격의 뜻을 이루지 못하면 85세까지 70여 년간 지속되었던 셈이다. 실제로 문과 급제자 중 최고령은 2명으로 90세에 급제한 이들도 있다. 김재봉은 90세에 생원으로 합격하자 철종의 은사로 문과 급제에 이름을 올렸고, 박회규는 70세 이상을 대상으로 하는 기로응제시에서 급제를 했다.

너도나도 과거 시험에 ‘올인’하면서 장원급제자들의 연령도 점점 높아갔다. 지금으로 치면 고시 장수생들이 늘어난 것인데 조선 전기에는 29세에서 후기로 가면 37세까지 늘어난다. 당시 평균 수명을 감안하면 태어나 평생을 과거에만 매달리다 생을 마감하는 이들도 적잖았으리라.

‘아무리 달려도 주변 세계가 함께 달리기 때문에 결국 제자리’라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속 붉은 여왕의 처지가 조선 시대부터 지금까지 한반도 모든 수험생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천종 기자 skyle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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