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가 남긴 발자국을 쫓는 ‘지구프로파일러’ [인터뷰]

조혜정 기자 2024. 5. 26.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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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커뮤니케이터 지구

과학커뮤니케이션은 1980년대 유럽에서 시작했다. 1986년 영국에서 처음 발견된 광우병 파동으로 인해 대중은 과학에 대한 신뢰를 잃었고, 그 즈음 유럽의 과학자들과 지식인들은 어떻게 하면 과학 이슈를 대중에게 더 쉽게 전달할지 고민했고 이러한 배경에서 ‘과학커뮤니케이터’라는 직업이 탄생했다. 국내에서 과학커뮤니케이터를 발굴한 지 10년, 최근 가장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과커 지구씨는 “과학에 대한 관심은 깊이를 떠나 자주 회자되고 대화의 소재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과학커뮤니케이터 지구. 홍기웅기자

지구를 이해하기 위한 학문

영국의 첼튼엄에서는 매년 6월 과학 축제가 열린다. 2002년 시작된 ‘첼튼엄 과학축제’는 과학·수학·공학 분야를 주제로 한 강연 위주로 진행되는데 일주일 남짓한 축제 기간 매일 수십 개의 강연이 열리며, 대중과 과학자 간 소통의 장이 마련된다. 그리고 이 축제에서 세계 최대 과학커뮤니케이터 발굴 대회 페임랩(FameLab)이 열린다.

우리나라에서도 2014년부터 페임랩코리아를 개최하고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주최하고 한국과학창의재단이 주관하는 이 대회는 매년 본선 진출자 10명을 과학커뮤니케이터로 위촉하고 수상자에겐 영국 페임랩 국제대회 참가 및 참관 기회를 제공한다. 과학커뮤니케이터 지구씨도 2021년 페임랩코리아를 통해 과학커뮤니케이터가 됐다. 과학커뮤니케이터로 활동을 시작한 이후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설문을 통해 정해진 활동명 ‘지구’는 어쩌면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지구씨가 다니던 고등학교에선 과학탐구 선택과목 중 물리·화학·생물 등 세 과목만 가르쳤다. 그러던 중 지구씨는 우연히 EBS 인강을 통해 지구과학에 빠졌다.

“공부가 너무 하기 싫은데 하는 척은 해야겠고, EBS 인강을 뒤적이다가 지구과학은 뭘 배우나 보다가 빠져들었습니다. 저는 제가 좋아하는 것만 하는 성향이 아주 강한 편인데, 그날부터 정말 지구과학만 공부했어요. 혼자 문제집 사다가 풀고 모의고사 때도 전교생 500여명 중 저만 지구과학을 선택해 맨날 1등이었죠(웃음).”

그렇게 지구과학에 스며든 지구씨는 대입을 앞두고 하고 싶은 공부와 취업이 잘되는 전공 사이에서 고민했고 후자를 택해 수도권에 있는 공대 토목환경공학과에 진학했다.

“한 학기도 다니지 못하고 자퇴했지만 잠깐 경험한 토목공학은 인간 중심의 학문으로 느껴졌어요. 어떻게 하면 인간이 편한 대로 자연을 변화시키고 발전시킬지를 연구하는 학문 같았죠. 이걸 전공해 평생 직업으로 삼고 싶진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지구씨는 원래 하고 싶었던 공부, 지질학을 택해 강원대에 입학했다. 멀쩡히 잘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지방으로 지질학을 공부하러 가겠다고 하자 주변의 만류는 컸지만 지구씨는 학부 시절 4년이 가장 행복했다고 회상했다.

“통상적으로 지질학이라고 불리는 학문은 사실 지구물리학, 지구화학, 지구생물학 등 여러 학문으로 세분화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중 암석지구화학을 전공했는데요. 암석의 구성 성분을 통해 그 암석이 있던 지역의 역사와 땅을 이해하는 연구를 합니다. 암석을 분석하면 우리가 일기장에 날짜를 적듯이 암석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어떤 환경에서 어떤 작용에 의해 변화를 겪었는지 등을 알 수 있습니다.”

과학커뮤니케이터 지구씨는 2021년 페임랩코리아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지구 제공

기후변화가 만들어 낸 ‘돌’

지구씨의 충남대 대학원 석사 시절 쓰시마섬에 있는 화강암류 및 휘록암 등 암석을 분석, 동해 형성 과정을 연구했다. 돌 연구는 우선 돌을 망치로 깨 샘플을 확보한 다음 두 가지로 분류한다. 첫 번째 샘플은 얇게 저며 현미경으로 보고, 두 번째 샘플은 완전히 갈아 가루로 만들어 최대한 균질한 평균값에 맞춘 후 산(acid)에 여러 과정을 거쳐 녹인다. 납, 아연 등 원소별로 분리해 질량분석기에 넣고 암석을 구성하고 있는 각 원소의 비율을 알아낸다. 이 비율을 알면 암석이 어떤 환경에서 만들어졌는지 파악할 수 있다.

“질량분석기가 개발되기 전까지는 암석 연구 시 얇게 저민 돌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게 전부였습니다. 기초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지구를 연구할 수 있는 폭이 더 넓어지고 지구에 대해 알아낼 수 있는 정보가 더 많아진 거죠. 지질학은 우리가 살고 있는 행성을 알아가는 학문이라는 점에서 꼭 필요한, 그리고 아주 흥미로운 학문입니다.”

지구가 쌓아온 흔적을 통해 지구를 알아가는 학문 지질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주제가 ‘기후변화’다. 지구씨도 암석을 연구하다가 우연히 본 돌 사진 한 장을 계기로 기후변화에 관심을 갖게 됐다.

“저는 웬만한 암석 사진을 보면 무슨 돌인지 이름을 댈 수 있다고 자부하거든요. 나름대로의 재주인데(웃음). 사진 속 돌은 아무리 봐도 뭔지 모르겠더라고요. 알고 보니 플라스틱이 햇빛에 녹았다 굳었다를 반복한 결과물이었어요. 장한나 작가가 진행한 ‘new rock’ 프로젝트 작품이었는데 지질학적으로도 맞는 말이에요. 200년 전에는 있을 수 없는, 현대의 새로운 유형의 돌인 거죠. 이 사진을 계기로 지구를 공부하고 연구하는 내가 그동안 기후변화에 대해 소홀했던 걸 반성했어요. 이건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는 일이라는 판단에 강연 주제로 기후변화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지구씨는 기후변화 대응에 대해 “늦었다 혹은 늦지 않았다고 고민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노력하면 나아질지, 해결될 일일지 고민하기보다는 무조건 해야 하는 행동이라는 것.

“지구 역사에서 생물들이 대량으로 빠른 시간 안에 사라진 것을 ‘대멸종’이라고 합니다. 대부분 기후변화에 의한 것이었는데 지구의 생명체들은 본인이 살던 최적의 환경이 변하면 생존이 힘들어져요. 우리는 지구의 역사를 통해 그 위험성을 알고 있고 더 큰 위기가 오기 전에 해결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해결이 개인의 실천 없이 과학 기술만으로는 불가능해요. 개개인의 텀블러 사용이 당장은 큰 영향력이 없어 보여도 거의 모든 사람이 텀블러를 사용하면 정치인들에겐 환경을 외면할 수 없는 무언의 압박, 상징이 될 겁니다.”

‘실패해도 괜찮은’ 과학

지구씨는 대학원 졸업쯤 천문연구원 홍보팀에 입사했다. 얼핏 행정직으로 과학과는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지구씨는 연구원 홍보팀이 하는 일이 과학커뮤니케이터 역할이라고 말한다.

“천문연구원 연구 성과를 대중에게 쉽게 알리기 위한 굿즈 개발, 유튜브 제작 등이 저의 주요 업무였는데 정말 열심히 했어요. 연구원의 연구 내용을 활용해 2주간 직접 기획하고 밤도 새워 가며 보드게임을 만들었고 지금도 천문연구원 굿즈로 쓰이고 있습니다. 천문연구원에 재직하면서 천문학으로 발을 넓히는 계기가 된 점도 저에겐 큰 수확입니다.”

한편, 지구씨는 우리나라 헌법 127조 1항 ‘국가는 과학기술의 혁신과 정보 및 인력의 개발을 통하여 국민경제의 발전에 노력하여야 한다’는 조항을 언급하며 “‘과학=경제발전’으로 귀결되는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경제발전을 전제로 과학에 접근한다면 ‘블랙홀 연구해 우리나라 경제가 얼마나 좋아지냐’는 질문에 아무도 답하지 못할 거예요. 그런데 관측이 어려운 블랙홀을 연구하려다 보니 잡음은 제거하고 신호는 강하게 하는 방법을 연구하다가 와이파이를 개발하게 됐고 MRI를 만들게 된겁니다. ‘첨단(尖端)’, 즉 지식의 끝에 있는 분야들은 들여다보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미리 가치를 논할 순 없어요. ‘실패해도 괜찮은’ 경제 너머 과학의 가치가 존중되길 바랍니다.”

조혜정 기자 hjcho@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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