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떼루아’가 대체 뭐길래...포도재배 전문회사까지 등장 [전형민의 와인프릭]

전형민 기자(bromin@mk.co.kr) 2024. 5. 25.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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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은 복합적입니다. 그리고 아주 다양합니다. 원료가 되는 포도 과실은 포도나무에서 1년에 1번 생산되는데, 현재까지 밝혀진 포도나무의 종류는 어림잡아 수백가지에 이릅니다. 종류를 나눌만큼 다양한 특성을 보여주고요.

게다가 포도나무는 뛰어난 적응력을 가졌습니다. 위도만 맞는다면 왠만한 곳은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뿌리를 내리죠. 덕분에 사막에서부터 정글까지 다양한 기후와 토양에서 자라 열매를 맺습니다.

이렇게 각기 다른 생장 환경에서 자란 포도들은 당연하게도 개성 넘치는 캐릭터를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양조를 통해 캐릭터는 다시 제각기 다른 느낌으로 변주됩니다. 세상에 수천, 수만 가지의 와인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결국 와인이 가진 고유한 캐릭터는 포도재배(Viticulture)에서부터 양조(oenology)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변수들의 조합이라는 점에서 탐구심을 자극합니다. 알면 알수록, 와인을 마시며 느끼는 캐릭터를 통해 변수를 추론하는 재미가 쏠쏠하죠.

그런데 최근 큰 틀에서 와인 산업의 방향성 변화가 감지되고 있습니다. 과거 와인 메이킹이 균일한 품질의 양품 와인 생산 혹은 양조자의 적극적인 개입을 통한 일률적인 캐릭터의 발현에 중심을 뒀다면, 이제는 떼루아(terroir)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려는 것에 방점이 찍히는 추세입니다.

캘리포니아 매티아슨 와이너리 전경. [전형민 기자]
떼루아가 뭐길래?
와인의 세계에서는 다양한 변수를 통칭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와인을 즐기지 않더라도 한번쯤은 들어봤을 단어, 떼루아입니다. 프랑스어로 토양·땅을 뜻하는 단어지만, 기후와 지형은 물론 농부의 성격과 와인메이커의 철학까지 모두 포괄하는 의미로 쓰입니다.

떼루아를 있는 그대로 표현한다는 것은 그 와인의 원재료가 된 포도, 그리고 그 포도가 자라난 환경을 최종 결과물인 와인에 담아내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떼루아라고 인지하지 못할 뿐, 이미 와인이 아니더라도 그 개념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여름 장마가 짧고 강우량이 적으면, 장마 이후 본격적으로 수확돼 시장에 나오는 과일의 당도가 더 높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나라 일부 지역에서는 장마 시기 비를 덜 맞히기 위해 포도나무 위에 비가림 비닐을 치기도 합니다. 농촌진흥청도 비가 온 후 2~3일이 지나고 나서 과일을 수확하거나, 조생종의 경우 아예 비가 오기 전 일찌감치 수확하는 것을 권장합니다.

토양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떼루아 입니다. 양조학에서는 모래가 많은 토양에서 자란 포도로 양조한 와인은 종종 밝은 산미와 우아한 모습을 보인다고 소개합니다. 토양의 빠른 배수 덕분에 포도나무는 상쾌한 맛과 꽃 향기가 나는 포도가 생산되기 때문입니다.

반면 점토가 풍부한 토양은 충분한 수분을 꾸준히 제공하기 때문에 포도가 견고한 바디감과 잘 갈무리된 탄닌을 지니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특성 덕분에 숙성 기간이 길고 복잡한 풍미가 발달한 와인 생산에 용이한 과실이 맺힙니다.

화산 토양은 와인에 독특한 미네랄 풍미와 미묘한 스모키 캐릭터를 불어넣습니다. 배수가 잘되고 포도에 독특한 복합성을 부여하기 때문에 흙향과 밝은 산미가 있는 와인이 생산됩니다.

포도나무가 자라는 토양의 종류 구분. [vinepair.com]
포도재배 전문 회사의 등장
와이너리들이 떼루아에 집중하게 된 것은 양조 기술의 상향 평준화가 결정적이었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과거 수세기에 걸쳐 오랜 기간 쌓아올린 선조들의 기술과 경험이 와인의 품질을 가르는 주요 요소가 됐다면, 이제는 과학의 발달 앞에서 기술력의 간극이 급격히 줄어들었기 때문입니다.

내 와인과 다른 와인을 차별화할 수 있는 가장 결정적인 무기가 떼루아가 된 것인데요. 여기에 평범함과 익숙함으로 갈무리된 그저 그런 와인보다는 남들과 다른 독특함과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시대적인 분위기와 기후변화 등이 추가로 영향을 미쳤습니다.

아무튼 요즘 와이너리들은 고유의 떼루아를 있는 표현해내기 위해 자신들의 포도밭과 포도재배에 과거보다 더 공을 들이고 있습니다. 과거와 달리 포도재배 만을 전문적으로 관리하는 업체들이 나타난 것도 이런 맥락입니다.

피트 리치먼드(Pete Richmond)씨가 지난 2001년 세운 실버라도파밍컴퍼니(Silverado Farming Company)가 대표적입니다. 미국 내 와인 생산량의 90% 이상을 책임지는 캘리포니아에서 활동하는 실버라도파밍은 미국 서부 해안에서만 30여개 와이너리, 3만 헥타르(㏊)에 해당하는 고객들의 포도밭을 관리합니다.

온다(Onda)와 바소(Vaso)로 우리에게 익숙한 다나 에스테이트(Dana Estates)를 비롯해 오퍼스 원(Opus one), 스택스립 와인셀라(Stags Leap Wine Cellars) 등이 전부 실버라도파밍의 주요 고객입니다.

피트 리치먼드 실버라도파밍컴퍼니 대표. [napagrowers.org]
“최고의 포도밭은 우리의 손이 가장 적게 닿는 곳”
리치먼드씨와의 대화 중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최고의 포도밭에 대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최고의 포도밭은 우리의 손이 가장 적게 닿는 곳, 가장 적은 양의 작업을 하는 곳”이라고 말합니다.

이어 “인위적으로 관개(irregation)를 하게 되면 포도나무가 필요 이상으로 많이 자라서 우리가 좋아하지않는 피망과 같은 녹색 풍미를 얻게 된다”고 덧붙였습니다. 자연 그대로의 상태를 과실에 온전히 전달할 수 있는 방식을 선호한다는 그의 말이 최근 트렌드인 떼루아에 충실한 포도재배와 맥이 닿아있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직접적인 개입을 최소화할 뿐,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최첨단 기술을 활용한 데이터 센서를 포도밭 곳곳에 설치하고 아주 세심하게 포도밭의 상태를 모니터합니다. 심지어 포도밭에 불어닥치는 바람까지도 측정해 데이터화한다고 합니다. 바람에 의해 포도나무가 흔들리면서 받는 일정량의 스트레스까지 측정해 활용하는 겁니다.

캘리포니아에서만 사용하는 특이한 방식의 포도재배 방식에 대한 소개도 있었습니다. 천혜의 자연환경과 절정의 지력(地力) 덕분에 가능한 방법인데요. 첫 열매가 모양을 갖추는 시기인 6월 무렵 맺힌 포도송이를 전부 잘라버리는 겁니다.

첫 과실을 모두 잃은 포도나무는 짧은 기간 동안 열매를 맺기 위해 전보다 더 과실에 에너지를 집중하게 되고, 그 결과 훨씬 고품질의 포도송이를 생산하게 된다고 합니다.

4~5월 개화(Floraison)를 시작하는 포도 열매. 열매가 영글기 시작하고 영근 열매의 색이 변하는 베레종(Veraison)이 오기 전 포도를 잘라내기도 한다. [출처 미상]
변화하는 와인 트렌드, 전망은?
리치먼드씨의 실버라도파밍은 설립 6년차인 2006년부터 총 수익의 1%를 위험에 처한 청소년과 농업 노동자를 위한 사업에 지원하는 ‘지역사회를 위한 1%’ 프로그램을 시행하는 등 지속가능한(Sustainability) 와인 생산에도 앞장서고 있습니다.

또한 실버라도파밍 역시 직전 와인프릭에서 언급했던 더튼 랜치(Dutten ranch)와 마찬가지로 미국 정부와 협력한 특별 비자 프로그램을 운영합니다. 아울러 이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가족을 위한 주택과 의료서비스, 교육, 보육 서비스 역시 함께 제공하고 있습니다.

한편 실버라도파밍의 고객은 갈수록 늘어가는 추세입니다. 실버라도파밍 측에 따르면, 지난해와 올해의 경우 이미 시즌이 시작하기 전부터 회사가 관리할 수 있는 수준 이상의 요청이 있었다고 합니다.

전문성을 인정받았다는 방증이자, 와인 메이킹의 트렌드가 변하고 있다는 뜻으로 비춰집니다. 리치먼드씨는 “20년 전 캘리포니아에서 포도재배 전문 회사는 실버라도파밍이 유일했지만, 이제는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고 귀띔했습니다.

관건은 여전히 세계 시장을 주름잡는 한 축이자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유럽의 유명 와이너리들도 전문 포도재배 회사에 포도밭 관리를 맡기는 날이 올지 여부입니다.

변화하는 트렌드에 맞춰 전문화가 시작된 미국 와인의 품질이 갈수록 좋아지고 있다는 면에서, 가까운 미래 와인 산업의 패러다임 변화를 지켜보는 것도 관전 포인트가 될 전망입니다.

*이번 주 와인프릭은 지난달 한국을 방문했던 피트 리치먼드와의 인터뷰를 토대로 작성했습니다. 귀한 시간과 경험을 기꺼이 내준 리치먼드씨에게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와인은 시간이 빚어내는 술입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와인의 역사도 시작됐습니다. 그만큼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데요. WSET(Wine & Spirit Education Trust) 국제공인레벨을 보유한 기자가 재미있고 맛있는 와인 이야기를 풀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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