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기의 미다시] 책임지지 않는 말들

이슬기 전 서울신문 기자 2024. 5. 25.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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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기의 미다시 (미디어 다시 읽기)]

[미디어오늘 이슬기 전 서울신문 기자]

▲ 강남역 인근 건물 옥상에서 여자친구를 흉기로 살해한 혐의(살인)를 받는 20대 의대생이 5월8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고 있다. ⓒ 연합뉴스

고백건대 가장 쉽고 만만한 취재 기법은 '신상 털기'다. 온라인 공간에 개인의 신상 정보가 지나치리만큼 많이 노출된 시대이기 때문이다. 검색 몇 번이면 특정 인물의 나이, 거주지, 출신 학교, 직장 뿐만 아니라 소셜미디어에 올린 글이나 사진, 공유 글 등을 찾을 수 있다. '털기'에 포함된 부정적 어감을 차치하고라도, 개인 신상에 관한 취재는 '베이직'이다. 공직자 후보 검증이나 사건 보도를 준비할 때 가장 먼저 시도하는 '기초 조사'다.

다음은 '반응' 기사다. 사건사고가 벌어졌을 때 발생지에서 주변 탐문을 하는 것은 경찰이나 기자나 매한가지다. 꼭 현장이 아니더라도 사건 관계자의 소셜미디어 계정을 찾았다면 거기서 눈에 띄는 가족이나 친구, 지인 등에게 연락을 취해볼 수도 있다. 운 좋게 사건 당사자와 특별한 친분을 갖고 있는 이를 만난다면 사건 내막을 들을 수도 있다. 사회적 반향이 있는 사건이라면 온라인 커뮤니티, 소셜미디어 상의 반응을 모아 기사 한 꼭지를 따로 쓰기도 한다. 신상 털기에 이어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취재 과정이다.

지난 6일 서울 강남역 인근의 건물 옥상에서 발생한 교제살인 사건에 대한 언론보도도 이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가해자 A씨가 의대생이라는 것에 이어 '수능 만점' 얘기까지 개인 신상에 관한 기사부터 먼저 보도됐다. 이에 아예 사건을 '교제살인' 대신 '의대생 살인'으로 제목에 명명한 매체도 생겨났다.

강남역 교제살인 사건은 결별을 통보한 여자친구를 남성이 살해한, 전형적인 교제폭력 사건이다. 가해자가 '수능 만점 출신의 의대생'이라는 사실은, 사람들의 주목도를 높이는 요인은 됐다. 그러나 이는 곧 가십으로 소비돼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로 이어졌다. 언론을 통해 가해자 신상 정보가 하나둘 노출된 이후, 소셜미디어 상에는 피해자의 신상도 함께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오죽하면 지난 9일 경찰이 가해자의 신상을 공개하지 않기로 결정한 이유는, 이같은 상황에서 벌어질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를 우려해서였다.

게다가 이는 사건을 '교제살인'이라는 젠더폭력 사건을 '의대생'이라는 엘리트 개인의 일로 환원시키는 나쁜 결과를 낳았다. 교제살인 등을 통칭하는 교제폭력이라는 말은 '데이트 폭력'이 범죄의 심각성을 희석한다는 지적에 따라 몇몇 언론에 이어 작년서부터는 대검찰청도 공식적으로 쓰기 시작한 용어다. 그만큼 젠더폭력의 엄중함과 특수성을 사회적으로 주지시키기 위해 주의 깊게 용어를 고른 보람이 '의대생 살인'이라는 명명 앞에 무색해졌다.

뒤이어 등장한 '반응' 기사들에도, 독자가 알아야 할 정보와 그렇지 않은 정보를 가르는 기사 작성자의 고민은 보이지 않았다. 한국일보의 9일자 기사 <여친 살해 의대생 "계획 범죄 맞다" 시인>에는 피의자의 초중고교 동창, 후배 등 지인 8명으로부터 전해 들은 그의 평소 행적이 적혀 있다. 취재원이 많고 두 문단에 걸쳐 꽤 많은 분량을 할애한 것 치고, 기사에 들어간 그들 반응은 예상 가능한 범주다. “이런 일이 발생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동창들 모두 충격을 받은 상태”, “전형적인 '모범생'” 등이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사실은 평범했다'이다.

비슷한 일을 우리는 2020년 텔레그램 N번방 성착취 사건 당시 겪었다. 당시 언론에 의해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의 평소 행실 등이 적극 조명됐고, 성착취범에게 붙은 '평범', '성실'이라는 수식에 많은 이들이 분노를 표했다. '그럴 사람이 아닌데' 라는 식으로 개인적 서사를 펼쳐 보이는 일은, 가해자에 온정적인 여론을 조성하거나, 피해자를 더욱 궁지에 몰리게 할 위험성을 갖기 때문이다.

▲ 2020년 3월 23일 SBS 8뉴스 갈무리. SBS는 이날 텔레그램 성착취 가해자 중 한명으로 검거된 피의자 조주빈 신상을 경찰 신상공개위원회 결정에 앞서 단독보도했다.

이후 시민 반응을 담은 세태 기사에서도 부적절한 행태가 나타났다. 조선일보는 18일자 <“헤어지고 싶으면 미친 척해” “중매결혼 어때” 불안한 엄빠들>에서 잇단 교제폭력 사건에 대처하는 부모들의 자세를 다뤘다. 딸에게는 '안전 이별'을 교육하고, 아들은 “여자와 안 얽히는 게 상책”이라며 단속하는 식이다. 아들 부모들 사이에서는 “학교도 사회도 너무 여자애들 편만 들어준다”는 불만이 팽배하다는 이야기도 들어갔다. 자식들에게 흉흉한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임을 감안하더라도, '여자와 얽히지 말라'며 일종의 '펜스룰'을 아들에게 주지시키고 여성 혐오를 조장하는 행태를 언론에서 고스란히 다루는 것은 문제적이다. 굳이 다뤘어야 했다면, 전문가 멘트를 통해 잘못된 시각을 비판하는 부연이라도 했어야 했다. 천태만상, 혹은 세태 기사를 자처하는 듯 보이는 해당 기사는 이러한 보정조차 하지 않았다.

기자는 아는 것 모두를 보도하는 존재가 아니다. 하고 많은 '팩트' 가운데 일부분을 취사 선택 했다면, 왜 그것을 보도했는지에 관한 미디어 수용자의 추궁에도 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앎은 누구에게 소용이 있으며, 과연 공익적인 가치를 띠고 있는가. 그 보도로 인한 파장은 과연 기자가 책임질 수 있는 영역의 것인가. 교제살인 사건이 '의대생 살인'이라는 가십으로 변질되고, 피해자 유족들이 2차 가해를 우려하는 현 상황에서 언론은 과연 아무 잘못이 없는가.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말들이, 아직도 기사에 너무 많다. 이것이 '강남역 살인사건' 8주기를 맞는 우리의 현주소라니, 씁쓸함을 넘어선 분노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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