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장하는 日 포경…사방팔방 뛰어 놀던 한반도 고래는 어디에 [일본 속 한국문화재]

강구열 2024. 5. 25.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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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경은 일본 전통의 산물” VS “비인도적 관행”

일본 정부가 포경을 할 수 있는 고래 1종을 추가하기로 했다. 지금은 밍크고래, 브라이드고래, 정어리고래 3종만 잡을 수 있는데, 참고래도 포경이 가능하도록 하겠다는 방침이다. 정식 결정은 7월에 나올 예정이다.  

최근 새로 진수한 일본 포경선 ‘간게이마루’.
 
최근 새로운 포경선 ‘간게이마루’가 진수식을 마쳤다. 9300t에 달하는 대형 포경선으로 고래를 잡아 바로 가공까지 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춘 배다. 영해, 배타적경제수역(EEZ)에서 하던 일본 포경이 남극에까지 진출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국제사회, 환경단체들이 비판에 나섰다. 세계고래류연맹(WCA)은 “상업 포경은 정당화될 수 없다. 순전히 소수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비인도적인 관행이다”라고 지적했다. 해양 환경단체 ‘핫핑크돌핀스’는 “참고래는 1986년 국제포경위원회가 상업 포경 전면 유예를 시행할 때까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희생된 종이고 아직도 멸종위기 취약종”이라고 규탄했다. 

일본 정부 대변인인 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장관은 “일본 전통의 음식문화 계승이 중요하다”고 대응했다. 포경은 일본 전통 문화의 산물이니외부에서 왈가왈부할 게 아니라는 주장이다. 일본포경협회에 따르면 일본에서는 조몬시대(서기전 1만4000년~300년전)부터 고래고기를 식재료로 활용했다. 아스카시대(6∼8세기)에 불교가 전래된 뒤 육식이 금지되자 동물성 단백질 공급원으로 중시됐다. 에도시대(17∼19세기)에는 조직적 포경이 시작돼 고래고기 식용이 관습화됐다. 2차 대전 이후 식량난이 심해지자 고래고기는 싸고 영양가 있는 식재료로 서민들의 식생활에 자리잡았다고 한다. 1962년까지 일본인 1인당 식육공급량에서 고래고기는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가 많았다. 

일본은 국제포경위원회(IWC)가 1982년 상업포경을 금지하자 1988년 같은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2019년 IWC를 탈퇴한 뒤 포경을 재개했다. 고래고기 소비량은 1962년 23만t으로 정점을 찍은 뒤 점차 줄어 최근엔 2000t 정도다. 일본 정부는 올해 51억엔(약 448억원)의 예산을 책정해 학교급식에 고래고기 이용, 포경업자 판매 촉진 등을 지원할 계획이다.  

◆일제의 포경, 한반도 고래 씨를 말리다

포경대상 확대 소식이 전해지자 핫핑크돌핀스는 “참고래는 한반도 해역에서 살아가거나 회유하는 종”이라며 “참고래 포경이 시행되면 한반도 해역에 얼마 남지 않은 참고래까지 사냥 대상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일본의 포경이 한반도 바다의 고래 생태계에 악영향을 줄 것이란 주장이다. 

실제 그런 적이 있었다. 나쁜 영향 정도가 아니라 고래의 씨를 말렸다, 고 할 정도로 남획됐다. 일제강점기였다. 

최근 새로 번역, 출간된 한국수산지.
일제가 1908∼1911년 한반도 수산물, 어업현황 등을 조사해 간행한 ‘한국수산지’에 남획의 실상이 담겨 있다. 당시 한반도에 거점을 두고 포경을 한 회사는 동양어업주식회사, 장기포경합자회사, 일한포경합자회사 3곳이었다고 한다. 이들이 1903∼1908년 5년간 잡은 고래가 1612마리였다.

한반도 바다에 진출한 일본 어민들은 초보적인 어법으로 수자원의 극히 일부만을 잡던 한반도 어업계를 비웃으며 선진 기술로 상당한 어획고를 올린다고 자랑했다. 그 결과 일부 어종은 멸종하다시피 했다. 귀신고래가 대표적인 경우다. 해안가에 가깝게 살며 암초가 많은 곳에서 귀신같이 출몰한다고 해 특이한 이름을 갖게 된 이 고래는 겨울에는 한반도, 일본 앞 바다에서 번식하고 여름에는 먹이를 찾아 오츠크해 북단으로 이동한다. 귀신고래가 새끼를 낳기 위해 이동하는 경로에 속하는 울산 인근 바다가 ‘울산 귀신고래 회유 해면’이란 이름으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천연기념물 ‘울산 귀신고래 회유해면’. 국가유산청 
◆반구대 암각화, ‘고래 천국’의 가장 오래된 증거 

지금 우리에게 한반도 바다의 고래는 익숙하지 않다. 가끔 그물에 걸려 죽은 고래가 발견됐다는 게 뉴스가 된다는 건 그만큼 희귀한 존재라는 의미다. 하지만 고래가 넘쳐나던 때가 있었다. 

“많은 고래들이 보인다. 수많은 혹등고래와 대왕고래, 참고래, 긴수염고래가 사방팔방에서 뛰어 논다. 셀 수조차 없다.”

1840년대 한반도 바다에서 조업 중이던 미국 포경선의 작업 일지 중 일부다. 이들이 본 풍경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제는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이런 모습을 가장 오래, 가장 분명하게 전하는 것이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국보)다. 공식적으로는 신석기시대, 학자에 따라서는 구석기시대의 유물로도 보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최초의 바위그림’, ‘한국 문화예술의 원형’, ‘문화재의 맏형’ 등으로도 불린다.  

국보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전경. 국가유산청
 
반구대 암각화 고래 그림 전체.
 
1971년 12월 25일, 반구대 암각화는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세상에 알려졌다. 연구자들의 눈을 휘둥그레하게 한 반구대 암각화에는 호랑이, 사슴, 멧돼지, 거북이, 상어 등이 새겨져 있어 표현 대상이 풍부하지만 양으로나 질로나 고래가 최고다. 307점의 표현물 중 53점이 고래다. 한반도 바다와 고래의 길고, 질기며 풍성했던 인연을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다.

종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고래를 사실적으로 표현한 게 두드러진 특징이다. 각 그림이 어떤 고래를 표현한 것인가에 대해선 연구자마다 차이가 있긴 하지만 주요한 몇 가지를 살펴보자. 

귀신고래는 목 아래쪽부터 가슴지느러미에 못미치는 부위까지 1∼2m 정도의 2∼5개 주름이 있는 게 특징이다. 

반구대 암각화 고래 그림과 귀신고래.
고래하면 연상하는 물을 공중으로 뿜는 모습을 표현한 것도 있다. 세 마리의 고래를 나란히 세워 치솟는 물줄기를 V자형으로 그렸다. 북방긴수염고래로 추정된다. 
반구대 암각화 고래 그림과 북방긴수염고래.
반구대 암각화 고래 중 가장 큰 것은 길이 80㎝의 아래 그림이다. 배를 드러내고 뒤집혀 있고, 운동감이 느껴지지 않아 사냥 후의 모습을 그린 게 아닌가 추측된다. 혹등고래와 가깝다고 한다. 
반구대 암각화 고래 그림과 혹등고래.
인기가 가장 높은 범고래도 있다. 몸통에 반점 같은 걸 표시한 게 결정적이다. 직각으로 뾰족하게 세운 등지느러미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반구대 암각화 고래 그림과 범고래.
고래 그림 부분을 전체적으로 조망해 선사인들이 반구대 암각화를 조성한 이유를 추론하기도 한다. 여기선 가마우지, 거북, 사람이 고래 무리와 세트다.  
반구대 암각화에 표현된 거북이, 새, 샤먼.
중심은 물론 고래 무리다. 머리를 상단으로 두어 같은 방향성을 표현했고, 작살이 등에 박힌 고래가 있다. 거북이 세마리가 있는데 선두에서 고래 무리를 선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고래를 호위하듯 날고 있는 새 두마리도 있다. 가장 아래에 사지를 잔뜩 벌리고, 손과 발이 과장된 형상의 사람이 표현돼 있다.  

고래의 영혼이 하늘로 향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이 해석에 따르면 거북이, 새는 죽은 고래를 이승에서 저승으로 인도하는 존재다. 육지와 바다, 하늘을 오가는 능력을 가진 것에 주목한 것이다. 사람은 샤먼으로 볼 수 있다. 손과 발이 유별나게 표현된 ‘수족과장형’은 해외 암각화에서도 하늘과 교신하는 존재로 해석된다. 종합하면 반구대 암각화는 고래의 죽음에 대한 애도, 귀천(歸天)에의 희망, 회생의 기원을 담은 그림이다. 풍부한 식량원으로서 생명을 담보해 준 고래가 새로운 육신으로 재생해 번식하고, 그것이 다시 자신들의 풍요로 이어지길 바란 한반도 선사인들의 염원의 표현이 반구대암각화일지 모른다. 

도쿄=강구열 특파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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