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염성을 가진 아우슈비츠의 악의

오동진 영화평론가 2024. 5. 25. 13:59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영화, 시대를 넘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

지난 해인 2023년 제77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2024년 제96회 아카데미 영화상 국제장편영화상 등 수많은 해외 영화상을 수상하며 극도의 관심을 불러 일으킨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번역하면 이득 구역, 취득 구역이 된다. 아우슈비츠 주변 강제노역과 학살이 자행됐던 수용소 구역을 의미한다. 영화는 학살의 정면이 아니라 만행의 이면을 보여 주며 역설적으로 집단 학살의 잔인성을 극대화한다. 악은 직접 목도하면 평범할 수 있지만(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그 이면을 상상하는 것은 엄청난 공포의 전율을 일으킨다.

악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따위'의 말은 수사학에 불과하다. 악은 분명 존재하는데 그것도 매우 비범하고, 철저하게 계획적이며, 정교한 설계에 의해서 구현된다. 끔찍하다. 인간이 인간에게 자행할 수 있는 폭력은 나와는 무관하다는, 이건 다 필요에 의해서 진행되는 관료적 절차에 불과하다는 무심함에 의해 극단화 된다. 이런 악, 이런 악행은 소멸되지 않는다.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에게 저질러진 학살의 만행을 이제 다시 가자 지구에서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인에게 자행하고 있다. 역설적으로 그건 악의 본질이 순수하기 때문이다. 악은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순결하게 전이되고 언젠가 또 다시 그 위치를 바꿀 뿐이다.

루돌프 회스 중령(크리스티안 프리델)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장이다. 그는 철조망 바로 바깥 소장 관사에서 생활한다. 관사는 매우 정갈한 주택이다. 아이 넷을 키우며 하인 여러 명을 데리고 살아 가는 중령의 아내 헤드비히 회스(산드라 휠러)는 더할 나위없이 행복하다. 정원은 장미패랭이 같은 온갖 꽃으로 꾸며져 있고 수영 풀이 있고 햇살이 가득하다. 이들이 키우는 검은 개가 집안 곳곳, 정원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가족을 즐겁게 한다. 개조차 너무 행복한 상류층 가정. 담 바깥, 수용소 안에서는 종종 총기 소리가 들리고, 고함과 비명 소리가 넘어 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담 저쪽의 일일 뿐이다. 헤드비히는 그런 것 따위 관심이 없다. 그저 총통과 국가지도자 급인 하인리히 힘러 등 국가 최고위층이 남편의 공로를 인정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 수용소 사택에서 자신들이 안락한 삶을 영위할 수 있게끔 해주면 된다고 생각한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 ⓒ더콘텐츠온

이 부부의 갈등은 루돌프 회스가 다른 곳, 오라니엔부르크로 전출이 결정되면서 터져 나온다. 헤드비히는 남편에게 자신은 절대 이곳을 떠날 수 없다며 위에다 어떻게든 얘기를 해서 남편만 근무지를 옮기게 해달라 말하라고 한다. 루돌프는 그런 아내를 경멸하면서도 자신이 희생하기로 한다. 담 너머 유대인들이 어떤 희생을 당하는지는 관심 밖이다. 자신이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것은 매우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무지와 무관심, 이기의 극치야 말로 나치 시대에 만들어진 악의 실체적 진실이다.

루돌프가 퇴근하면 그의 군화는 늘 피로 물들어 있다. 사택 주변의 노역자들은 하녀들에게 그날 그날의 취득물을 갖다 주는데 거기엔 각종 드레스와 밍크 코트들이 있다. 이들이 호의호식하는 것은 모두 다 징발로 구성되는 것이며 그런 옷과 보석, 화장품을 쓰면서도 여자들은 한치의 후회나 거리낌 같은 것이 없다. 그건 그냥 당연한 일이다. 하녀 중 한 명이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면 "너 따위 남편에게 말해서 쥐도 새도 모르게 재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고 헤드비히는 말 한다. 이쯤이면 훗날 역사의 죄를 물어 이런 악마들을 처형해도 청산은 부족하다 생각하게 된다. 악이 가장 무서운 것은 그걸 목격한 사람을 스스럼없이 잔인하게 만들고, 스스로 인간성을 마모하는 데 있어 주저하기 않게 한다는 점이다. 이 영화는 사람들에게 내면의 폭력을 불러 일으킨다.

영화는. 예상하듯이 매우 정적이고 조용하며 평온하게, 그래서 꽤나 지루한 톤으로 진행된다. 특히나 오프닝이 매우 인상적인데 'Zone of Interest'라는 제목이 사라지면 약 1분40초에서 4분10초까지 2분 반 동안 암전이 이어진다. 검은 화면에 음악만 깔린다. 인간이 지루함을 견뎌 낼 수 있는 최고의 시간은 1분 반이다. 그래서 대부분 방송 뉴스 리포트의 시간이 1분 반이다.

영화를 만든 조나단 글레이저는 이 지루함을 인간이 추구하는 착시 행복이라고 말하려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행복은 재미있지가 않다. 지루하다. 시간이 느리게 간다. 암전 직후 루돌프 가족이 강가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장면도 롱 쇼트 롱 테이크이다. 1분 넘게 카메라는 고정된 채 이들 가족의 단란한 모습을 지켜 본다. 사택으로 돌아 오는 길에 어디선가 총소리가 들리긴 하지만 가족은 오늘 하루를 편안하면서도 다소 심심하게 보내고 돌아오는 길이다. 행복은 다이내믹하지 않고 복잡다단하지 않다. 요란한 상황은 불행한 생활의 기초이다.

ⓒ더콘텐츠온

루돌프 중령이 두 명의 사업가와 소각장 건물의 설계도를 놓고 회의하는 장면은 아연실색할 정도이다. 이들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효율적이면서도 효과적으로, 한번에 가장 많은 수를 처리하고 소각할 수 있는지 그 과학적 설계에만 모아져 있다. 인간의 죽음은 이들의 관심 영역 저 건너편에 있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는 아우슈비츠 가스실과 소각장이 어떤 악마들에 의해 설계되고 만들어졌는지 그 실체를 알린다.

영화는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또 앞으로 오랜 시간이 더 지나갈 것임에도 인간이 자신의 이해 관계, 자신만의 이기적 행복 추구를 위해 얼마나 악랄해질 수 있는가에 대해 저 마음 속 깊은 곳에 격랑을 만들어 낸다. 단 한 컷도 잔인한 장면을 사용하지 않는다. 불협화음의 기괴한 음향과 담 너머의 웅성거림, 비명과 고함만으로 1943년 아우슈비츠의 현장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느끼게 만든다. 이 영화에 제36회 유럽영화상이 왜 음향상을 주었는지, 아카데미도 왜 음향상을 주었는지, 골든글로브는 왜 음악상을 주었는지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영화는 빛과 소리의 예술이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빛(시각과 시선)을 차단하거나 절제하고 소리(음악과 음향)를 극대화함으로써 오히려 자신이 전달하려는 주제의 심층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음을 보여 준 작품이다. 실로 대단한 위업이다. 기술적으로 그렇고 예술적으로 그러하며 더 나아가 영화가 역사적 정의에 얼마나 크게 복무해 낼 수 있는가를 증명해 냈다는 점에 그렇다. 이 작품은 한동안, 한 시대만큼은 길이 남을 영화이다. 홀로코스트 영화가 선언적인 데서 그치지 않고 예술과 미학으로 그 정치성을 최대로 표현해 냈다는 점에서도 큰 평가를 내리지 않을 수 없는 작품이다. 조폭과 막장 드라마에 치중된 한국 영화계가 상대적으로 암울해 보일 정도이다.

ⓒ더콘텐츠온

[오동진 영화평론가]

Copyright © 프레시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