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까지 넣는다’ 보태니컬 아티스트 송은영의 가방 속에는?[왓츠인마이백⑪]

이유진 기자 2024. 5. 25. 12:0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보태니컬 아트는 식물과 꽃의 세밀한 관찰은 물론 예술적 영감까지 불어넣는, 온전히 영혼을 갈아야 피어오르는 그림이다. 정지윤 선임기자

한 시간을 꼬박 들여야 겨우 엄지손톱만 한 면적을 완성하는 그림이 있다. 국내에서는 다소 생소할 수 있지만 유럽에서는 마니아층이 견고한 보태니컬 아트다. 보태니컬 아트는 식물, 꽃 등을 자세히 관찰하고 섬세하게 묘사해낸 세밀화로 예술적 영감까지 불어넣어 ‘식물도감’이 아닌 ‘아트’라고 부른다.

한국인 최초로 영국 식물예술가협회(The Society of Botanical Artists)의 정회원(SBA Fellow) 자격을 받은 송은영 작가는 5월의 꽃과 식물을 화폭에 담기 위해 오늘도 특별한 가방을 멘다.

송은영 작가의 대표작 <리콜라이 극락조화>(78.7x106.7cm 색연필화)를 합성한 이미지. 정지윤 선임기자

엔지니어, 화가가 되다

송 작가는 한 번 작업대에 앉으면 6~7시간은 꼬박 그림을 그린다. 그는 영화 <올드보이>의 오대수(최민식)처럼 독방에 갇혀도 음식만 제공받는다면 몇날 며칠이고 만족스럽게 그림 그리며 지낼 수 있다고 자부한다. 보태니컬 아트는 고도의 집중력과 인내가 필요하다 보니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성향이 맞지 않으면 도전할 수 없는 분야다.

송 작가는 그림을 전공하지 않았다. 국내 유명 컴퓨터회사에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일하던 그가 보태니컬 아트에 입문한 건 13년 전 취미로 접하면서부터다.

“당구에 처음 빠지면 자려고 누워도 천장이 사각 당구대로 보이는 것처럼, 제게 보태니컬 아트가 그랬어요. 내일은 어느 부분을 어떻게 그릴지 떠올리면 이불 속에서 가슴이 뛰었어요. ‘아! 드디어 할머니가 되어도 평생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죠.”

컴퓨터 프로그래밍과 보태니컬 아트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지만 의외로 비슷한 점이 많단다. 프로그램을 짤 때 필요한 논리와 수학적 사고가 보태니컬 아트에도 적용된다. 그는 실존하는 식물 그림에 ‘논리’가 빠지면 보기 어색해진다고 말한다.

“해바라기나 데이지 같은 중심부가 있는 관상화(통꽃)를 들여다보면 마치 피보나치수열을 보는 듯해요. 식물 잎의 세포 하나하나가 수열로 이뤄져 있고 잎이 무게에 의해 휘어지는 각도도 모두 논리가 있어야 자연스러운 그림이 되죠.”

송은영 작가의 보태니컬 아트 작품들. <꽃양배추>(종이에 색연필), <하와이 무궁화>(종이에 펜과 잉크), <은방울꽃>(종이에 펜과 잉크), <왕대>(종이에 연필)(왼쪽부터 시계방향).

아무리 복잡한 그림이라도 인공지능(AI)이 몇초 만에 완성해내는 시대다. 송 작가는 손바닥만 한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 데 수개월이 걸리는 그의 작업을 흔들림 없이 이어갈 수 있을까.

“위기감이나 상실감은 없어요. 인공지능이 발전할수록 사람들은 아날로그 감성이 주는 매력을 찾을 거라 생각해요. 그럴수록 저는 더 옛것을 찾는 방향으로 걸어 나갈 거예요. 요즘은 14세기 유럽에서 행했던 판화 기법인 메조틴트 방식으로 식물을 그리는 작업에 푹 빠져 있어요.”

송 작가는 식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인생을 배웠다고 말한다. 그는 일명 ‘목동 키즈’로 자라며 남들처럼 치열한 입시전쟁을 거쳐 대기업에 입사해 일해왔다. 식물을 알고부터 물질이 주는 기쁨보다 더 행복해지는 법을 알았다.

“이 친구(식물)들은 인간의 생애보다 더 극단적으로 사계절을 겪어요. 그림을 그리기 전까지는 새싹이나 꽃봉오리가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했어요. 아이리스가 만개한 모습뿐 아니라 진액을 뿜어내며 바스러지는 모습까지 그리다 보면 결국 생애 모든 순간이 아름답다는 걸 알게 되더라고요. 소소한 행복을 찾아내며 늙어가는 제 모습도 기대가 많이 돼요.”

송 작가의 ‘출사 가방’에는 창작을 도와줄 ‘친구들’을 관찰하기 위한 용품으로 가득하다. 정지윤 선임기자

송은영 작가의 가방 속에는?

다양한 물건을 넣고 다니는 ‘출사 가방’은 무조건 가볍고 양손이 자유로운 백팩이어야 한다. 송 작가는 최대한 얇고 가벼운 천으로 된 배낭을 메고 ‘친구’라고 칭하는 식물들을 만나러 간다.

그는 늘 세 권의 노트를 가지고 다닌다. 각각 스케치용과 아이디어 기록용이고 나머지 하나는 예쁜 낙엽을 발견하면 부서지지 않고 집에 가져올 수 있도록 담는 보관용 노트다. 식물을 관찰하다 스케치를 하려면 길바닥에 털썩 앉아야 하는 경우가 허다해 휴대용 미니 방석도 늘 가방에 챙긴다. “가을에 집 앞 공원으로 출사를 나갔는데 양버즘나무 잎사귀가 너무 예쁜 거예요. ‘너도 이쁘다’ ‘쟤도 이쁘다’ 어떤 놈은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그려보기도 하고… 양손에 낙엽을 쥐고 신나서 돌아다녔어요. 모르는 분들이 보면 ‘미친 사람’으로 오해하기 딱 좋은 풍경이죠.”

작업하다 손을 자주 씻다 보니 핸드크림도 필수다. 야외 활동이 많아 눈을 보호해야 하는 선글라스도 항상 갖고 다닌다. 세밀한 작업을 하다 보면 눈을 과도하게 쓰기 마련이다. 눈의 피로를 덜어주는 찜질용 안대와 눈 기름샘 청소를 위한 안구 세안제도 없으면 안 되는 아이템이다. 식물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한 루페(확대경)도 잊어서는 안 된다.

눈뿐 아니라 작업에 직결되는 부위를 보호하는 손목보호대도 필수다. 장바구니를 들거나 힘을 써야 할 때는 꼭 보호 밴드를 착용한다. 오랜 시간 앉아서 작업하니 통증의학과, 정형외과는 제집처럼 드나들 수밖에 없다. ‘무조건 쉬라’는 의사의 권고는 실천이 불가능한 일이니, 일주일에 필라테스 두 번, 개인 PT 세 번 등 틈나는 대로 운동으로 몸을 추스른다.

송 작가는 지난 13년간 그린 그림으로 55평 갤러리를 가득 채워 최근 개인전을 열었다. 내년에는 보태니컬 아트의 본고장인 프랑스 남부 한 호텔의 초청을 받아 워크숍을 진행하기로 했다. 그의 꿈인 ‘행복한 할머니’가 되기 위한 발걸음을 순조롭게 내딛는 중이다.

이유진 기자 8823@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