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아이 몸뚱이 부여잡은 엄마...광기의 시대, 그녀는 더이상 두려울 게 없었다 [나를 그린 화가들]

정유정 기자(utoori@mk.co.kr) 2024. 5. 25.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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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테 콜비츠, ‘자화상’, 1924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피에타’를 본 사람 중 감탄하지 않은 이들은 없을 것 같습니다. 성모 마리아가 죽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안고 슬퍼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조각이죠. 대리석에 인체와 옷 주름을 섬세하고 정교하게 표현한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피에타’, 1498~1499
그런데 이 피에타 도상을 따와 자신의 이야기를 한 작가가 있습니다. 전쟁으로 아들을 잃은 어머니 케테 콜비츠입니다.
케테 콜비츠, ‘피에타’, 1936년 또는 1937년 완성된 것으로 추정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심정을 감히 헤아릴 수는 없지만 이 작품에는 비통함이 묻어나옵니다. 그래서인지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보고 탄성을 지른 사람들이 많다면, 케테의 ‘피에타’를 보고 눈물을 흘린 이들이 많다고 합니다. 미켈란젤로가 성모 마리아를 절제된 모습으로 표현해 경건함과 숭고미를 극대화했다면, 케테는 너무나 인간적인 방식으로 아들을 떠나보낸 슬픔을 보여줬습니다. 등이 굽은 늙은 여성이 아들을 품 안에 안은 채 울음을 삼키는 듯한 모습으로 말이죠.

케테는 아들을 잃은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전쟁에 반대하는 작품을 만들며 일생을 보냈습니다. 미술사 연구가 카테리네 크라머는 그의 작품을 ‘함께 울고, 함께 느끼며, 함께 싸우고, 어려움도 함께 한다’고 평가했습니다. 케테는 조각을 만들 때 아들이 생각나면 울고 또 울었다고 고백하죠. 이번 연재에서는 어머니의 심정으로 전쟁의 참담함을 고발한 케테의 삶과 작품 세계를 살펴보겠습니다.

소외된 사람들에 집중한 케테
독일의 영화 감독 빔 벤더스는 ‘인생은 컬러지만 흑백이 더 현실적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컬러 영화 시대에 그가 제작한 흑백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는 서독과 동독으로 분단된 베를린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보여주죠. 벤더스보다 먼저 베를린에서 살았던 케테도 아마 그 의견에 동의했을 것 같습니다.

케테는 원래 유화를 공부했지만, 흑백으로 된 판화를 중심으로 작품 활동을 했습니다. 추상주의보다는 사실주의를, 순수 예술 대신 참여 예술을 선택했습니다. 케테의 관심 대상은 산업화 속 병들고 소외된 이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색채화는 심미적 목적을 달성하는 데 의미가 있지만 당시 대중에게 극히 제한됐습니다. 궁전이나 박물관에 가야만 볼 수 있었습니다. 반면 판화는 같은 작품을 수백 점씩 손쉽게 찍어낼 수 있어 누구나 접근할 수 있었죠. 검은색, 회색, 백색으로 인간의 아픔과 슬픔과 어둠을 표출해내는 판화야말로 대중의 예술이었던 셈입니다.

5세의 케테
케테는 1867년 프로이센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 예술적 소질에 두각을 보이자, 케테의 부모는 그가 열네 살 때부터 미술을 배우고 베를린과 뮌헨의 여자예술학교에서 공부하도록 지원합니다. 케테는 1891년 카를 콜비츠와 결혼하면서 베를린 북부로 이주합니다. 카를은 그곳의 의료보험조합 소속 의사로 무료 진료소에서 일했습니다. 카를과 함께 하며 케테는 도시 노동자의 고통과 불행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케테는 역사의 주인공이 왕이나 귀족이 아닌 억압받는 인간이라고 봤습니다. 케테가 주로 그린 소재는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가난한 노동자, 고난을 겪는 부녀자, 의지할 곳 없는 어린이였습니다. 그는 병고, 노동, 봉기, 전쟁 등 현실의 비극을 지나치기 어려웠습니다. 나아가 비인간적인 운명에 도전하는 인간에 집중했습니다. 케테는 자신의 일기에 “순수한 아틀리에 예술은 비생산적이고 무력하다. 살아서 뿌리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적기도 합니다.

결혼 후 케테는 현실 참여적인 판화 작업에 매진합니다. 게르하르트 하웁트만의 연극 ‘직조공들’을 본 후 받은 충격을 바탕으로 6점으로 된 ‘직조공 봉기’ 연작을 만듭니다. ‘직조공들’은 1840년대 직조공들의 폭동을 소재로 한 희곡으로 하층민의 생활을 적나라하게 그렸습니다.

케테 콜비츠, ‘직조공 봉기’ 연작 중 ‘궁핍’, 1893~1897
‘직조공 봉기’ 중 첫 번째 작품인 ‘궁핍’입니다. 그림 중앙에 아픈 아기가 누워있습니다. 어머니는 아이를 바라보며 머리를 감싼 채 수심과 고뇌에 잠겨 있습니다. 뒤쪽 왼편에는 아버지가 다른 아이를 안고 속수무책으로 앉아 있죠.
케테 콜비츠, ‘직조공 봉기’ 연작 중 ‘죽음’, 1893~1897
‘죽음’에선 직조공 가족의 아기가 죽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가난한 부모는 어린아이에게 먹을 것도, 약도 제대로 주지 못했습니다. 사자의 팔이 가냘픈 아기의 목을 조르며 생명을 앗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를 지켜보는 아이의 아버지는 뒷짐을 지고 망연히 서 있습니다. 옆에 있는 어머니는 깊은 수렁에 빠진 채 깜빡 잠이 들었습니다.
케테 콜비츠, ‘직조공 봉기’ 연작 중 ‘직조공의 행진’, 1893~1897
‘직조공의 행진’은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이 행진에 나선 모습을 표현한 그림입니다. 비참하고 열악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봉기를 일으키는 것이죠. 여자는 아이를 업고, 남자들은 도끼와 곡괭이 등을 쥐고 행진합니다.
케테 콜비츠, ‘직조공 봉기’ 연작 중 ‘결말’, 1893~1897
‘결말’은 봉기가 실패로 돌아간 것을 보여줍니다. 두 명의 남성이 쓰러져 있고, 왼편의 한 여인은 쭈그려 앉아 울고 있습니다. 집 안에는 방직기가 멈춰 선 가운데 또 다른 희생자가 운반돼 들어오고 있습니다.

케테는 혁명적 봉기를 주제로 한 ‘농민전쟁’ 연작 판화 작업에도 착수합니다. 이는 빌헬름 치머만의 ‘대농민전쟁사 개설’을 읽고 재구성한 작품입니다.

케테 콜비츠, ‘농민전쟁’ 연작 중 ‘폭발’, 1902~1903
농민전쟁 연작 중 ‘폭발’이라는 작품입니다. 한 여인이 두 팔을 높이 치켜들며 봉기를 지휘하고 있습니다. 떨치고 일어나는 농민들은 파도처럼 돌진하며 분노를 표출하고 있습니다.
18세 아들을 앗아간 전쟁
케테는 1892년 첫째 아들 한스를 낳은 후 모성을 주제로 한 작품을 많이 만들게 됩니다. 아이를 낳고 기른 경험이 케테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입니다. 이전에는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에 초점을 맞췄다면, 엄마가 된 후 케테는 자식을 잃은 어머니들의 비극을 조명했습니다.
케테 콜비츠,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 1903
어머니가 죽은 아이의 몸뚱이를 붙잡고 있습니다. 아이의 몸에 얼굴을 파묻고 슬퍼하는 모습입니다. 눈과 입술, 숨결을 총동원해 이미 육체에서 떠나간 생명을 다시 불러들이려고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케테 콜비츠, ‘농민전쟁’ 중 ‘전쟁터’, 1907
전쟁 희생자들의 시체가 산을 이루고 있는 게 보이시나요. 어둠이 무겁게 내려앉은 광활한 들판에 전사자들이 눈을 감고 있습니다. 한 여인이 등불을 들고 있습니다. 거칠고 뻣뻣한 손으로 아들을 찾는 모습에서 비극이 느껴집니다.
1909년 큰 아들 한스(왼쪽), 둘째 아들 페터(오른쪽)와 함께 사진을 찍은 케테.
그러던 중 케테에게 가슴 아픈 일이 일어납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 케테의 둘째 아들인 페터는 전쟁에 자원해 참전할 수 있게 해달라고 졸랐습니다. 당시 독일을 비롯한 각국은 젊은이들에게 참전을 독려했습니다. 카를과 케테는 반대했지만 아들을 말리기 어려웠습니다. 당시 케테의 심정은 일기장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이 어린것의 탯줄을 잘라내는 심정이다. 살라고 낳았는데 이제 죽으러 가는구나.’ (1914년 10월 5일)

케테 콜비츠, ‘기다림(두려움)’, 1914
당시 케테의 작품을 보면 자식을 전쟁터에 보낸 어머니의 심정이 드러납니다. 전쟁에 나간 아들의 소식을 기다리는 어머니가 있습니다. 기다림은 고독과 불안의 연속이죠. 눈을 감고 입을 다물고 있는 이 여성은 간절히 기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같은 해 케테는 “당신의 아들이 전사했습니다”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페터는 열여덟살의 나이에 플랑드르에서 전사했습니다. 케테에게 이겨내기 어려운 일이었죠. 당시의 슬픔은 케테의 일기장에서도, 그가 그린 작품에서도 드러납니다.

‘나의 페터야. 나는 계속 너의 뜻에 충실하련다. 너의 뜻이 무엇이었던가를 잊지 않고 지켜가겠다.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나의 조국을 사랑하는 것이리라. 네가 너의 방식으로 사랑했듯이 나는 내 방식으로 그렇게 사랑할 것이다. (…) 나의 페터야, 제발 내 곁에 머물러다오. 나를 도와다오. 나에게 모습을 보여다오.’ (1914년 섣달 그믐)

‘나의 아가야, 봄이 왔다.’ (1915년 4월 11일)

케테 콜비츠, ‘자화상’, 1915
페터가 전사한 직후 케테가 그린 자화상입니다. 너무 많이 울어 눈꺼풀이 퉁퉁 부어있습니다. 케테는 생기를 잃은 채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케테 콜비츠, ‘부모’, 1914~1932
‘부모’ 조각은 전쟁 후 남겨진 부모의 비극을 보여줍니다. 케테는 남편 카를과 자신의 체격과 얼굴 특징을 기반으로 이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아들을 잃은 부모가 무릎을 꿇은 채 슬퍼하고 있습니다. 충격을 받은 아버지는 표정뿐만 아니라 몸까지 굳어 있습니다. 어머니는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고 있네요. 케테의 그 어떤 작품보다 개인적이고 자전적인데요, 동시에 전쟁을 겪은 집단의 보편적인 경험이 담겨있습니다.

이 작품은 벨기에 로게펠트 군인 묘지에 세워졌고 지금은 블라드슬로 군인 묘지로 옮겨졌습니다. 케테는 어머니상에 대해 “수많은 무덤을 눈으로 주시하고 있으며, 무덤 속에 누워 있는 그 모든 아들들을 향해 양팔을 끼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평화를 염원하다
페터가 죽은 후 케테는 전쟁에 반대해야 한다는 마음이 절박해졌습니다. 그리고 페터와 같이 전쟁터에서 죽은 모든 젊은이를 기리고 싶어 합니다. 이전에는 민중이 겪는 고통과 가난에 집중했다면, 평화를 촉구하는 목소리를 강하게 낸 셈입니다.
케테 콜비츠, ‘전쟁은 이제 그만!’, 1924
케테는 ‘전쟁은 이제 그만!’이라는 포스터를 그려 반전 평화운동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게르하르트 하웁트만은 이 포스터에 대해 “이 예술은 결코 선전 예술이 아닌 고백의 예술”이라고 평가합니다.

‘전쟁’ 연작 판화도 제작했습니다. 이 연작에는 아들을 잃은 자전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케테는 “이 판화들은 전 세계로 보내져야 한다”며 “우리가 말할 수 없이 힘든 시기에 겪었던 전쟁의 본질을 모두에게 전달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케테 콜비츠, ‘전쟁’ 연작 중 ‘부모’, 1921~1922
‘전쟁’ 연작 중 ‘부모’라는 제목의 판화입니다. 자식의 전사 통지를 받은 부부가 서로 부둥켜안고 통곡하고 있습니다. 조각으로 만든 ‘부모’상의 부부는 나란히 무릎을 꿇고 있다면, 이 작품 속 부부는 꼭 끌어안고 있습니다. 자식을 잃은 이들의 고통이 드러납니다.
케태 콜비츠, ‘전쟁’ 중 ‘어머니들’, 1921~1922
여인들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어린 자식들을 감싸고 서로 안고 있습니다. 원형으로 둘러싸며 아이들을 지키기 위한 결속을 다지고 있죠. 아이들은 어머니 품에 숨어서 바깥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케테 콜비츠, ‘어머니들’, 1919
케테가 앞의 그림 ‘어머니들’을 준비하면서 그렸던 그림입니다. 가운데 눈을 감은 여성이 케테를 닮지 않았나요? 케테는 일기장에 이 작품에 대해 ‘두 아이를 감싸고 있는 어머니를 그렸다’며 ‘나와 한스와 내 어린 페터’라고 설명합니다. 그림 속 여성들은 아들을 전쟁에 보낸 후 슬퍼하는 것 같습니다. 가장 왼쪽에 있는 여성은 얼굴을 가리며 울고 있죠. 왼쪽에서 두 번째 여성도 불확실한 미래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녀를 꼭 안고 있습니다.
케테 콜비츠, ‘전사자’, 1921
‘전사자’ 라는 제목의 이 작품 속 여성은 통곡하며 얼굴을 감싸고 있습니다. 남편 또는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으로 보입니다. 곁에 있는 아이들은 놀란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큰 아이는 동생을 달래며 어머니를 쳐다보고 있죠. 처절한 순간이 극적으로 표현돼 있습니다.
나치에 낙인찍힌 그녀
케테는 꾸준히 전쟁에 반대하는 작품 활동을 했는데요. 이로 인해 나치당의 눈 밖에 났습니다. 나치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면서 케테는 더욱 설 곳을 잃게 됩니다.

케테는 1932년 여름 제국의회 선거에서 나치에 대항하는 통일전선을 결성하도록 촉구하는 호소문 작성에 동참했습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소설가 하인리히 만과 남편 카를도 같이 서명하죠. 이들은 나치가 집권하면 개인적, 정치적 자유를 잃을 것을 경고했습니다. 이듬해 케테는 아돌프 히틀러에 반대하는 글에도 서명했습니다.

1933년 3월 나치당은 의회에서 다수석을 차지하면서 케테를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케테는 전쟁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하루아침에 국가의 반역자, 민족의 반동으로 지탄받았습니다. 케테의 모든 작품은 반민족적, 반시대적, 반예술적인 행위로 규정됐고요. 대학교수로서 강의 자격이 박탈됐고 그 밖의 모든 공직에서 추방당했습니다.

케테는 예술 아카데미에서 사임하라는 압력을 받으며 실직하고 아틀리에마저 떠나야 했습니다. 남편 카를은 의사 면허를 잃습니다. 베를린시 보건 위생 관청에서 공무원 의사로 일하는 장남 한스의 해고 절차도 시작됐습니다. 온 가족이 생계의 위협을 받게 된 겁니다. 의사 단체와 환자들의 강력한 항의로 카를과 한스는 겨우 다시 일할 수 있게 됩니다.

케테 콜비츠, ‘자화상’, 1933
이 시기 케테가 그린 자화상에선 나치즘 치하의 억압에 대한 슬픔과 억울함이 담겨 있습니다. 나치당의 중앙기관지는 ‘콜비츠가 그린 어머니는 전혀 독일의 어머니가 아니다’라며 작품을 평가절하하기도 하죠.

1936년 케테는 게슈타포(나치 독일의 비밀경찰)의 심문을 받고, 강제수용소에 수감될 수 있다는 협박을 받았습니다. 이듬해 나치는 ‘퇴폐 예술’ 캠페인의 일환으로 케테의 작품 최소 11개를 압수했습니다. 또 당국으로부터 개인적인 전시회를 금한다는 통보를 받습니다. 이로 인해 케테의 70세 생일을 기념해 예정된 베를린 전시회는 취소됐고, 또 다른 전시회는 개막 직후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케테 콜비츠, ‘애도’, 1938~1941
케테가 동료 예술가 에른스트 바를라흐의 죽음을 생각하며 만든 부조 ‘애도’입니다. 당시 나치에 비판적이었던 작가들은 케테와 같은 일을 겪습니다. 바를라흐도 나치 정권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인물이죠. 케테를 닮은 여성이 눈을 감고 입을 다문 채 슬퍼하고 있습니다. 비애와 정적, 침묵이 느껴집니다.

이러한 위협에도 불구하고 케테는 작품 활동을 계속합니다. 나치도 전쟁을 막아야 한다는 케테의 신념을 꺾기 어려웠습니다.

케테 콜비츠, ‘어머니들의 탑’, 1937~1938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여인들이 둥글게 서 있습니다. 이 어머니들은 팔을 뒤로 뻗어서 아이들을 보호하고 있죠. 또 자녀를 지키기 위해 어떤 것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결의에 찬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몸을 숙이거나, 두 다리를 벌린 채 굳건히 서서 위험에 맞서고 있습니다.
케테 콜비츠, ‘두 아이를 둔 어머니’, 1932~1936
케테가 며느리와 쌍둥이 손녀를 모티브로 제작한 조각입니다.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어머니는 아이들을 두 팔로 감싸 안고 있습니다. 케테가 그동안 작품에서 표현해온 모성애가 이 조각에서도 강렬하게 느껴집니다. 자식을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의 감정도 공존합니다.
케테 콜비츠,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 된다’, 1941
케테의 유언처럼 여겨지는 그의 마지막 석판화입니다. 아이들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어머니의 품에서 바깥을 바라보고 있네요. 여인은 큰 두 팔로 아이들을 감싸며 바깥을 향해 단호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기독교 도상에서 성모 마리아가 자신의 망토를 펼쳐서 신도들을 보호하는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케테는 이 작품을 완성한 후 일기장에 이렇게 적습니다.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 된다. 이제 이것은 나의 유언이다. 이 요구는 <전쟁은 이제 그만!>에서처럼 막연한 소원이 아니라 명령이다. 요구다.’

하지만 이 그림을 완성한 이듬해인 1942년 케테는 큰 손자 페터를 전쟁으로 잃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잃은 아들 ‘페터’와 같은 이름을 한 청년이었습니다. 케테는 아들이 죽은 1914년과 달라진 점이 없다며 슬퍼했습니다.

케테의 큰 손자 페터. 21세의 나이에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격화되자 1943년 8월 케테는 베를린 공습으로 인해 튀링겐주 노르트하우젠으로 대피합니다. 약 3개월 후 베를린에 있는 케테의 집은 폭격으로 무너집니다. 이듬해 그는 드레스덴 근교 모리츠부르크의 뤼덴호프로 이주하죠. 1945년 전쟁이 끝나기 며칠 전인 4월 22일, 케테는 숨을 거뒀습니다.
1935년 자신의 자화상 앞에 서 있는 케테 콜비츠
케테는 평화를 염원했습니다. 나치로부터 퇴폐 작가로 낙인찍히고 작품 활동에 위협을 당했지만 그는 두려울 게 없었습니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어미가 더 잃을 게 있었을까요.

하지만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 된다’는 케테의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전쟁은 번번이 가장 약한 존재인 아이들을 강탈했습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지금도 우리는 어린이들이 습격당한 소식을 듣고 있습니다. 숨진 아이를 안고 오열하는 부모의 사진이 연신 보도되고, 아이들의 무덤은 늘어가지만 역사의 비극은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전쟁으로 아들과 손자를 잃은 케테가 2024년에도 이러한 비극이 반복되는 것을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케테의 유언은 우리에게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참고문헌>

-카테리네 크라머(2023), 케테 콜비츠, 이온서가

-유리 빈터베르크·소냐 빈터베르크(2022), 케테 콜비츠 평전, 풍월당

-정하은(1986), 캐테콜비츠와 魯迅, 열화당

-쾰른 케테 콜비츠 박물관(https://www.kollwitz.de/en/) 속 작품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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