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속’ 시절은 안녕…나도 ‘철인 동료’가 생겼다 [ESC]

정인선 기자 2024. 5. 25.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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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인의 탄생│외로움의 끝
휴일근무 탓 쉽지않은 동호회
홀로 훈련·대회장 이동도 어려움
두번째 대회 앞두고 결국 가입
지난해 9월 강원도 삼척에서 열린 철인3종대회를 마친 뒤 회사 선배 남편의 동호회 회원들이 기념사진을 찍어줬다.

철인3종 경기를 준비한다고 말하면 “그 힘든 걸 왜요?” 다음으로 많이 듣는 질문이 있다. 바로 “혼자서요?”다. 철인3종을 먼저 경험한 선배 철인과 운동과 거리가 먼 친구 가릴 것 없이 꼭 같은 질문을 한다.

‘혼자냐’는 물음은 철인3종 경기 참가에 앞서 꼭 거쳐야 하는 공식 절차에서도 빠지지 않는다. 대한철인3종협회에 선수로 등록하려고 보니, 이름·생년월일·연락처 등 신상 정보와 함께 소속팀을 입력하는 칸이 있었다. 협회 등록 동호회 260여개 목록 맨 끄트머리에서 ‘무소속’을 찾아 선택했다.

대회장에 가 보니 혈혈단신 혼자 온 사람은 나뿐인 것 같아 조금 외로웠다. 대회 전날,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철인들은 저마다 동호회에서 맞춘 형형색색 유니폼을 입고 서로의 자전거를 살폈다. 삼삼오오 짝을 이뤄 자전거와 달리기 코스를 미리 달려 보며 사전 훈련을 하는 이들도 눈에 띄었다.

‘독립군 철인’에게 군자금 주듯

친구가 재미 삼아 봐준 사주풀이 속 ‘주변 덕 받는 팔자’란 문구 덕분일까? 지난해 9월 강원도 삼척에서 열린 첫 대회 때 뜻밖에 여러 사람의 친절한 손길이 잇따랐다. 내가 대회에 참가한다는 소식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리자마자 딱 10년 전 수상인명구조사 자격증을 따며 알게 된 ㄱ선배는 “언제 입문하나 기다렸다”며 연락을 해 왔다. 이미 수십 차례 대회를 완주하고 입상도 여러 번 한 그는 초보가 반드시 알아야 할 여러 노하우를 장문의 메시지로 꼼꼼히 전수했다. 국내외 철인3종대회 및 훈련 관련 정보가 모여 있는 온라인 카페 주소에서부터 종목 간 근전환 훈련을 하는 방법, 대회 전날 ‘카보 로딩’(탄수화물 축적)을 위해 짜장면을, 그것도 꼭 곱빼기로 먹으라는 ‘실전 꿀팁’까지 빼곡했다.(‘국민 마라토너’ 이봉주도 대회를 앞두고 짜장면을 즐겨 먹었다고 한다.)

대회 전날 ㄱ선배는 나처럼 처음 철인3종대회에 나서는 그 지역 후배 둘을 소개해줬다. 초심자들끼리 오픈워터(야외) 수영을 미리 하며 긴장을 풀었다. 대회가 끝나고는 ‘철인 입문 동기’가 되어 한 달 넘게 참은 삼겹살에 소주를 함께 기울였다.

생전 처음 보는 이들도 선뜻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회사의 ㄴ선배는 자신의 남편이 같은 대회에 출전한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남편 사진을 보여 주며 말했다. “이렇게 생긴 사람을 만나거든 붙잡고 이것저것 물어요.” 대회장에 갔더니 ㄴ선배의 남편이 소속돼 있다던 동호회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눈을 부릅뜨고 사람들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사진 속 얼굴을 금세 찾아내 인사를 건넸다. ㄴ선배의 남편은 동호회원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대회 당일 아침 준비운동에 나를 끼워줬다. 종목 간 전환을 위해 자전거와 헬멧, 운동화 등을 미리 가져다두는 바꿈터에서는 내 바구니와 자신의 바구니를 나란히 놓고, 최대한 효율적으로 장비를 정돈할 수 있게 시범을 보였다. 그가 아니었다면 대회 뒤 제대로 된 기념사진도한장 남기지 못할 뻔했다.

대회 전날 자전거 바퀴에 바람 넣는 펌프를 빌리며 얼굴을 튼 부산 ‘해운대철인클럽’ 출신 중년 남성 둘은 수영 입수 직전 몸을 미리 적실 생수를 가져다줬다. 대회가 끝나고는 내가 자전거를 타는 내내 핸들에서 손을 떼지 못해 물 한 모금 제대로 마시지 못한 걸 알아채고 생수 두 병을 가져다주며 “겨울에는 평롤러 위에서 균형 잡는 훈련을 꼭 하라”고 당부했다.

‘독립군’ 참가자의 진짜 설움은 뒤풀이까지 다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 비로소 찾아왔다. 다 함께 전세버스를 나눠 타거나 카풀을 해서 온 다른 선수들과 달리, 나는 올 때도 갈 때도 스스로 차를 몰아야 했다. 대회 당일 고속도로 장거리 운전을 할 자신이 없어, 대회장 근처에서 하루를 더 숙박하고 체력을 조금이나마 회복한 뒤 운전대를 잡았다. 안전 귀가를 위해 숙소비를 배로 쓴 셈이었다. 동료와 함께라면 숙소비도, 먼 거리를 오가는 기름값도 나눠 낼 수 있었을 텐데. 조수석 빈자리가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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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고성 아닌 경남 고성!

삼척 대회 전날 짜장면 곱빼기와 군만두 한 접시로 ‘카보 로딩’을 했다.

여러 사람의 호의에 기대 첫 대회를 마치고 돌아와서도 한동안 동호회 가입을 망설였다. 기자라는 직업 특성상 일요일과 공휴일에도 출근하는 날이 잦은데, 주말에 주로 이뤄지는 동호회 활동에 꾸준히 참여할 자신이 없었다. 나름대로 주 단위 훈련 계획을 세워 ‘나홀로 훈련’을 꾸준히 이어갔다.

오는 6월 두 번째 대회 참가를 앞두고 고민이 커졌다. 강원도 고성에서 대회가 열리는 줄 알고 지난해처럼 운전해서 가면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대회 장소가 경남 고성이었던 것이다. 왕복 800㎞에 달하는 거리를 혼자 운전해서 오가야 한다니. 어쩌면 철인3종경기보다 더 큰 도전이 될지 모를 일이었다. 대회를 앞두고 오픈워터 수영 적응 훈련도 슬슬 시작해야 하는데, 혼자서는 강이나 바다에서 훈련하는 게 안전 문제로 불가능하기도 했다.

지난겨울 친구를 따라 사이클 훈련센터를 찾았다가 처음 인사를 나눈 그의 직장 동료가 마침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철인3종 동호회에 몸담고 있었다. 겨우내 동호회 인스타그램 계정을 ‘눈팅’만 하다가 6월 대회를 한 달 앞두고 뒤늦게 문을 두드렸다. 온라인 카페에 가입 신청을 한 뒤, 간단한 자기소개와 인사말을 남기자 환영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정회원 자격을 얻으려 1년 치 회비(12만원)를 입금하고, 유니폼을 주문했다.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정모(정기 모임)에도 한 차례 출석했다. 까무잡잡한 피부, 다부진 몸을 가진 철인들은 멀리서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각자 어떤 계기로 철인3종에 입문하게 됐는지, 어떤 대회를 앞두고 어떻게 훈련하고 있는지 등 운동을 주제로 수다를 떨다 보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나와 같은 대회를 준비하는 회원들이 따로 모인 메신저 단체 대화방에 초대받아, 전세버스에 마지막 남은 한 자리에 올라타는 데도 성공했다.

주말과 공휴일이 다가오면 동호회 카페와 단체 대화방 알림이 바쁘게 울린다. 철인들은 오전 5시부터 한강 잠실 수중보, 서해 아라갑문, 여주 이포보 등에 모여 부지런히 오픈워터 수영과 사이클, 달리기 연속 훈련을 하며 실전 감각을 다진다. 나처럼 주말 일정이 들쭉날쭉한 이들은 평일에 비정기적으로 모여 따로 훈련하기도 한다.

일정이 맞는 날이 없어 아직 단체 훈련에는 한 번도 얼굴을 비치지 못했지만, 다른 회원들이 이른 새벽 한강 수영을 마치고 올린 단체 사진만 봐도 설렌다. 내게도 드디어 동료가 생겼다!

글·사진 정인선 기자 ren@hani.co.kr

한겨레신문 스포츠팀 기자. 일하지 않는 시간엔 요가와 달리기, 수영, 사이클, 케틀벨 등 각종 운동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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