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代 나눔명문가의 철학 “도둑질도 기부도 습관”

김광원 2024. 5. 25.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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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록 회장과 아내, 큰딸 아너소사이어티 가입
1984년에 기부 시작, 30여억원 기부
"아버지에게 기부 DNA 물려받아"
이덕록(오른쪽) ㈜서보 회장과 딸 이소원 대표가 회사에서 손을 맞잡고 있다. 김광원 기자

"도둑질도 기부도 다 습관입니다." 기부 습관이 대를 잇고 있다. 이덕록(74)(주)서보 회장과 경영 일선에서 뛰고 있는 딸 이소원(42) 대표의 이야기다.

1988년에 창업해 송·변전건설 분야에 특화된 전기공사업체로 자리 잡은 서보는 회사의 연혁만큼이나 기부의 역사가 길다. 이 회장은 1984년부터 기부를 시작했다. 충주성심맹아원이 첫 기부처였다. 이후 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30억 원 넘게 기부했다. 기부는 자연스레 가족에게 전파됐다. 그가 2014년 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아너소사이어티 28호 회원에 이름을 올린 후 아내 윤정희 씨와 이 대표가 각각 48호와 148호로 가입했다. 올해 1억 원을 모두 납부한 이 대표는 “다음 순서로 남편을 아너 클럽에 가입시킬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회장은 "성공이나 부가 오롯이 나 혼자서 이룬 결실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으면 기부가 어렵지 않다"면서 "사회로부터 받은 신세를 갚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덕록 일가는 기부가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자선의 손길을 내밀었다. 초록어린이재단, 대한암협회, SOS어린이마을,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독도 관련 단체 등에 꾸준히 기부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기부는 2007년에 이 회장의 고향인 영덕군에 기부한 장학금이다. 당시 남병주 전국전기공사협회장과 함께 각각 5,000만 원씩 기부했다. 두 사람이 베푼 마중물 덕분에 영덕군교육발전위원회에 30억 원의 기부금이 모였다. 현재는 100억 원이 넘는다. 이 회장은 올해부터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보다 특별한 기부활동에 나선다. 아너소사이어티 회원들이 만든 아너의료봉사단 단장을 맡은 것이다. 9월에 의료봉사단을 이끌고 몽골로 떠난다.

이덕록 회장의 기부정신이 새겨진 기념패. 대구사회공동복지모금회로부터 기증받았다. 김광원 기자

서보는 2017년에 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나눔명문기업'에 이름을 올렸다. 이후 매년 1억 원씩, 7년째 회사 차원의 기부를 이어오고 있다. 얼마 전 이 대표가 10년을 채우겠다고 선언했다. 2026년까지 3억 원을 더 기부하기로 한 것. 이 대표는 "직원들이 반대했다면 기부를 시작할 수도 없었을 것"이라면서 "회사에 기부 문화가 정착된 덕분에 기부를 이어갈 수 있다"고 말했다.

베풀고 나누는 일에 진심인 회사인 만큼 가족 같은 분위기를 자랑한다. 이 회장은 직원들을 그야말로 가족처럼 대했다. 1984년 대학에 입학해 대학원까지 졸업한 이 회장은 직원들에게도 배움의 길을 열어주었다. 대학교 진학을 희망하는 직원들에게 학비를 전액 지원했다. 2008년부터 10명이 대학 졸업장을 취득했다. 서보에서 독립해 회사를 차릴 때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현재 CEO가 된 서보 출신의 인물이 6명에 이른다. 지난해 군위군이 대구시에 편입된 뒤 제일 먼저 군위군의 ‘나눔명문기업'으로 등록한 ㈜광명에너지의 김휘대 대표도 서보 출신이다. 이들은 회사를 차려 독립한 후에도 명절마다 서보 회장실에 모여 정담을 나눈다. 이 회장은 "김휘대 대표를 비롯해 직원들이 정말 열심히 해줘서 내가 돈을 번 것"이라면서 "온몸을 바쳐서 일해준 직원들 덕분에 회사도 살고 기부도 활발하게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특별한 기부자의 사연을 접할 때마다 새로운 자극을 받는다. 퇴직금의 삼분의 일을 일시불로 기부한 아너소사이어티 55호 박석곤 씨나 대구시에 10억 원씩 5년을 기부한 아너소사이어티 72호 회원 임길포 ㈜우리텍 대표이사 같은 인물들이다. 최근에는 베트남에서 청각장애인 세 사람을 무료로 수술해 소리를 돌려준 이상흔 대구보훈병원장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 회장은 "장비도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은 곳에서 장시간 힘들게 수술하는 모습을 보면서 큰 감동을 느꼈다"고 밝혔다. 아너의료봉사단 단장을 기꺼이 맡은 것도 이 원장이 보여준 헌신적인 모습이 한몫을 했다.

이 회장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아버지다. 경북 영덕에서 한지공장을 운영했던 아버지는 1959년에 불어닥친 사라호태풍 때문에 공장 문을 닫았다. 그때 어머니가 시장에서 장사를 하면서 어려운 시기를 버텼다. 머리카락을 잘라서 팔기도 했다. 하루는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주려고 겨울 잠바를 사 왔다. 아버지는 길가에 앉아 구걸하는 걸인에게 그 잠바를 줘버렸다.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이 회장이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당신은 "나는 이 옷 없어도 살지만 저 사람은 이 옷 없으면 오늘 밤에 얼어죽는다"면서 기어이 옷을 벗어주었다. 이 회장은 "그때는 아버지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니 그 '미친' 유전자가 나에게로 고스란히 이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

"기부는 남 좋으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자기가 좋아서 하는 겁니다. 제 기분에 하는 거죠. 신이 나고 행복해지니까. 기부를 실천해 보니 아버지의 마음을 알겠더라고요."

이 회장은 "기부와 봉사는 건천처럼 특별한 시기에만 반짝 흐르다가 말라버리면 곤란하다"면서 "기부의 물결이 도도한 강처럼 흘러야 베푸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모두 행복한 사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광원 기자 jang75010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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