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시브가 낳은 괴물 ‘패낳괴’를 아시나요

이승용 시사저널e 기자 2024. 5. 25.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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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가치와 무관한 주가 급등 속출에 가치투자 멍들어
MSCI·코스피200 등 지수 편입 노린 주가 띄우기 횡행

(시사저널=이승용 시사저널e 기자)

5월8일 유가증권시장에 상장한 HD현대마린솔루션은 상장일 공모가(8만3400원) 대비 두 배 수준인 16만3900원으로 장을 마쳤다. HD현대마린솔루션 주가는 이후에도 상승세가 이어졌다. 5월14일에는 20만원을 훌쩍 넘기도 했다. 이후 주가는 급락했고 5월22일 16만원 선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HD현대마린솔루션 주가가 상장 직후부터 급등한 이유는 향후 코스피200 지수에 특례 편입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반영됐기 때문이다. 코스피200 지수 특례 편입은 상장일 이후 15영업일 동안 평균 시가총액 순위가 유가증권시장 50위 이내면 다가오는 선물옵션 만기일에 편입될 수 있다. 오는 선물옵션 만기일은 6월13일이다.

하지만 이후 HD현대마린솔루션 평균 시가총액 순위가 유가증권시장 50위 안에 아슬아슬하게 들지 못하자 실망 매물이 늘어나면서 주가가 16만원 선까지 급락한 것이다.

이처럼 국내 증시에서 각종 대형 패시브 지수에 편입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종목들의 주가 급등 현상이 빈번해지고 있다. 기업 가치와 무관하게 주가가 급등하는 것이다. 이를 놓고 '패시브가 낳은 괴물', 이른바 '패낳괴'라는 신조어도 만들어질 정도다. 기업의 실적이나 가치와 무관하게 수급만을 이유로 주가가 급등하는 종목들이 속출하면서 시장의 왜곡 현상이 커지고 가치투자가 위축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지난해 11월17일 유가증권시장에 상장한 에코프로머티 역시 마찬가지였다. 에코프로머티는 상장 과정에서 고평가 논란에 휘말렸고 수요예측 과정에서 경쟁률이 17.2대 1에 그치며 공모가를 희망공모가 범위(3만6200~4만4000원) 하단인 3만6200원으로 결정했다. 하지만 상장 이후 예상을 뒤엎으며 주가가 연일 급등했고 결국 지난해 12월15일 선물옵션 만기일에 코스피200지수에 특례 편입됐다.

ⓒPixabay

3대 지수 편입 소식에 춤추는 주가

국내 증시에서 패낳괴 현상을 일으킬 수 있는 대형 지수로는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의 MSCI 지수, 한국거래소가 만든 코스피200 지수, 코스닥150 지수 등 3가지가 꼽힌다.

MSCI 지수는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이 만든 주가지수로 글로벌 증시에 상장된 일정 기준 이상의 종목들을 골고루 담고 있다. 다만 정확히 얼마의 자금이 해당 지수를 추종하는지는 알 수 없다. MSCI는 자체 조사 결과 지난해 6월말 기준 MSCI 지수를 벤치마크로 삼는 추종 자금 규모가 15조 달러에 달한다고 공개하고 있다. MSCI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가 포함된 EM(신흥국) 지수 추종 자금은 2조 달러다.

이에 대해 자체 과대평가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전 세계 증시 자금이 63조 달러 정도 되는데 4분의 1이나 MSCI 지수를 추종할 리 없기 때문이다.

다만 MSCI 지수 추종 자금이 코스피200 지수나 코스닥150 지수보다 더 크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김동영 삼성증권 연구원에 따르면 코스피200 지수를 추종하는 ETF는 20조원, 코스닥150 지수를 추종하는 ETF는 2조2000억원 수준에 이른다.

3대 지수 중 추종 자금이 가장 큰 MSCI 지수 변경은 국내 증시에서도 큰 이벤트다. MSCI 지수는 2, 5, 8, 11월 등 1년간 4번에 걸쳐 정기 리뷰를 통해 지수에 편입되거나 편출될 종목을 결정한다. 5월15일 새벽 MSCI는 5월 정기 리뷰 발표에서 알테오젠, 엔켐, HD현대일렉트릭이 새로 편입되고 카카오페이, 한온시스템, 강원랜드, 삼성증권 등이 편출된다고 밝혔다.

한국거래소가 산출하는 코스피200 지수와 코스닥150 지수의 경우 특례 편입을 제외하고 매년 6월과 12월 두 번에 걸쳐 정기 변경이 진행된다. 상장 후 6개월이 경과한 종목을 대상으로 매년 4월과 10월 마지막 거래일을 기준으로 편입 요건을 통과한 종목이 선정되는데, 편입이 결정된 종목은 그해 6월과 12월 선물옵션 만기일에 지수에 편입된다.

문제는 지수 변경에 맞춰 특정 세력이 인위적으로 주가를 띄워 편입시키는 일이 횡행하고 있다는 우려 또한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지수 편입에 맞춰 미리 주식을 사들인 다음 패시브펀드에 해당 물량을 떠넘기면 물량을 온전히 처분할 수 있다. MSCI 지수 변경을 노린 사전 투자는 이제 개인을 넘어 기관 등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일각에서는 사실상 합법적인 주가조작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이번 5월 MSCI 정기 리뷰의 경우 엔켐이 논란의 중심이었다. 엔켐은 새해 들어서자 주가가 8만원에서 30만원대로 4배나 올랐다. 반면 엔켐은 적자가 지속되고 있다. 엔켐은 지난해 4분기에 200억원 영업손실을 냈고, 올 1분기에도 118억원대 영업손실을 이어갔다. 실적과 무관하게 시가총액이 급증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MSCI 5월 리뷰를 통해 지수에 편입된 것이다.

에코프로가 전 거래일 대비 11.91% 오른 111만8000원으로 거래를 마감한 2023년 7월18일 서울 종로구 연합 인포맥스 전광판에 에코프로 종가 현황이 표시되고 있다. ⓒ연합뉴스

국내 증시에서 설 자리 잃는 가치투자

MSCI는 지수의 안정성을 위해 2021년 단기 주가 상승 폭이 큰 종목의 편입을 막는 규정을 신설한 바 있다. 세계 최초로 이 규정이 처음 적용된 종목은 지난해 5월 리뷰에서 에코프로였다. 에코프로는 MSCI 지수 편입이 한 차례 유예됐다. 지난해 8월에는 금양이 두 번째로 적용되면서 역시 MSCI 지수 편입이 한 차례 미뤄졌다.

강송철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국내 증시에서 MSCI 지수에 새로 편입되는 종목들이 최근 지수 편입 발표 전에 주가가 단기 고점을 형성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며 "지수 편입과 ETF 등 패시브상품 매입 기대에 따라 펀더멘털과 괴리된 가격 상승이 나타나는지 의심해볼 수 있는 부분인데, 특히 지난해 8월부터 이런 현상이 상당히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MSCI 8월 리뷰에 포함될 것으로 예상되는 종목들 역시 최근 주가가 춤추기 시작했다. 오는 8월 MSCI 정기 리뷰에서 편입이 예상되는 종목으로는 LS일렉트릭, LS, 리노공업, 현대로템 등이 꼽히고 있다.

일각에서는 기업 가치와 무관하게 패시브 수급만으로 종목의 주가가 결정되는 현상이 빈번해지면서 기업 가치를 분석해 저평가된 종목에 투자하는 가치투자가 국내 증시에서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기업 실적과 무관한 주가의 왜곡이 오래 지속될 리는 없다. 실제로 기업 가치와 무관하게 대형 지수에 새로 편입된 종목들은 대부분 편입 시점을 고점으로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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