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이 ‘순대’라서…프랑스인 ‘개성(改姓)’ 증가 [특파원 리포트]

안다영 2024. 5. 25.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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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전자가족관계등록시스템 통계를 보면 지난해 9만여 명이 이름을 바꿨습니다. 이름 때문에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것 같다, 발음하기 어렵다, 이름 때문에 놀림을 받았다 등 여러 이유로 말이죠.

반면, 성을 바꾸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우리말 표현 중에 "내가 ~하면 성을 간다"는 말이 있죠. 자신의 성을 걸고 맹세한다는 의미인데, 그만큼 우리 문화에서 성이 갖는 무게감이 크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그런데 프랑스에서는 실제로 성을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 1년 반 동안 14만여 명 '개성(改姓)'

2022년 7월부터 프랑스에서는 성을 바꾸는 절차가 간소화됐습니다. 이전에는 성을 바꾸려면 '감당하기 어려운 이름'이라거나 '아주 드문 희귀 성' 등 정당한 사유가 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법안 발의자의 이름을 딴 이른바 '비날법' 시행 이후에는 정당한 사유 없이도 간단한 양식만 작성해 시청에 제출하면 성씨 변경이 가능해졌습니다.

법 시행 이후 2022년 8월 1일부터 지난해 12월 31일까지 14만 4천 1백여 명이 성을 바꿨습니다. 이는 법 시행 전 같은 기간(2021년 3월~2022년 7월)에 기록된 4만 4천여 명보다 3배나 많은 수치입니다.

성씨 변경 신청 건수는 법 시행 직후인 2022년 8월과 10월 사이 정점을 찍으며, 1만 3천 7백 건으로 최고치를 기록했습니다. 이후 점점 줄어들어, 지난해 말에는 월평균 6천여 건 정도로 나타났다고 프랑스 통계청은 밝혔습니다.

연령대로 보면 주로 젊은이들이 많았는데, 반 이상(53%)이 18~29세였고, 30대가 그 뒤를 이어 23%를 차지했습니다. 성별로는 남성보다 여성이 더 많았습니다. 성씨 변경 신청자의 약 3분의 2는 기존에 쓰던 아버지 성씨를 어머니 성씨로 바꾸거나, 그 반대의 경우 등으로 나타났습니다. 부모가 성을 바꿨다면 이 부모의 성을 가진 13세 미만의 자녀에게도 성씨 변경이 자동 적용됩니다.

■ 성씨 왜 바꾸나?

'비날법' 시행 전인 2022년 초 한 설문조사에서 프랑스인 5명 중 1명꼴로 당국이 허용한다면 성을 바꾸고 싶다고 답했습니다. 성을 바꾸고 싶은 이유 중 '우스꽝스럽기 때문'이라는 답변이 가장 많았습니다.

김, 이, 박과 같이 대체로 한 음절로, 특별한 뜻을 담고 있지 않은 우리 성씨와는 달리 서양의 성씨는 길고, 구체적인 뜻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령 성이 제빵사거나 정육점 종사자와 같이 특정 직업군을 나타내는 경우가 있는데, 과거 조상이 그런 일을 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한 학생의 성은 '샹송'으로 우리말로 노래란 뜻이었는데, 그 학생의 조상은 가수가 아니었을까 추론됩니다.

그런데 간혹 아주 당혹스러운 성들도 있습니다. 프랑스의 한 인터넷사이트가 공개한 '최악의 성씨' 목록을 우리말로 번역해보면 이렇습니다. 뚱보, 멍청이, 가래, 방귀, 돼지고기, 순대 등. 글래머, 포르노같이 성적인 단어와 의미가 비슷하거나 발음이 유사한 성들도 있습니다. 실제로 한 프랑스인 친구는 안 지 꽤 시간이 흘렀는데도 성을 몰라 물은 적이 있습니다. 머뭇거리던 친구는 자신의 성이 우리말로 해석하면 엉덩이라는 뜻이라며, 직장에서 자신의 이름 때문에 난감했던 여러 경험을 들려줬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취재 현장에서 인터뷰 후에 이름을 물으면 말 그대로 이름만 말하고, 성은 끝까지 알려주지 않는 경우가 꽤 많습니다.

■ 국회 환경위 의원 성이 '숲을 태우다'

직업적인 이유로 성을 바꾸기도 합니다. 가령 앞서 언급했듯, 타고난 성이 제빵사인데 정작 본인은 정육점을 운영한다면 주변에서 '정육점 하는 제빵사 씨'라는 농담을 듣게 될 수 있겠죠. 이런 농담이 지겹다면 아버지의 성 대신 어머니의 성으로 바꾸면 되는 겁니다.

프랑스 국회의원 다니엘 브륄부아(Danielle Brulebois: 다니엘 숲을 태우다) 의원이 의회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실제로 성과 직업이 정면으로 충돌하며 생긴 소동이 프랑스 의회에서 있었습니다. '다니엘 브륄부아'라는 이름의 한 프랑스 국회의원이 있습니다. 그녀의 성 '브륄부아'에서 '브륄'은 태우다, '부아'는 숲이란 뜻입니다. 직역하면 성이 '숲을 태우다'가 됩니다. 그런데 이 의원의 상임위원회는 환경과 생태 문제를 다루는, 우리로 치면 환경위원회입니다. 어느 날, 브륄부아(숲을 태우다) 의원이 의회에서 환경을 보호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마치자, 사회를 보던 다른 의원이 "지금까지 브륄부아(숲을 태우다) 의원이었습니다"라고 말하자마자, 장내에 있던 모든 의원의 웃음이 터져버렸습니다. 이후 장내 정돈을 위해 잠시 회의가 중단됐다고 합니다.

■ 아픈 가정사도 성씨 변경의 동기

이처럼 성 때문에 벌어진 재미난 소동도 있지만, 성을 바꾸려는 동기가 아픈 가정사 때문인 경우도 있습니다. 실제 2022년 성씨 변경 절차를 간소화하도록 법안이 발의된 배경에는 어린 시절 학대받은 이들이 자신의 성씨와 결별하고 싶다고 한 요구도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혼이나 별거 후 자신이나 자녀를 위해 성을 바꾸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프랑스 방송 TF1이 인터뷰한 한 여성은 이혼 후 복잡한 상황을 토로했습니다. 그녀는 "두 아이의 생활기록부에 남편 성과 주소, 전화번호만 적혀있고, 나와 관련된 정보는 없어서 학교에 갈 일이 있을 때마다 내가 엄마임을 입증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새로운 법에 따라 프랑스에서는 어머니 성을 따르거나, 아버지 성을 따르거나, 혹은 부모 둘 다의 성을 쓰거나, 두 번째 부모의 성씨를 추가하거나, 원하는 대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일생에 단 한 번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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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다영 기자 (browneyes@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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