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가 돼도 출퇴근하는 사회, 대한민국 닮지 않았나요? <닭은 의외로 위대하다> 미역의효능

한겨레21 2024. 5. 25.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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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S][미역의효능②] 이 땅 위 가장 취약한 존재들의 생존기
미역의효능이 그려 보내온 작가 프로필. 이 그림을 받아 본 편집자는 그야말로 효능감이 떨어졌다. 하지만 작가의 캐릭터를 가장 잘 살린 그림이라 메인 사진으로 쓰기로 했다. 미역의효능 제공

◆<아 지갑놓고나왔다> <닭은 의외로 위대하다> 미역의효능 작가의 이야기가 앞 기사에서 이어집니다◆

고통의 가장 밑바닥까지 파고드는 마음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5544.html

누가 가장 먼저 고기가 될 것인가

좀비는 인간성이 모두 사라진 위험한 괴물의 모습으로 많이 재현됐다. <닭 위대>는 그간 우리가 무수히 접해온 좀비물과 다른 길을 간다. 이 세계에서 인간은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됐다고 갑자기 감염 전과 다른 존재가 되지 않는다. 단지 인육에 너무나 끌릴 뿐이다. 외형상 감염인과 비감염인은 뚜렷이 구분되지 않고, 이 세상은 적당히 망한 채로 굴러간다. 사람들은 감염 사실을 감춘 채 출근하고 어떻게든 일상을 살아간다. 물론 ‘식량 확보’를 위한 범죄와 인육 거래 암시장이 형성되면서 사회는 큰 타격을 입는다. 국가는 행정력과 치안력을 동원해 감염인을 격리하고 인육 거래를 단속하며 백신 개발에 박차를 가한다.

“좀비 아포칼립스인데 출퇴근하는 점이 대한민국답지 않아요? 고깃값 벌러 일하러 가야 하는 사람들이요. 세계관을 반쯤 망한 상태로 설정할 때 한국 사회의 특징과 비판할 지점이 잘 드러날 것이라 봤어요. 완전히 망해버린 사회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많기도 하고. 아무래도 좀비 바이러스가 유행하는 한국 사회라고 한다면 자본주의적인 모습이 들어가지 않을 수 없겠죠. 성차별이나 도농격차 같은 현실 세계의 차별 구조도 고려해야 하겠고. 위기 사회가 되면 취약계층이 누구인지가 더욱 분명히 드러날 테니까요.”

누군가는 ‘고기’가 돼야 하는 시대. 그렇다면 누가 고기가 될 것인가. 이 질문은 미묘하게 다른 두 개의 질문을 함축한다. 누가 이 사회에서 더 쉽게 죽는가. 누가 이 사회에서 죽어도 되는 목숨으로 여겨지는가.

“좀비 바이러스가 퍼진 뒤, 여성 사망률이 높아져요. 백신이 개발되면서 국가가 가임기 여성 보호 정책을 펼치죠. 그러면서 노인 사망률이 더 늘어나요. <닭 위대> 후반부로 가면서 사회가 회복된 뒤의 인구 통계가 나오거든요. 노인이 가장 많이 죽었다고 하니 일부 사람이 ‘아, 국민연금 괜찮아지겠네’라며 좋아하는 장면을 그렸죠. 그런데 실제로 코로나19가 유행할 때 노인 사망률이 늘어나니까 인터넷에서 그런 유사한 반응을 보인 사람이 있었어요. 이게 진짜라는 사실을 마주하니 기분 나쁜 소름이 돋았죠.”

연재를 시작하고 석 달 뒤, 공교롭게도 코로나19가 범세계적으로 유행하면서 이 작품은 현실의 스케치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닭 위대>가 그려내고 싶은 이야기는 ‘극한 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악한 본성’류 따위가 아니다.

“대한민국은 누군가 어떤 일로 힘들다고 말하면 ‘누가 칼 들고 협박했냐’는 댓글이 달리는 사회잖아요. 사회안전망이 취약하다보니 좀비 바이러스가 아니라도 서로를 잡아먹는 경향이 있지 않나. 위에 있으면 아래에 있는 걸 먹어도 된다고 생각하고 군림해도 된다고 생각하는구나. 그런 고민을 하면서 <닭 위대>의 이야기를 썼어요. 서로 잡아먹는 사회에서도 서로를 도우려는 사람들이 있어요. 생존이 각자의 능력에 달린 거라면 우리 다 같이 서로 찌르다 죽자는 것 말고 무슨 이야기가 되겠어요? ‘사람이 그렇게 살면 안 되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래도 이 사회가 계속 유지되고 있다고 생각해요.”

세상이 한없이 잔혹할지라도, 나는​ 

카카오웹툰에서 연재중인 <닭은 의외로 위대하다> 1화에서 자살하려는 할머니를 구하고 싶은 마음에 닭이 크게 울부짖고 그 소리를 듣고 여주인공 심연이 할머니의 집으로 오게 된다. 미역의효능 제공

<닭은 의외로 위대하다>라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이 작품은 인간 사회에서 취약하다고 여겨지는 존재들의 ‘위대함’에 대한 이야기다. 특히 말하지 못하는 75살 노인 여성 ‘정복자’와 함께 살아온 암탉은 이 작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전작인 <아 지갑>을 보면 선희 친구가 치킨집을 하잖아요. 치킨집 간판에 ‘우리는 1인 1닭이다’라고 쓰여 있거든요. 한 사람이 한 끼 먹을 때마다 닭이 한 마리씩 죽는다니 굉장히 가슴이 아프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옛날에 큰아버지가 양계장을 하셨어요. 어릴 때 한두 번 가보기만 했는데 충격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아주 좁은 축사에, 닭들이 빼곡하게 몰려서 꼭꼭꼭꼭 소리치고 있었죠. 닭똥 냄새가 엄청나게 나고, 한쪽에서는 달걀을 뽑는데 그 바로 앞에 닭 사체가 몇 구 있어요. 어린 마음에도 ‘이건 좀 아닌데’라는 느낌이 있었죠. 닭들한테 미안해서 닭이 나오는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어요. 우리 천재 닭에 대해 애정을 갖게 된 분들은 치킨을 조금은 덜 드시겠지, 라는 생각으로. 거기서부터 하나씩 연상해나가다가 ‘시골에서 좀비물 하면 재밌겠네’라는 생각으로 나아갔죠. 도시에서 좀비가 창궐하는 이야기는 이미 많이 나왔더라고요. 시골 할머니, 서울에서 온 젊은 여성 등의 키워드들을 연결하면 좀 재미있는 여성 서사물이 나오겠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서울에서 시골로 온 젊은 여성 ‘심연’이 마을에서 소외된 할머니 정복자를 만나면서 <닭 위대>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주제와 세계관은 다르지만 심연은 <아 지갑>의 노루 못지않게 엄마와의 관계가 복잡하다. “엄마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방치된 아이”로 자라 엄마의 애정을 갈구한다. 늘 냉정한 엄마는 좀비 바이러스가 퍼지기 시작한 어느 날, 세 사람이 모여 앉은 식탁에서 남편을 살해한다. 그길로 집을 떠나온 심연은 지역 경찰로부터 엄마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리고 얼마 뒤 엄마의 환영이 심연에게 나타나고, 심연은 조금씩 엄마의 삶을 알아간다.

“소년 만화에서 주인공은 위대한 아버지를 뛰어넘어 더 위대한 무엇이 돼요. 그런데 심연의 서사에서 심연은 어머니를 뛰어넘어 무엇이 되지는 않아요. 다만 자기 안에서 과거의 상처를 매듭짓고 나서 성숙하는 과정을 그리고 싶었어요. 어머니와 화해하는 게 아니라, 심연이 자기 안의 자존감을 바닥으로 눌러버린 관계들을 이겨내고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길 바란 거죠.”

심연은 아무리 상처받아도 타인을 사랑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는다. 미역의효능은 작중 인물 송강의 입을 빌려 말한다. 이것은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라고. 이 위대함은 결코 홀로 이룩되지 않는다. 심연의 성장에 꼭 필요했던 존재가 바로 정복자다. 타인을 사랑하는 일이 헛된 일이 아니라는 걸 알려주는 또 다른 타인.

“사람은 자신을 위할 때보다 다른 사람을 위할 때 더 강해지는 측면이 있어요. 정복자는 소외된 독거노인이잖아요. 처음에 외로워서 자살하려고 했지만, 그 모습을 본 닭이 울부짖는 바람에 심연이 왔고 죽음을 멈췄어요.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하지만, 암탉이 울었기 때문에 생명이 살아났고 관계가 생겨나요. 서로 뜯어먹는 이 각박한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사랑이 있을 수 있는가. 그게 <닭 위대>의 중요한 주제예요.”

미역의효능 작가 작업실에 놓인 작가가 좋아하는 오브제들. 미역의효능 제공

예정작 주인공은 ‘여성 청년’ 금붕어 

미역의효능은 <닭 위대>를 연재하면서 독자로부터 ‘사람을 징그럽게 그리는데, 또 그만큼 사람들이 아름답게 보이기도 한다’는 말을 들었다. 물론 이 작품의 인물들은 징그럽거나 아름다운 인물, 단 둘로만 나뉘지 않는다.

“어릴 때부터 소년 만화를 많이 봤는데, 주인공이라고 밑도 끝도 없이 착하고 정의로우면 좀 아쉽더라고요. ‘사람이 좋은 거 있고 나쁜 거 있고 다 그렇지, 누가 일생을 그렇게 정의롭게만 사나’ 하면서 캐릭터를 만들었어요. 선악이 뚜렷하면 이야기 전개하기는 쉽죠. 말하자면, 하얀 돌로 까만 돌을 툭툭 깨는 알까기 같은 느낌으로. 근데 현실이 알까기입니까? 현실의 사람들은 까만색, 흰색 얼룩덜룩하죠. 대중 서사에서 여성 캐릭터가 부각되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맥락 없이 ‘짱짱걸’이 되는 것도 별로예요. 그것 또한 비현실이니까.”

<닭 위대>는 2024년 6월이나 7월쯤 완결될 예정이다. 5년 가까이 “<닭 위대>에 짓눌린 인생을 살아온” 터라 미역의효능은 휴식이 간절하다. 그래도 벌써 다음 작품을 구상해둔 상태다. 가족 안에서 경제적 헌신을 요구받던 여성 청년이 어느 날 독립하는 이야기다. 아, 주인공은 사람이 아니라 금붕어다.

박희정 <그리고, 터지다> 저자·기록활동가

에필로그

미역의효능 작가의 작업 공간. 미역의효능 제공

미역의효능을 처음 만난 것은 2019년 11월29일 한국만화박물관 기획전시 ‘노라를 놓아라’에서다. 여성 서사 만화 13편을 주제로 한 이 전시의 콘퍼런스에서 그는 대담자로, 나는 진행자로 만났다. 이듬해 인터뷰로 다시 만났고, 이 글을 쓰기 위해 만난 것이 세 번째다.

여러 관객 앞에서 펼쳐진 대담에서 미역의효능은 이야기하기가 영 불편한 눈치였다. 일대일로 만난 자리에서 그는 훨씬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바뀌어 있었다. 내 질문에 그는 때때로 설명이 잘 안 된다는 듯 말을 고르다 노트를 꺼내 그림을 그리곤 했다. 주로 작업 과정에 대한 물음이었는데, 생각이 전개되는 과정을 그림으로 표현해주었다. 입시 미술을 거쳐 미대로 진학한 두 언니와 달리, 그는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려본 적은 없다. 하지만 쉴 새 없이 낙서했다. 미역의효능은 낙서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말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하지만, 늘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두 번째 인터뷰와 세 번째 인터뷰에서 우리는 똑같이 <닭 위대>를 주제로 이야기했지만, 나눈 이야기의 폭은 달랐다. 작가의 말하기는 작품과 함께 성장한다. 작품에 대해 말할 기회를 얻는 만큼 그 언어도 두터워질 것이다.

작품 리스트

<아 지갑놓고나왔다> 2015년 3월25일~2017년 5월31일 다음웹툰에 연재. 2017년 부천만화대상, 오늘의 우리만화상 수상. 아홉 살의 여름, 교통사고로 죽은 아이와 혼자 남겨진 채로 살아가는 엄마. 두 사람이 정말로 이별하는 이야기.

<닭은 의외로 위대하다> 2019년 10월18일부터 카카오웹툰에 연재 중. 본격 시골 힐링라이프 서바이벌 좀비물. 좀비 바이러스가 창궐한 대한민국 시골 마을에서 이 땅의 가장 취약한 존재들이 펼치는 위대한 생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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