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사극장] 파블로프는 개 실험에 종소리를 쓰지 않았다?

이창욱 기자 2024. 5. 25.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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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동아 제공

과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개는 '파블로프의 개'일 것이다. 1849년 러시아에서 태어난 실험 신경학자이자 생리학자인 이반 페트로비치 파블로프는 개에 관한 일련의 실험을 통해 '조건반사'로 알려진 고전적 조건형성을 발견했다. 파블로프의 개로 대표되는 그의 연구와 삶을 우리는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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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러시아 제국 실험의학연구소의 생리학 분과장 이반 파블로프는 그간 진행한 개의 소화계에 관한 연구 업적으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수상 연설에서 그는 앞으로 개를 활용해 '정신에 관한 과학적 연구'를 수행하겠다고 밝혔다.

파블로프가 1903년에야 처음으로 시작한 조건반사 실험은 그가 사망하기 직전인 1936년까지 이어졌다. 노벨상 수상으로 얻은 명성에 힘입어 파블로프는 생리학 실험을 활용해 우리의 주관적 세계, '의식'에 관한 '객관적 결과'를 얻겠다는 야심차고 도전적인 연구 주제를 밀어붙일 수 있었다.

파블로프의 과학 활동에 대해 널리 알려진 일화는 그가 개에게 먹이를 줄 때마다 종을 울리는 것을 반복해 종소리만 들어도 침을 흘리게 하는 실험 과정에서 고전적 조건형성이라고 불리는 현상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알려진 것과 다르게 파블로프는 개를 실험동물로 사용했지만 개를 훈련하는 데에는 일절 관심이 없었다. 더군다나 실험에서 종소리를 사용하는 일 또한 없다시피 했다.

그는 실험 도중 외부의 미세한 자극도 개의 행동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발견하고 바깥을 지나가는 마차의 진동과 같은 사소한 외적 요인까지 모두 통제하기 위해 두꺼운 콘크리트 벽과 해자로 둘러싸인 실험 시설을 세웠다. 이 시설은 '침묵의 탑'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실험 조건 통제를 중요시하는 파블로프에게 자극의 지속 시간과 질을 정확하게 제어하기가 어려운 종소리는 적절한 실험 도구가 아니었다. 그는 양적으로 비교적 정확한 측정이 가능한 전자 버저, 메트로놈, 불빛, 전기 충격 등을 자극 수단으로 활용했다.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뤄진 수천 번의 실험 가운데 종소리는 정말 드물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상황에서만 쓰였다.

파블로프의 실험이 종소리를 활용했다는 통설은 파블로프의 연구를 영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러시아어로 전자 버저를 의미하는 '즈보녹(звонок)'을 종으로 오역하면서 만들어졌다. 1906년 10월 6일 의학 분야의 국제학술지 '랜싯'에 실린 파블로프의 강연 원고가 오역의 시초였다. 

이후 파블로프의 연구에 영향받은 미국 심리학자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종소리 일화를 언급하면서 틀린 설명이 더욱 널리 퍼졌다. 서구에 소개된 소련의 영화 '뇌의 역학'도 오해 확산에 한몫 거들었다.

'뇌의 역학'은 1926년 소련에서 만들어진 대중 과학 무성영화로 파블로프의 실험을 소개하면서 종소리에 놀란 개의 반응을 촬영한 장면이 있었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무성영화의 한계로 버저나 메트로놈의 소리를 전달할 수가 없어 종을 대신 사용했는데 이 영화가 파블로프에 관한 다큐멘터리로 잘못 알려지면서 파블로프가 종소리를 사용했다는 통념이 일반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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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프 실험실의 연구원들은 실험용 개가 먹이를 먹기 전에 미리 침을 흘리는 현상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파블로프만 이 현상의 의미를 파악하고 조건반사연구에 천착한 결과 심리학의 미래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파블로프와 실험실 연구원들과의 관계를 왜곡하는 설명이다. 파블로프의 실험실 연구원들은 실험에 대한 결과만 보고할 수 있을 뿐 그에 대한 생리학적 해석이나 판단을 내릴 권한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파블로프는 그의 생리학 실험실을 대규모 인력을 갖춘 공장과 유사한 형태로 운영했다. 당시 러시아 제국 정부는 의학을 현대화하기 위해 의사들의 연구를 장려했고 그 결과 러시아 제국에는 임시 연구 인력이 넘쳐나는 상황이었다. 여기에 더해,  1893년 알프레드 노벨의 예상치 못한 후원으로 파블로프는 생리학 연구가 가능한 '실험실 공장'을 차릴 수 있었다.

파블로프가 실험실을 연 1891년부터 노벨상을 수상하는 1904년까지 약 100명의 의사가 파블로프의 실험실에서 연구를 진행했다. 이들은 대부분 군의관으로 1, 2년간 파블로프의 실험실에서 근무하며 군의학교에 박사논문을 제출하고 학위를 받았다.

파블로프는 연구소장으로서 권위주의적인 방식으로 연구소를 통제했다. 그는 실험실 연구원들의 고용이나 연구 주제선정 및 분배 개별 실험들에 대한 평가 및 처벌과 보상에 관한 결정권을 쥐고 있었다. 파블로프의 아이디어에 따라 연구소의 실험 활동이 진행됐고 실험 아이디어에 대한 토론은 가능했지만 그의 의견과 다른 제안은 용납되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 아래 파블로프의 실험실에서는 엄격한 과학적 노동 분업이 이뤄졌다. 파블로프가 직접 실험을 수행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대신에 매년 수십 명의 임시직 연구원들이 그의 엄격한 지침에 따라 수백 건의 실험을 수행하고 결과를 기록 및 측정한 후에 정돈된 데이터를 파블로프에게 제공했다. 파블로프의 역할은 이렇게 수집된 실험 데이터에 대한 전문적인 해석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의 생리학 실험 공장에서 실험 조교가 아닌 파블로프가 조건반사를 착상해 낸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오직 파블로프만이 이와 같은 야심 찬 해석을 할 권한을 가졌으니까 말이다.

파블로프와 소련 정부는 기묘한 공생 관계를 유지했다.소련 정부는 소련을 빛낸 위대한 과학자 파블로프를 필요로 했고 파블로프는 소련에 남는 댓가로 전폭적인 연구 지원을 받았다. 과학동아 제공

파블로프는 정치적으로 온건한 자유주의자였다. 그는 고령인 70대에도 국내외의 공식 석상에서 1917년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새로 세워진 소련 정부와 공산주의를 서슴없이 비판하며 명성을 날렸다. 파블로프의 신랄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내전 이후 황폐해진 그의 연구소를 복구하고 확장하는 일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1920년대 중반에는 파블로프의 '침묵의 탑'이 거의 완전히 복구됐으며 그는 러시아 제국 시절보다 훨씬 좋은 실험 장비와 실험실, 연구자들을 거느리게 됐다.이와 같은 소련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은 종종 파블로프의 조건반사 연구가 당시 정부의 정치 이데올로기인 '변증법적 유물론'과 잘 부합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된다.

그러나 실제로 그의 연구를 유물론적 교리에 맞춰 개조하려는 노력은 스탈린 집권기, 파블로프의 연구소에서 활동한 공산당원들에 의해 시작됐다. 소련 정부가 파블로프의 연구 활동을 지원했던 보다 큰 이유는 그가 소련의 유일한 노벨상 수상자이자 국제적인 과학자였기 때문이다.

1920년 파블로프는 소련 정부에 과학 연구를 위해 국외로 이민을 신청하는 서신을 보냈다. 처음에 소련 정부의 태도는 무관심했으나 곧 태도를 바꿔 파블로프의 이민을 막았다. 위대한 과학자가 소련을 떠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대신 소련 정부는 그의 연구에 대한 외국의 지원을 허락하고 연구 발표를 위한 파블로프의 해외 여행 및 체류도 용인했다.

이후 소련 정부와 파블로프는 독특한 공생 관계를 발전시켰다. 사실 고령의 파블로프에게 이민 생활은 매우 불확실했고 그의 대규모 생리학 실험 공장을 운영할 자원은 오직 소련 내에서만 얻을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파블로프는 소련 정부를 신랄히 비판하면서도 그대로 소련에 남았다. '공생'은 다른 형태로도 진행됐다.

1920년대에 파블로프는 소련 정부가 그를 감시하기 위해 파견한 페도로프를 실험실 동료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정치적 성공을 도왔다. 대신 실험을 위한 새 기구나 정부의 허가가 필요할 때 페도로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심지어 파블로프는 소련 지도자 중 한 명이었던 니콜라이 부하린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1935년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제15 국제생리학대회에서 86세의 파블로프는 소련 정부의 과학에 대한 지원을 공개적으로 칭송했다. 국가의 연구 지원을 받으면서도 과학적, 정치적 주장을 거리낌없이 표현하는 파블로프의 존재는 소련에게 있어 공산주의와 과학의 관계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국제적으로 홍보하는 귀중한 상징자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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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동아 5월호, [과학사극장] 파블로프는 개 실험에 종소리를 쓰지 않았다? 

[이창욱 기자 changwook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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