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제약산업, 우주에 답 있다…보령·스페이스린텍도 '정조준'

김진화 기자 2024. 5. 25.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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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SA 제공

미국항공우주국(NASA)은 40여 년 전부터 우주의 미세중력 환경을 활용해 단백질 결정을 성장시키는 연구를 해왔다. 이런 밑거름이 최근 우주 제약 산업을 꽃피우고 있다. 미세중력 환경은 신약 연구에 어떤 이점을 가져올까. 미세중력을 지구에서 만들 방법은 없을까.

● 우주 궤도의 미세중력 환경, 제약에는 최적 조건

스페이스X는 정부가 아닌 민간 기업이 우주 산업을 주도하는 이른바 '뉴스페이스' 시대를 열어 젖혔다. 뉴스페이스 시대가 도래하면서 손에 잡히지 않던 우주는 이전보다 한층 가까워졌다. 덕분에 미래 우주 산업의 영역이 예상하지 못한 분야까지 빠르게 넓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분야가 제약 산업이다. 글로벌 대형 제약사부터 바이오 스타트업까지 모두가 신약 연구를 위해 우주로 향한다.

우주 제약 산업의 포문을 연 것은 독일 기반의 글로벌 대형 제약사인 머크다. 머크는 2000년대 초반부터 우주에서 단백질 결정을 성장시키는 실험을 수행해 왔고 2017년에는 머크 매출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면역 항암제인 '키트루다'를 우주에 가져갔다.

머크는 우주에서 키트루다의 결정화 실험을 진행하며 지구에서보다 더 균일하고 물성이 뛰어난 결정을 우주에서 만들 수 있음을 밝혔다. 그리고 같은 결과를 지구에서 구현할 수 있는 방법을 발표했다. (doi: 10.1038/s41526-019-0090-3)

대형 제약사에 이어 제약 스타트업의 연구와 기술 검증도 뒤를 잇고 있다. 2022년 말 미국의 제약 스타트업 '마이크로퀸'은 국제우주정거장(ISS)에서 난소암과 유방암을 치료하는 신약 후보 물질을 발굴했다고 발표했다. 또 다른 미국제약 스타트업 '바르다 스페이스 인더스트리'는 2024년 3월 최초로 우주 캡슐을 활용해 약물을 성공적으로 제조해냈다.

우주 공간에서 신약 연구가 이뤄지는 이유는 미세중력이라는 우주의 특수한 환경을 이용하기 위해서다. 흔히 우주에서는 중력이 작용하지 않아 모든 물체가 둥둥 떠오른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우주 공간에서도 여러 천체의 중력이 작용하기 때문에 중력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우주로 뛰어든 해외 제약사. 과학동아 제공

이처럼 0은 아니지만 0에 가까울 정도로 아주 작은 우주의 중력 환경을 미세중력이라고 부른다. 미세중력 환경은 신약 연구에 엄청난 이점이 있다. 고순도의 단백질 결정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ISS와 러시아 우주 정거장 '미르' 등의 미세중력 환경을 활용해서 단백질 결정을 성장시키는 임무에 세 차례 참여했던 윤태성 한국 생명과학연구원 중대질환진단 융합연구단 연구원은 "지구의 중력 환경에서는 액체 내부의 밀도차에 의해 물질이 이동하는 대류 현상이 발생하지만 미세중력 환경에서는 대류 현상이 사라져 불순물이 잘 생기지 않고 단백질 결정화 반응이 잘 일어난다"고 설명했다. 

고순도의 단백질 결정은 약품 개발과 생산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단백질은 생물을 이루는 생체 분자 중 하나로 우리 몸은 10만 개 이상의 단백질로 이뤄져 있다. 이 단백질은 근육과 몸의 장기를 만드는 것은 물론 몸속에서 세포들끼리 신호를 전달할 때도 쓰인다.

따라서 암과 같은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특정 질병의 신호 전달 체계에 쓰이는 단백질의 구조를 파악하고 이를 기반으로 목표 부위에 맞는 신약을 만들어야 한다. 암세포 분열을 촉진하는 신호를 보내는 단백질의 구조를 파악해 이 단백질을 무력화하는 신약을 개발하는 식이다.

단백질의 구조를 분석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단백질을 결정 형태로 만든 뒤 X선 회절 패턴을 관찰하는 것이다. 단백질 결정의 균일성과 순도가 높을수록 더 세밀한 구조까지 볼 수 있다. 미세중력 환경은 이런 고순도 결정을 얻기에 최적의 환경이다.

국제우주정거장(ISS)에서 성장한 단백질 결정(왼쪽)과 지구에서 성장한 단백질 결정(오른쪽) 비교. 우주의 미세중력 환경에서는 대류가 일어나지 않아 지구에서보다 더 크고 균질한 단백질 결정을 얻을 수 있다.NASA 제공

ISS에서 만성 질환 및 당뇨병치료제를 개발 중인 미국 제약사 일라이 릴리는 이메일 인터뷰에서 "단백질 결정화는 신약 개발의 핵심인 단백질 구조를 명확히 파악할 수 있게 도와 약물후보를 식별하는 데 드는 시간을 줄여준다"고 전했다. 이는 제약사 입장에서 상당히 매력적인 조건이 아닐 수 없다. 신약 개발은 결국 시간 싸움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마이크로퀸 대표인 스콧 로빈슨은 미국 주간지 'C&EN'과의 인터뷰에서 "ISS 실험으로 신약 후보 물질 발굴을 5~8년 단축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게다가 미세중력 환경은 신약 개발뿐만 아니라 제조에도 유용하다. 단백질 기반의 약을 생산할 때 미세중력 환경에서 만들면 치료 효과가 높은 고순도 상태로 제조할 수 있다.

우주 신약 개발 및 생산을 추진하고 있는 스페이스린텍의 윤학순 대표는 "머크가 ISS에서 생산 중인 면역 항암제 키트루다는 400g을 생산할 경우 약 300억 원 이상의 부가가치를 가져온다"며 "미세중력이라는 특수한 환경 덕분에 지상에서와 같은 거대 설비 없이도 면역항암제와 같은 신약을 고품질로 생산할 수 있다"고 말했다.

NASA 우주비행사 토마스 페스케가 국제우주정거장(ISS)에서 글로벌 제약사 '머크'의 단백질 결정 성장 실험 시설을 점검하고 있는 모습. 2019년 머크는 ISS에서 면역 항암제 키트루다를 생산하는 실험을 했다. NASA 제공

● 20세기 말 시작된 연구가 제약에 활용되기까지

우주에서의 첫 단백질 결정 성장 실험은 무려 41년 전인 1983년 미국의 우주왕복선 컬럼비아호의 9번째 임무에서 이뤄졌다. 미국항공우주국(NASA)은 우주 환경을 다양한 분야의 기술에 활용하기 위해 컬럼비아호 화물칸에 '스페이스랩 1'이라는 우주 실험실을 장착했다.

이 실험실에서는 천문학, 우주생물학, 지구 관측 등 다양한 분야의 70개 이상의 실험을 수행했는데 단백질 결정 성장 실험도 포함돼 있었다. 실험 결과 우주의 미세중력 환경에서 더 크고 균일한 단백질 결정이 생긴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doi:10.1126/science.225.4658.203)

이후 1990년대에는 여러 우주왕복선과 소련이 발사한 우주정거장 '미르' 등에서 단백질 결정 성장 실험이 수행됐다. 윤태성 연구원은 "20세기 말 단백질 구조 기반 신약 개발의 붐이 일아나면서 단백질 결정 성장을 위해 우주 환경을 활용하려는 시도가 있었다"고 말했다. 이후 1998년에 발사된 ISS에 과학 실험을 할 수 있는 데스티니 모듈이 탑재되면서 ISS는 오랫동안 단백질 결정을 성장시키는 플랫폼 역할을 해왔다. 

한국 우주 의학 기업 '스페이스린텍'은 5월 27일 우주 신약 연구 플랫폼을 우주로 보내 의약품을 생산하는 연구를 해 나갈 예정이다. 이미지는 스페이스린텍이 지구 저궤도 공간에서 운용할 신약 개발 캡슐의 상상도. 스페이스린텍 제공

그러나 실제로 우주에서 제약 실험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비교적 최근인 2010년 중반 이후다. 여기에는 낮아진 우주선 발사 비용이 한 몫 했다. 미국의 투자 금융 회사인 씨티그룹이 2022년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우주 왕복선 발사 비용은 1kg 당 1500달러(약 208만)로 1981년 NASA의 첫 우주왕복선 발사 비용의 30분의 1 수준이다.

윤학순 대표는 "발사 비용 감소는 신약 개발 원가를 절감할 수 있는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라며 "스페이스X와 같은 민간 우주 기업이 우주를 제약 연구 및 생산을 위한 공간으로 만드는 데 큰 공헌을 했다"고 설명했다.

● 우주 제약 5조원 규모로 커질 전망

우주 제약은 앞으로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글로벌 컨설팅 그룹 맥킨지가 2022년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사업을 우주로 확장했을 때 가 장 많은 매출 성장을 이룰 것으로 예상되는 분야 1위가 제약 산업이다. 중단기적으로 최대 42억달러(약 5조 7000억 원)의 매출 성장을 이룰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우주 제약이 가장 활발히 이뤄지는 무대는 ISS다. ISS가 2022년 발표한 '인류를 위한 혜택' 보고서에 따르면 제약사와 연구자들이 2021년 한 해 동안 ISS에서 수행한 단백질 결정 성장 실험은 500건 이상이며 이는 ISS에서 수행된 단일 실험 범주 중 가장 큰 규모다.

2024년 2월 21일(현지 시간) 미국 유타주 사막. 우주에서부터 엄청난 속도로 날아온 지름 90cm의 캡슐이 낙하산을 타고 지상에 무사히 착륙했다. 미국 스타트업 ‘바르다 스페이스 인더스트리’가 2023년 6월 우주에서의 약물 제조 실험을 위해 스페이스X의 팰컨 9에 실어 날린 우주 캡슐인 ‘위네바고 1호(W-1)’였다. 바르다 스페이스 인더스트리 제공

한국에서는 보령, 스페이스린텍 등의 기업이 우주 신약 연구에 뛰어들고 있다. 보령은 2024년 1월 미국 항공우주 스타트업 '액시엄 스페이스'와 손을 잡고 '브랙스 스페이스'라는 회사를 출범했다. 액시엄 스페이스는 2030년 이후 폐쇄될 ISS를 대체할 민간 우주 정거장 '액시엄스테이션'을 개발 중인 기업이다. 보령 관계자는 "앞으로 더 많은 제약사가 우주에서 실험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보령이 힘을 보태겠다"고 전했다.

스페이스린텍은 2022년부터 한국생명공학연구원과 면역세포 치료제를 2024년 4월부터 한국과학기술연구원과 구조기반 신약 연구를 공동으로 진행하고 있다. 스페이스린텍은 2024년 1월 17일 40억 원의 투자 유치에 성공해 5월 27일 국내 우주 발사체 스타트업 '페리지에어로스페이스'의 로켓에 우주 신약 연구 플랫폼을 실어 연구를 이어나갈 예정이다.

한국은 우주 제약 산업에 이제 막 첫 발을 들인 상태다. 윤 대표는 "이미 미국, 유럽, 일본은 우주 신약 연구를 활발히 진행 중이며 일부는 실용화 단계이기 때문에 큰 격차가 벌어지지 않도록 한국도 빠르게 준비하고 관련 연구를 활성화해야 한다"면서 "한국의 뛰어난 의료 분야 인력과 세계적인 공학 기술을 융합하면 향후 우주 제약 산업을 이끌 혁신적인 아이디어와 기술들을 많이 창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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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화 기자 evoluti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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