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성 문루는 없애야 할까? [이강웅의 수원화성이야기]

경기일보 2024. 5. 25.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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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북옹성·남옹성 홍예 위 ‘문루’...“의궤에 없고 원형 아니라 철거” 주장도
홍예 윗부분 구조적 위험 보강하고... 문루 지키는 병사 은폐 장소로 쓰인 듯
문루 없다면 옹성 위 통로 의미 없어... 당초 해야 할 것 놓쳐 추가로 설치
옹성 문 위에 있는 문루는 성역 당시에는 없었다. 이강웅 고건축가

 

옹성은 문 앞에 반원형으로 만든 외성이다. 화성에는 문마다 옹성을 설치하고 옹성에는 문을 설치하도록 계획됐다. 계획대로 화성에선 모든 문에 옹성을 설치했다. 한양 도성에는 동대문(흥인지문)에만 옹성을 뒀다. 옹성은 두 가지 형식으로 나뉜다. 북옹성과 남옹성은 폐쇄형이고 동옹성과 서옹성은 개방형이다.

폐쇄형이란 옹성 양 끝이 모두 성에 붙어 있는 형태다. 개방형은 옹성의 한쪽 부분이 성에서 떨어져 열려 있는 형태를 말한다. 개방형은 열린 부분으로 사람이나 수레가 다닐 수 있다. 폐쇄형은 사람이 통과하려면 옹성에 문을 내야 했다. 북옹성과 남옹성에 홍예와 문이 있는 이유다.

논쟁의 진원지는 현재 복원된 북옹성과 남옹성 홍예 위 작은 문루다. 의궤에는 옹성 홍예 위에 문루가 없기 때문이다. 요즘도 “당초부터 있었다”, “복원 오류다”, 나아가 “원형이 아니므로 철거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왜 문루를 추가했을까? 이유를 찾아보자.

당초 북옹성 홍예문 위에는 문루가 없었다. 오성지와 여장만 있었다. 이강웅 고건축가

옹성 문루 설치 이유를 알려면 문루 아랫부분의 구조를 파악해야 한다. 옹성 정가운데에 너비 18척, 두께 27척의 통로를 뒀다. 그리고 문을 설치했다. 이 홍예 통로 위쪽의 단면을 보자. 양쪽 벽에 널빤지(개판)를 걸쳐 막았다. 널빤지 위에 회삼물을 편 후 벽돌을 깔고 전으로 덮었다.

회삼물이란 석회, 황토, 고운 모래 세 가지를 같은 비율로 섞은 것을 말한다. 이것을 4촌 두께로 깔았다. 두께 13㎝다. 전은 바닥에 까는 넓은 벽돌을 말한다. 넓은 벽돌을 깐 이유는 옹성 위 통로 바닥으로 병사가 다니기 편하게 하기 위함이다. 통로에는 병사가 경계도 서고, 오성지에 물을 담거나 비축할 물통도 두게 된다.

널빤지 아랫면에는 용이나 구름 문양을 그렸다. 그림이나 회삼물은 문의 위계나 의장 효과도 있지만 장기간 노출되는 목재를 비, 습기, 이끼, 부패 등으로부터 보호하려는 과학적 조치이기도 하다.

홍예문 윗부분은 그림이 그려진 널빤지와 그 위에 회삼물, 그리고 벽돌이 깔려 있다. 이강웅 고건축가

문제는 홍예 윗부분이 구조적으로 위험하다는 것이다. 석회는 경화돼 단단해지지만 실제로는 나무판자 위에 그저 13㎝ 두께의 모래를 뿌려 놓은 정도다. 한마디로 홍예 윗부분은 사실상 허공이나 마찬가지다. 이 말은 홍예 위 통로를 병사가 여럿이 다니지 못하고, 뛰어다니지 못하고, 무기를 쌓아 두지도 못한다는 말이다. 더구나 오성지가 있어 물통도 비축하고 물을 쏟아붓는 작업도 해야 한다. 이런 활동을 할 수 없는 바닥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킬 안전한 대책은 없을까? 홍예 위 옹성 통로로 병사가 마음껏 뛰어다니고 물통이나 군장비도 쌓아 둘 수 있는 구조가 필요했다. 가장 좋은 대책은 홍예 위 옹성 통로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하중이 통로 바닥에 전달되지 않도록 하면 된다. 그 방법이 홍예 윗부분 전체보다 넓게 마루로 덮고 마루 위를 사용하는 것이다.

이런 구조로 하면 홍예 위의 모든 하중이 널빤지로 전달되지 않고 마루판, 장선, 동자주, 은주석을 통해 옹성 아래 원지반으로 전달된다. 즉, 상부의 모든 하중이 마루 아래 통로 바닥과 완전히 단절되는 것이다. 통로의 길이가 4.8m인데 기둥 간격이 6.4m인 것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면 마루만 설치하지 왜 지붕까지 만들었을까?

마루를 기둥에 연결하고 목재가 썩지 않도록 지붕을 설치해 문루가 생기게 됐다. 이강웅 고건축가

마루만 설치하고 외기에 장기간 노출되면 빗물로 인해 마루나 동자주가 썩는다. 빗물을 막기 위해 지붕을 설치한 것이다. 아울러 옹성 문루를 지키는 병사들의 적으로부터 은폐할 장소로도 쓰였을 것이다. 이것이 옹성 문루의 탄생 비밀이다. 옹성 문루는 기능상 꼭 필요한 것이다. 성역 당시 설치하지 않은 것은 마치 2층을 지어 놓고 계단을 빼먹은 것과 같다. 화성 성역이 끝난 후 옹성 문루를 추가한 것이다.

아쉬운 것은 추가 공사 때 오성지도 지금의 모습으로 변형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성지 자체를 없애고 여장에 구멍만 5개 뚫어 놓은 기괴한 모습으로 아직도 남아 있다. 그때 문루 기둥 사이(6m)에 제대로 된 오성지(4.5m)를 설치했다면 지금도 옹성 문 위로 물을 쏟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독일인 헤르만 산더의 옛 화성 사진이다. 남공심돈 오른쪽 남암문 위에도 문루를 지었다. 원래는 없던 것이다. 이강웅 고건축가

이처럼 옹성 문루의 존재 이유를 살펴보니 ‘남암문 문루의 비밀’도 풀린다. 남암문도 성역 당시에는 문루가 없었다. 하지만 옛 사진을 보면 문루가 세워져 있음을 볼 수 있다. 남암문 위에 문루를 세운 이유는 옹성 문루와 똑같은 이유다. 그렇다면 다른 암문에도 문루가 있을까?

필자는 남암문을 제외한 다른 네 곳의 암문에는 문루가 없었을 것으로 확신한다. 남암문 외 다른 암문은 통로 폭이 너무 좁기 때문이다. 남암문이 13척1촌인 데 비해 북암문 4척6촌, 서암문은 5척6촌, 동암문 7척, 서남암문 7척이다. 남암문에 비해 너무 좁다. 문루 구조를 만들 최소 규격도 안 된다.

현재 옹성 문루는 원형이 아닌 것은 인정한다. 원형이 아니어서 문루를 없애는 것이 원칙이라는 주장도 있다. 필자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유는 북옹성, 남옹성, 남암문 문루는 당초부터 해야 할 것을 놓쳐 추가로 설치한 경우이기 때문이다. 시간, 공사비, 설계 미비 등 어떤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이런 점이 참작돼야 한다는 의미다.

문화재는 시간성과 장소성이 중요하다. 하지만 차분하게 원인을 살펴 놓친 시공인지, 복원 오류인지 분별력을 발휘해야 한다. 글·사진=이강웅 고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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