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을 ‘또 다른 게르니카’라 부르는 이유 [평범한 이웃, 유럽]

취리히·김진경 2024. 5. 25. 07:29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스페인 게르니카 폭격의 당사자들이 ‘또 다른 게르니카를 원치 않는다’라고 나섰다. 스페인 내전 당시 팔레스타인과 비슷한 아픔을 겪은 이들이다. 반복되는 비극을 막을 수 있을까.
2023년 12월8일 스페인 게르니카 ‘플라사 데 우니온’에 모인 시민들이 팔레스타인 국기를 만드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Gernika 유튜브 영상 갈무리

지난해 12월8일,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역의 작은 도시 게르니카(공식 명칭 게르니카루모). 춥고 비 내리는 날씨임에도 공립학교 앞 광장인 플라사 데 우니온(Plaza de la Unión)에 시민 수백 명이 모였다. 빨간색, 초록색, 하얀색, 검은색 비닐 우비를 입은 주민들이 나란히 줄을 맞춰 선 뒤 앞사람의 우비 뒷부분을 잡아 펼치자 거대한 팔레스타인 국기가 만들어졌다. 전쟁으로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된 팔레스타인에 연대하는 뜻에서 인간 모자이크를 만드는 퍼포먼스를 펼친 것이다. 국기 한쪽 끝에는 대형 현수막이 펼쳐졌다. 피카소의 작품 ‘게르니카’의 일부분으로, 어머니가 죽은 자식을 품에 안고 오열하는 장면이었다. 이 행사는 ‘게르니카 팔레스타인 대중의 호소(Gernika Palestina Deialdi Herritarra)’라는 주민 이니셔티브의 일환이었다. 주최 측은 성명서에서 이렇게 밝혔다. “우리는 게르니카 폭격의 당사자이고 그 파괴의 직접적 결과를 알고 있다. 또 다른 게르니카를 원치 않는다는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이 학살 앞에서 우리는 침묵해서도, 가만히 앉아 있어도 안 된다.”

게르니카 시민들이 팔레스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일처럼 공감하는 이유는 과거 비슷한 아픔을 겪었기 때문이다. 스페인 내전 중 게르니카는 폭격으로 시민 3분의 1이 학살당했다. 게르니카 폭격은 제2차 세계대전의 서막이었던 스페인 내전의 비극 중 하나로 꼽힌다. 지난 5월2일 게르니카와 그곳 평화박물관을 방문해 약 90년 전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되짚어보았다.

1931년, 스페인의 입헌군주제가 무너지고 제2공화정이 탄생했다. 하지만 이를 반기지 않았던 귀족층과 교회의 지지를 업고 1936년 7월17일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이하 프랑코)이 군부 쿠데타를 일으킨다. 스페인 내전(1936~1939)의 시작이다. 프랑코의 국민군은 히틀러의 독일과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로부터 군사적·물질적 지원을 받으며 처음부터 우세했다. 반군(국민군)과 정부(공화군)의 싸움은 분명 내전이었지만 스페인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파시즘과 민주주의의 싸움이고, 여기서 프랑코의 반란군이 승리하면 유럽 전체에 파시즘이 번질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 이를 두고 볼 수 없었던 외국인들이 자발적으로 공화군에 합류했다. 전 세계 50개국에서 4만여 명이 모여 꾸려진 ‘국제 여단’이 그것이다. 이탈리아 출신 국제 여단 병사들의 구호, ‘마드리드를 거쳐 로마로 간다!’는 스페인에서 프랑코를 막아내면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도 꺾을 수 있다는 희망을 담고 있었다. 국제 여단에는 미국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 영국 작가 조지 오웰 등도 포함돼 있었고, 이들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카탈로니아 찬가〉 등의 작품에서 직접 겪은 스페인 내전을 묘사했다.

5000여 명 중 1654명이 하루에 숨졌다

국민군은 공화파 정부가 지키고 있는 마드리드를 점령한 뒤 전쟁을 끝내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여러 차례 실패 후 프랑코는 전략을 수정한다. 적의 취약 지점을 우선 제압한 다음 그쪽의 병력을 핵심 지점에 집결시킨다는 계획이었다. 그래서 눈을 돌린 곳이 국민군에 포위당해 고립된 바스크 지역이었다. 바스크가 철강·석탄 산업의 중심지라는 점도 중요했다. 전쟁에 필요한 추가 자원을 얻을 수 있어서다. 같은 이유로 군비 증강을 준비 중이던 독일 나치도 여기에 눈독을 들였다. 마침 독일 히틀러의 공군은 신무기 성능을 시험할 곳이 필요했고, 공화파 정부를 지지하는 게르니카가 눈엣가시였던 프랑코는 이곳을 폭격 장소로 정한다.

영국인 역사학자 앤터니 비버는 〈스페인 내전〉에서 여러 문헌과 목격자 증언을 바탕으로 게르니카 폭격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1937년 4월26일 월요일, 하필 장날이었다. 오후 4시30분쯤 교회 종탑에서 공습경보가 울렸다. 농민 상당수가 장에 나가 일을 본 뒤 소나 양을 끌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경보를 들은 사람들은 서둘러 피란민 수용소로 지정되어 있던 성상 안치소로 들어가 숨었다. 독일 콘도르 군단의 폭격기 한 대가 중심가에 폭탄을 떨어뜨린 뒤 사라졌다. 폭격이 끝났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다시 거리로 나와 부상자를 돕거나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15분 뒤 다시 폭격이 시작되었다. 대형을 갖춘 비행대대가 훨씬 많은 폭탄을 떨어뜨렸다. 사람들은 성상 안치소가 폭격을 견딜 만큼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들판으로 뛰쳐나갔다. 독일 하인켈51 전투기들은 달아나는 사람들을 쫓아가며 기총소사를 하고 수류탄을 떨어뜨렸다. 병원에서 나온 수녀들, 가축들도 가리지 않았다.

게르니카 중심부 외벽에 전시된 ‘게르니카’ 모작. 원작은 마드리드 레이나 소피아 국립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김진경 제공

이게 끝이 아니었다. 진짜 공격은 오후 5시15분쯤 시작됐다. 육중한 소음 때문에 ‘전차’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던 융커52기로 구성된 3개 비행대대가 두 시간 반에 걸쳐 20분 간격으로 체계적 융단폭격을 가했다. 소형 및 중형 폭탄, 250㎏짜리 폭탄, 대인용 폭탄, 소이탄이 사용됐다. 비버는 위 책에서 “소이탄은 2파운드의 알루미늄 튜브 모양이었고 융커52기들에서 마치 금속 색종이처럼 뿌려졌다. (중략) 소나 양들이 불에 타 하얀 인광을 내뿜으며 화염에 휩싸인 건물들 사이로 미친 듯이 뛰어다니다가 쓰러져 죽었다”라고 쓰고 있다. 바스크 정부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이날 게르니카 주민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1654명이 사망했다(당시 게르니카 인구는 5000명이 채 안되었다). 부상자는 889명이었고 전체 건물의 4분의 3이 파괴됐다.

게르니카에서 일어난 일은 금세 스페인 밖으로 퍼져 나갔다. 당시 파리에 있던 스페인 화가 피카소가 이 소식을 듣고 3주 만에 완성한 가로 7.8m, 세로 3.5m짜리 흑백 유화 그림이 ‘게르니카’다. 작품은 파리 만국 무역박람회에 출품돼 전 세계에 이 작은 도시의 비극을 알렸다. 폭격 때 게르니카에 있던 영국인 기자 조지 스티어의 역할도 컸다. 그 덕분에 폭격 이틀 뒤인 4월28일 미국 〈뉴욕타임스〉 1면에 “유서 깊은 바스크 마을 전멸, 반군이 기관총으로 민간인 공격”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폭격 후 프랑코가 국민군의 개입을 부인하고 공화군의 방화 자작극이라고 덮어씌우려 했으나, 스티어가 자신이 직접 목격한 독일군의 폭탄 잔해를 증언함으로써 사건 왜곡을 막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스페인 내전이 결국 국민군의 승리로 끝나고 수십 년간 프랑코 독재체제가 이어지면서 진실은 오랫동안 묻혔다. 1975년 프랑코가 사망한 다음에야 관련자들의 증언으로 사건이 재구성되기 시작했다. 게르니카 평화박물관도 1998년에 세워졌다. 이 박물관에는 폭격이 독일군과 스페인 국민군의 주도로 행해졌음을 알리는 다른 여러 증거와 함께 스티어의 사진과 그가 쓴 기사도 전시되어 있다. 피카소의 ‘게르니카’ 역시 오랜 독재로 인해 전 세계 주요 도시를 떠돌다 피카소가 사망(1973)한 뒤인 1981년에야 스페인, 그것도 게르니카가 아닌 마드리드로 보내졌다. 게르니카에는 현재 그 모작만 전시돼 있다.

스페인 내전은 좌파 대 우파의 싸움으로 단순 묘사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더 복잡했다. 이념 외에도 민족과 종교로 편이 갈렸다. 특히 바스크 지역은 오랫동안 스페인으로부터의 분리, 독립을 주장해온 곳이다. 지역 언어인 바스크어(에우스카라, Euskara)는 스페인에서 쓰이는 다른 공용어는 물론 유럽의 어떤 언어와도 다른 고립어다. 이들은 여타 스페인인들과 동질감을 느끼지 못했지만 내전 중에는 둘 중 한쪽을 지지해야 했다. 독실한 가톨릭교도 비중이 높은 바스크인들은 종교적으로는 프랑코의 국민 진영과 가까웠으나, 공화 진영이 전쟁 후 자치를 보장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그쪽 편에 섰다. 성전(聖戰)을 내전의 주요 명분으로 내세운 국민 진영으로서는 같은 신을 믿는 바스크인들이 반대편에 선 것이 괘씸하기도 하고, 이들을 공격하는 것이 꺼림칙했을 수 있다. 프랑코는 가톨릭 바스크인들에 대해 “이들 기독교 민주주의자들은 기독교도라기보다는 민주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파괴적인 자유주의에 감염되어 스페인에서 자행된 종교적 박해의 숭고한 국면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라고 했으며, 부르고스의 대주교는 바스크 사제들을 ‘적색분자들에게 고용된, 스페인 성직자 가운데 쓰레기들’이라고 불렀다(앤터니 비버, 〈스페인 내전〉).

‘또 다른 게르니카’ 팔레스타인

내전에서 패했으나 바스크인들은 독립을 포기하지 않았다. 1959년 분리주의 조직 에타(ETA, Euskadi Ta Askatasuna, 바스크 조국과 자유)를 결성하고 프랑코 정권의 강력한 중앙집권 정책에 맞서 무장투쟁을 벌였다. 군인, 정치인, 경찰 등을 납치, 암살하고 폭탄테러도 이어갔다. 그러나 분리를 원하면서도 에타의 잔혹한 투쟁 방식에는 동의하지 않는 바스크인들이 늘어갔다. 오랜 테러 공포 때문에 지역 경제가 무너진 점도 주민들의 반발을 키웠다. 결국 2011년 에타는 조건 없는 영구적 휴전을 선언하고 2018년 무장을 해제했다. 약 60년 동안 총 854명을 살해한 다음이다.

게르니카 평화박물관 바닥에는 폭격의 잔해가 전시돼 있다. ⓒ김진경 제공

게르니카의 역사를 보면 바스크인들이 왜 팔레스타인을 ‘또 다른 게르니카’라고 부르는지 알 수 있다. 민족주의, 종교 갈등, 무장 독립 투쟁, 민간인 학살 등이 고스란히 겹친다. 게르니카에 평화박물관이 세워지고 에타는 해체되었지만 비극의 역사는 지구 다른 곳에서 반복되고 있다. 평화박물관에는 유럽 각국 학교에서 단체 견학을 오는 학생들이 많다. 박물관 한쪽에는 이 학생들이 그림을 그리거나 편지를 써서 남길 수 있는 공간이 있다. 그중 한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LET GAZA LIVE. No more $ for Genocide(가자를 살게 하라. 집단 학살을 위한 자금 지원 반대)”

팔레스타인의 고통이 나와 상관 없는 먼 땅의 일로 여겨질 수 있다. 정치와 거리를 두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피카소도 그랬다. ‘게르니카’를 그리기 전까지 그는 정치와 예술을 분리하는 화가였다. 하지만 게르니카 폭격이 그를 바꿔놓았다. 2차대전이 끝날 무렵 피카소는 한 인터뷰에서 예술과 정치에 관한 질문을 받고, (발언이 오해되는 일이 없도록) 말로 대답하는 대신 종이에 짧은 선언문을 써 내려갔다.

“예술가란 무엇인가? 눈만 있는 화가, 귀만 있는 음악가, 마음속 방마다 리라만 있는 시인, 아니면 근육만 있는 권투선수 같은 멍청이? 오히려 그 반대다. 세상의 끔찍하고 열정적이며 즐거운 사건들에 늘 예민한 정치적 존재이며, 그 사건들의 이미지 속에서 자신을 완성하는 존재다. 어떻게 타인에게 무관심할 수가 있으며, 넘쳐 흐르는 삶으로부터 그 어떤 차가운 무심함으로 자신을 분리할 수 있는가? 아니다, 그림은 아파트를 장식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그것은 적에 대한 공격적이고 방어적인 무기다.”

예술가에만 해당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어떻게 타인에게 무관심할 수가 있는가.

취리히·김진경 (자유기고가) editor@sisain.co.kr

▶읽기근육을 키우는 가장 좋은 습관 [시사IN 구독]
▶좋은 뉴스는 독자가 만듭니다 [시사IN 후원]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