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컷] 쪽방 사람들이 빵보다 필요한 건...

조인원 기자 2024. 5. 25. 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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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한 장 6. 쪽방 사진가 김원
서울역 건너편 동자동에는 1천 개가 넘는 쪽방들이 있지만 사람들이 잘 모른다. 알아도 아는 체 하지 않는다. 봐도 못 본 체한다. 투명인간 같은 존재들이다. 쪽방은 개인의 책임을 넘어선 사회적 책임의 부분이다. 봉사자의 시혜만 있다. 국가도, 사회적 책임도 없다.(2017)

14년간 매주 쪽방을 가는 사진가가 있다. 김원(59)은 지난 2010년 여름 서울역 뒤편 용산구 동자동 쪽방촌을 방문한 이후 주말마다 그곳을 찾는다. 김 씨는 전국의 강과 하천을 다니며 홍수 대책 등을 연구하는 토목공학 박사로 모 국가기관의 연구원이 본업이다. 일하면서 가끔 찍던 풍경 사진은 쪽방 사람들을 만난 후 더 이상 찍지 않는다. 자신을 ‘쪽방 사진사’로 소개했다.

사진가들은 한 장소를 오래 찍으면 새로운 곳으로 다시 떠나지만, 김 씨는 매주 같은 사람들을 만난다. 사람들이 동자동을 떠나면 이사 간 집이나 병원으로 가서 만난다. 만나서 그들과 무엇을 하나 물었더니 주로 “이야기를 들어 준다”고 했다.

노 씨는 늘 혼자였다. 친구도 없었고 찾는 사람도 없었다. 햇빛이 드는 4층 쪽방으로 이사했지만 여전히 혼자 지냈다.(2013)/ 사진가 김원

쪽방 사람들은 사진가를 만나면 “마치 물풍선을 찌르면 물이 쏟아지듯”이 이야기를 계속 했다. 처음엔 사진이 주였지만 갈수록 사진 보다 이야기를 들어주는 게 더 중요했다. 그저 찾아가서 그 분들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밖에 없다고 한다. 살아온 이야기, 일주일 간 있던 이야기 등등. 매번 카메라는 갖고 가도 10년 넘게 만나는 사람들의 일상이 달라질 때만 기록하고 있다. 십 년 넘게 쪽방을 찾아 그들과 소통한 사진가의 진심과 노력들은 고스란히 사진들에 기록되어 있다.

막걸리 박스 위에 낡은 브라운관 텔레비전은 노 씨가 세상과 만나는 유일한 통로였다. 어느 날 아날로그 방송이 종료되어 텔레비전이 나오지 않게 되었다. 통로가 사라졌다. 그는 친구가 필요했다.(2012)/ 사진가 김원
노씨는 가진 것이 없었다. 텔레비전이 전 재산이었다. 날계란으로 밥을 비벼 간장 찍어먹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의 쪽방에는 텔레비전, 날계란, 간장이 전부였지만 그는 편안하게 잘 수 있었다.(2013)/ 사진가 김원

김 씨도 처음엔 한두 달 사진 찍고 마무리하려 했다. 그런데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인사한 곳에 사는 한 주민이 언제 또 오냐고 물었다. 얼떨결에 “다음 주에 또 온다”고 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 후 매주 찾아가서 만났다. 그렇게 만난 곽 씨는 시각장애인이었다. 30대부터 당뇨합병증에 고혈압도 심했다. 고아에 초등학교도 못 가서 노숙과 쪽방 생활을 전전하다 50대인 지금은 걷지도 못해서 요양병원에 입원했다.

윤 씨(61)는 당뇨합병증으로 두 발을 절단한 장애인이다. 직업으로 동양화를 그리던 화가였으나 IMF로 사업이 망하면서 쪽방 생활을 시작했다. 우연한 기회에 내가 선물한 그림 도구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그는 회복되었다. 쪽방에서 쪽방보다 큰 화선지를 펼쳐 놓고 그림을 그리며 그는 행복했다. 2017년 이후엔 세 번의 개인 전시회를 했다. (2017)/ 사진가 김원

안 오면 기다리니 어느 순간부터는 안 갈수 없었다고 했다. 약속을 못 지키면 실망하니까, 사람들에게 실망하며 살아온 그분들에게 자신까지 더 이상 실망을 시키면 안 되니까 라고. 그러다 보니 병원을 가면 자신이 보호자로 되어 있었다. 문제가 생기면 김 씨한테 연락이 왔다. 동자동 말고 이사 간 사람까지 열 명 정도 된다고 했다.

쪽방은 밖에서 보면 사람들이 잘 모른다. 방 안을 들어가 봐야 얼마나 열악한지 안다. 사람들은 거기서도 무시당해서 누군가 와서 자신들의 처지를 들어주면 좋아한다. 사진가는 해외출장이나 다른 곳을 가서 주말 방문을 가끔 빠뜨리면 미리 다음 주는 사람들이 기다릴까봐 알려준다고 했다. 다음은 사진가와 나눈 내용이다.

임씨(79)는 쪽방에서 시를 썼다. 쪽방에서 혼자 사는 외로움을 달력 뒷면에 시로 남겼다. ‘나는 동자동 쪽방에 산다. 외로울 땐 남산을 쳐다본다. 다행이다. 남산타워가 보인다.’ 그는 가난했지만 열심히 일했다. 하루 종일 손수레로 폐지를 모아 팔아 생계를 이어갔다. 몇 년 전 수급자 신청을 하면서 자신이 국가유공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허탈해 했다. 지금도 그는 열심히 산다.(2014)/ 사진가 김원

사진을 보며 자존감을 찾는 쪽방 사람들

난 아직도 조심스럽다. 가난을 세상에 고발하고 싶은 마음과 그분들이 좋아하는 사진을 찍고 싶기도 하다. 제대로 된 사진이 없어서 내가 찍어서 주면 “이게 나야?”라고 되묻는다. 다른 분은 “이게 진짜 나에요? 내가 이렇게 잘 생겼으면 이제껏 그렇게 살지 않았을 텐데...”라면서, 대부분 가족에게 미움 받고 가출하고 노숙하고 병들면 병원에서 돌아가셨다. 그렇게 나와 인연을 맺고 세상을 떠난 분들이 많다.

“이게 나야? 내가 이렇게 잘 생겼어? 내가 이렇게 잘 생긴 줄 알았으면 이렇게 살지는 않았을텐데...” 나이 육십이 되던 해에 노 씨는 내가 가져다 준 자신의 사진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그 다음부터 만날 때마다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다. 2년 후 병원에서 혼자 쓸쓸히 돌아가셨다. 평생 소원이던 ‘따뜻한 말 한마디’ 들어 보지 못하고.(2013)/ 사진가 김원

지난 3월 서울의 한 전시장에서 1인 가구를 주제로 다른 사진가들과 그룹 사진전을 했는데 동자동 주민들이 승합차를 타고 함께 왔다. 그분들을 만나서 오히려 나를 받아주고 관계를 맺어서 감사하다. 카메라에 대한 거부감이 큰 곳이 쪽방 촌인데 나에겐 그런 거부감이 없고 만나고 가려면 “벌써 가려고해, 언제 또 와”라고 한다. 무작정 사진만 찍는 게 아니라 그들과 소통하고 다녀온 후 짧게 글을 써서 정리하는 과정이 나에게도 도움이 된다.

낮에도 빛 한줌 들어오지 않는 반 지하 쪽방에서 이씨(58)는 전등조차 켜지 않고 지냈다. 핸드폰 불빛에 의존해 살았다. 핸드폰으로 드라마를 보고, 음악을 들으며 지냈다.(2023)/ 사진가 김원

유통기한 다 된 빵을 주는 사람들

종교단체나 기관에서 와서 빵이나 옷을 주고 가지만 그뿐이다. 사람들은 그곳에 그대로 있다. 자존감을 다쳤기 때문이다. 사회와 가족에 무시 받아 계속 무시 받았는데 공짜로 뭘 갖다 주면 그것에만 익숙할 뿐이고 떨어진 자존감은 그대로다.

한 종교단체에서 빵을 갖다 줬다. 같이 있던 주민이 나보고 그랬다. “빵 유통기한을 봐요 언제까지 인지” 포장이 유통기한을 봤더니 가져온 그날이 마지막 날이었다. 도시락을 갖다 주면서도 아무도 뭘 먹고 싶은지 묻지 않는다. 주는 대로 먹으라는 식이다. 사람에 대한 존중은 없고 이벤트만 있다. 그게 진정한 도움일까?

황 씨의 아들이 자다가 갑자기 숨졌다. 엄마 황 씨는 장례식장에서 울지도 못했다. 한 해가 지나고 아들의 제사상을 차려두고 혼자 한없이 울었다.(2021)
쪽방 촌에도 목련이 피었다. 정 씨(48)가 옥탑방 작은 창문으로 목련을 보고 있다.(2019)/ 사진가 김원

전국의 강을 다니는 본업과는 별개로 하는 일이지만 그분들이 돌아가실 때까지 계속 만날 것 같다. 사실 그동안 만났던 쪽방 주민들도 돌아가시는 마지막 모습까지 사진에 담았다. 병원 중환자실에 있고, 내가 보호자였다. 대부분 나 죽으면 어떻게 해 달라고 한다. 쪽방을 매주 가서 무슨 대단한 봉사를 하는 게 아니다. 그들과 대화하고 들어주는 게 대부분이다. 내 페이스북 친구들 몇 명이 쪽방 사람들을 후원하기도 한다.

사진가 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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