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적한 서귀포 마을의 ‘만드는 축제’…토박이도 외지인도 의기투합 [ESC]

한겨레 2024. 5. 25.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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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제주 신효마을 공예축제
서귀포 외곽 신효마을 그림·나무·패브릭 공방들, 열흘 일정 축제
지갑·라탄과 돌하르방·빗자루 등 시대 아우르는 체험 모두 무료
각종 행사 1300여명 몰려…공예가 만든 ‘역동적 일상’ 시끌벅적
지난 18일 제주 서귀포에서 열린 ‘신효마을 공예축제’ 참가자들이 민화공방 ‘제주그림’에서 유리컵에 귤꽃 그리기 체험을 하고 있다. 이수현 제공

“같은 귤잎이지만 모양이 다 달라요. 자기만의 방식으로 표현해보세요.”

지난 18일 제주 서귀포시 신효마을에 위치한 화실 ‘그림휴가’에서는 미술 체험이 한창이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미술을 한번도 접해볼 기회가 없었다”는 체험객들을 상대로 화실 대표이자 작가인 김미형(55)씨가 설명을 이어갔다. “망친 그림이라는 건 없어요. 바탕색보다 조금 옅은 게 좋다고 말씀드리지만, 더 짙게 하는 분도 있어요. 그런 이파리들이 저는 너무 귀엽고 예뻐요. 저도 생각하지 못했던 색이거든요.” 이들은 직접 공방 옆 귤밭에서 찍은 사진을 참고해 귤꽃 그림을 그리는 중이다. 체험객들은 숨죽인 눈빛으로 귤잎 모양의 스티로폼 틀에 아크릴물감을 묻혀 화폭을 수놓기 시작했다.

신효마을의 화실 ‘그림휴가’에서 김미형 대표(맨 오른쪽)가 체험객들에게 귤꽃 그림이 담긴 아크릴화를 설명하고 있다. 이수현 제공

신효마을에서는 지난 17일부터 열흘간 일정으로 ‘일상 속 공예, 따로 또 같이’를 주제로 한 공예축제가 열렸다. 문화체육관광부의 ‘2024 공예주간’ 사업의 일환이다. 제주도로부터는 올해 주민참여예산사업으로 ‘지역문화자원을 활용한 세대 간 문화단절 해소 프로젝트’ 사업비도 지원받았다. 지원받은 예산으로 추진된 사업이지만, 그 시작이 조금 독특하다.

길바닥은 아이들의 도화지가 되고

신효마을은 서귀포 외곽의 작은 동네다. 서귀포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많은 주민이 귤 농사를 짓고, 고령자가 많다. 4월에는 벚꽃이 흐드러지고, 한겨울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따뜻한 기후를 자랑한다. 산책로가 아름다운 오름 월라봉과 서귀포 감귤박물관 등이 위치해 있지만, 바닷가와 다소 거리가 있고 특별한 문화시설도 없어 관광객이 별로 찾지 않는 조용한 마을이다.

신효마을의 패브릭 공방인 ‘히읗공방’에서 홍지원 대표(왼쪽)가 재봉틀 다루는 방법을 교육하고 있다. 이수현 제공

그런데 몇년 전부터 공방들이 하나둘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가죽공예 ‘귤림공방’을 시작으로 미술공방 ‘제주그림’과 ‘그림휴가’, 패브릭 공예를 다루는 ‘히읗공방’, 그리고 목공을 하는 ‘나무공방 쉐돈’ 등이 문을 열었다. “공방들이 힘을 합쳐 공예를 테마로 한 마을 축제를 열어보면 어떨까?” 아이디어를 처음 낸 것은 이미 문화체육관광부의 ‘공예주간’ 사업에 참여하고 있던 귤림공방이었다. 여기에 다른 공방들이 화답하면서 축제가 기획됐다. 공예체험은 무료로 진행했다. 축제기간 중 ‘모든 것’이 무료였다.

히읗공방에선 천으로 된 파우치나 마스크 만들기, 귤림공방에서는 천연 소가죽 소재의 지갑과 티코스터(컵받침) 제작 체험을 마련했다. 민화를 다루는 제주그림에서는 부채와 액자, 유리컵 등에 그림을 그렸다. 나무공방 쉐돈과 함께 민화를 담은 원목조명 체험도 마련했다. 두개 공방을 오가는 연계체험 프로그램으로, 민화를 먼저 그리고 인근 목공방으로 이동해 그림을 부착한 원목조명을 조립하는 식이다. 가죽에 그림을 그린 뒤 지갑을 제작하는 체험도 있었다.

신효마을회관 앞에서 열린 바닥그림 행사에서 어린이들이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송호균 제공

영화관을 가려고 해도 멀리 월드컵경기장이 있는 신서귀포까지 차를 몰아야 했던 신효마을이다. 이곳 주민들에게 ‘문화생활’이란, 자신의 생활권이 아닌 서귀포 시내라도 나가야 누릴 수 있는 일종의 호사였다. 신효마을 주민 이진주(60)씨는 “마을이 생긴 뒤 놀거리라고는 명절의 노래자랑과 체육대회밖에 없었다. 축제를 연다니 정말 설레고 즐겁다”고 했다.

이 마을의 ‘거점 공방’ 외에도 제주도에서 활동하는 20명의 공방 대표, 작가들은 신효 마을회관이나 카페 등지에서 각각 ‘한평공예’ 행사를 열었다. ‘제주를 담은 바다비누 만들기(김은진)’, ‘폐종이를 활용한 리사이클 종이화분 만들기(장보람)’, ‘여름 대비 나만의 라탄백 만들기(이승진)’ 등 프로그램은 다채로웠다. 마을회관 앞에서는 동네 어린이들이 단체로 크레파스를 들고 길바닥을 도화지 삼아 바닥그림을 그렸다. 아이들의 ‘담벼락 낙서’가 사라진 지 오래된 세상이다. 인근 신례초등학교 6학년인 양예준군은 “같이 재미있게 크레파스 그림을 그린 친구들과 동생들이 고맙고 예쁘다”고 했다. 덤으로 음료수와 아이스크림까지 하나씩 받아 든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회관 주변에서 끝없이 울려 퍼졌다.

죽공예·석공예, 제주 장인들도 나서

지난 18일 제주 서귀포 신효마을회관 앞에서 열린 전통공예 체험행사에서 구덕장 명인 오영희 선생(왼쪽)이 제주 구덕 만들기를 시연하고 있다. 이수현 제공

제주에 뿌리를 둔 전통공예 장인들도 팔을 걷고 나섰다. 고령인 이들은 자신이 평생 일궈온 ‘전통공예’의 맥이 끊기지 않을까 두렵다고 했다. 마을회관 앞 체험 현장에서 만난 구덕장 명인 오영희(83) 선생은 젊은 체험객들에게 제주산 대나무로 구덕(제주의 전통 바구니) 만들기 수업을 하며 말했다. “내가 이걸 14살부터 했는데 나 저세상 가면 전수자가 없어요. 여기 있는 사람들이 해야지. 대나무 만지는 건 보기하고 다르게 어려워. 자꾸 손이 가야 익숙해지고 이어지지.” 대나무로 유명한 전남 담양의 바구니가 둥근 바닥을 하고 있다면 제주의 구덕은 비교적 네모반듯한 고유한 특징이 있다. 구덕 공예를 처음 접한 이혜정(53)씨가 소감을 말했다. “대나무를 수확하는데 절기를 먼저 봤고, 바다의 물때까지 참고했다는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니 제주 조상들의 생태감수성이 느껴지며 감명을 받았어요. 제주 죽공예의 명맥이 꼭 이어졌으면 좋겠어요.”

죽공예뿐 아니라 ‘석공예 대한민국명장’인 송종원(89) 선생은 돌하르방 만들기 행사를 관장했다. 마을 사람들과 체험객이 함께 참여해 하나의 돌하르방을 조금씩 완성하는 프로젝트다. “60년 넘게 제주의 돌을 만졌다”는 송 선생은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직접 그라인더나 정·망치 등의 공구를 고쳐 잡아가며 커다란 돌을 다듬었다. “돌은 변치 않아요. 돌같이 우직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이 일을 시작했지. 이런 행사에 돌 다루는 걸 배우러 오겠다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반갑지요.” 주민과 체험객이 함께 만드는 돌하르방은 마을회관 앞에서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약 보름 동안 완성될 예정이다.

이 밖에도 ‘지장 경기무형유산’ 장성우 선생의 닥나무 종이뜨기 체험, 강문실 인예당공방 대표의 신서란(제주에서 자라는 백합과 식물) 빗자루 만들기 등 대중적인 체험행사의 인기도 높았다.

다양한 한평공예 행사장도 참여자들의 열기로 뜨거웠다. 18일 오후 마을회관 회의실에서 ‘커피박(찌꺼기) 굿즈 만들기, 업사이클링 지구 환경수업’을 연 오세로(32) 작가가 수업 준비를 하는 사이 오 작가의 예비신랑 이기호(32)씨가 아이들이 섞인 10여명의 체험객을 대상으로 설명을 이어갔다. 제주에서 애견용품을 만드는 ‘새로상점’을 운영하는 이씨는 커피 찌꺼기를 반죽해 모빌과 연필 등을 만드는 체험을 마련했다. “커피 찌꺼기가 쓰레기로 버려지면 메탄가스가 발생하고 온난화에 영향을 미쳐요. 이번 공예체험이 지구를 조금 더 시원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도 기억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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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공예가 되는 순간

공예축제에 참여한 이들이 신효마을 곳곳을 돌아보고 있다. 이수현 제공

신효마을에 있는 생태카페 ‘베케’(VEKE)와 ‘카페구하나구칠’은 흠이 있는 공예품을 저렴하게 판매하는 파치마켓과, 한평공예 프로그램 등에 장소를 제공하는 등 도움을 줬다. 마을회와 공예공방, 카페 등이 모두 손잡고 ‘재미있는 마을 만들기’에 적극 나선 셈이다.

축제 현장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축제기간 동안 거점 공방과 한평공예 행사장에는 수백명이 몰렸고, 전통공예 체험장의 대기줄도 끝없이 이어졌다. 신효마을회는 “이번 축제기간을 통틀어 1300여명의 공예체험이 이뤄진 것으로 추산한다”고 밝혔다.

제주교육청 소속 동아리인 ‘공예메이트’에서 활동한다는 교육공무원 홍지선(25)씨와 지예희(26)씨는 나란히 찾은 체험 현장에서 “정말 좋은 행사”라며 박수를 쳤다. 제주시에서 온 지씨는 “제주시에 비해 서귀포에 이런 문화행사가 적고, 서귀포 안에서도 작은 마을은 더 그런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기회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한평공예’ 프로그램 참여자들이 커피 찌꺼기 반죽으로 완성한 꽃 모형을 들어 보이고 있다. 이수현 제공

이번 행사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공방 대표들은 이력도, 출신도 모두 제각각이지만 모두 “신효마을이 좋아서” 이곳에 돌아오거나 자리를 잡게 됐다. 이 마을 태생인 귤림공방 현송이(38) 대표는 육지로 갔다 고향으로 돌아와 공방을 연, 자타가 공인하는 ‘신효의 딸’이다. 공방을 함께 운영하는 현씨의 남편 김석범(40)씨도 제주 출신이다. 히읗공방 홍지원(29) 대표의 고향도 제주 조천이다. 제주그림 오은희(41) 대표와 그림휴가 김미형 대표는 육지에서 온 이주민이다. 필자도 제주 이주 9년차인데, 2년 전 이곳에서 목공방을 열었다. “준비가 힘들었지만 그만큼 재미있었어요. 이 축제가 계속 이어질 수 있으면 좋겠어요.” 오은희 대표가 웃으면서 말했다.

아름답지만 조용했던 신효마을이, 이번 행사를 계기로 시끌벅적해졌다. 말 그대로‘일상’이 ‘공예’가 되는 순간이며, ‘공예’가 더 역동적인 ‘일상’을 만든 현장이었다. 축제란 이런 게 아닐까.

송호균 나무공방 쉐돈 대표

“토박이와 외지 이주민 화합한 성공적 축제”

신효마을 회장 인터뷰

제주 서귀포 신효마을 마을회장 강문훈(63)씨. 이수현 제공

“마을의 공방 대표들과 제주 전 지역의 작가들이 참여해준 덕분에 성공적인 행사를 열 수 있었고 마을 사람들이 서로 화합할 수 있는 계기가 됐습니다.”

‘신효마을 공예축제’가 시작된 지난 17일 제주 서귀포 신효마을회관에서 만난 마을회장 강문훈(63)씨는 마을이 생긴 뒤로 처음 열린 대규모 축제에 고무돼 있었다. 마을회장으로서, 그리고 축제 현장의 ‘총감독’으로 그는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신효마을은 행정동으로는 인근 하효와 함께 효돈동으로 묶인다. 효돈동 주민센터 누리집 인구 현황을 보면, 효돈동 전체 인구는 2023년 5393명인데 신효마을은 1274명이다. 효돈 안에서도 작은 마을이라는 얘기다. 신효마을에서 나고 자란 그는 평생 농사를 짓고 소를 키웠다. “정말 조용하고 아름다운 곳이에요. 그런데 주민들이 할 게 없어요. 농사짓고, 명절 때 모여서 소박한 행사도 하긴 하지만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어려움이 많죠.”

여러 공방이 모여 공예를 테마로 한 마을축제를 열자고 했을 때 강 회장은 “자연환경을 내세우는 것보다 공예축제가 오히려 경쟁력이 있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조용하기만 한 마을 곳곳에 축제 개최를 알리는 펼침막들이 나붙고,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자 주민들의 관심도 덩달아 뜨거워졌다.

강 회장은 이번 축제가 ‘주민 화합’에 기여했다는 점이 반갑다. “서귀포가 대개 그렇지만 마을 단위가 죄다 집성촌이에요. 이곳에는 강씨·김씨·오씨가 많아요. 별로 변하는 게 없으니까 새로운 시도도 많이 못했죠. 그러다가 타지에서 정착해온 분들이 조금씩 늘었는데 기존 주민들과 섞이지를 못하는 거예요. 토박이는 토박이대로 좀 닫혀 있었달까, 외지에서 온 분들도 마을에 소속감을 갖지 못하고…. 그런데 그렇게 나눠질 필요가 있는가. 신효에 와서 사는 사람이 신효 사람이죠. 이번 축제를 통해서 주민들이 서로 얼굴도 트고, 마음도 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컸습니다.”

올해 임기를 마친다는 그는 “후임 마을회장 역시 이번 축제의 성과와 의미를 이어가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송호균 나무공방 쉐돈 대표

‘신효의 딸’과 ‘문화 공무원’ 토박이 부부의 의기투합

커버스토리 공예축제 산파역
증권사·야구심판 등 경험한 아내

제주시 문화과 공무원 출신 남편
2018년 공방 열고 공예축제 결실

‘귤림공방’ 현송이 대표(오른쪽 둘째)가 체험객들을 대상으로 가죽공예를 설명하고 있다. 이수현 제공

제주도 서귀포 신효마을에서 가죽공예 ‘귤림공방’을 운영하는 현송이(38) 대표는 신효에서 태어나 제주에서 대학을 마친 ‘토박이’다. ‘2024 신효마을 공예축제’ 개최의 주역인 귤림공방 현 대표와 남편 김석범(40)씨를 지난 19일 그들의 공방에서 만났다.

제주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현씨는 증권사의 자산관리 매니저로 첫 직장 생활도 제주에서 시작했다. 하지만 2년이 채 되지 않아 사표를 냈다. “스트레스가 너무 컸다”고 했다. “‘너의 월급에는 옷 사 입고 화장하는 품위유지비도 포함돼 있다, 너의 행동 하나하나를 고객들은 주시하고 있다, 좀 더 열정을 갖고 일해라’ 이런 이야기들에 조금 질렸어요.” 일만 하던 현씨는 무작정 서울에 가서, 무작정 놀았다. 그냥 노는 게 아니라, 역동적으로 놀았다. 처음 가본 야구장의 ‘가슴 탁 트이는 충격’은 신선했다. 두산 베어스의 팬이 됐다. 야구가 너무 재미있어 보였다는 그는 갑자기 야구 심판이 되겠다는 생각을 했단다.

서귀포 공방들의 터줏대감

“야구가 좋았지만 규칙을 잘 몰랐죠. 함께 소리치며 응원하면서도 ‘타자가 공을 치면 안타구나, 잡히면 아웃이구나’ 했던 게 싫었어요. 야구를 더 잘 알고 싶어서 심판이 됐죠.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야구 심판 양성 과정을 수료했어요.” 자격을 취득하고는 어린이 리그나 사회인 야구에서 실제 심판으로도 활동했다. 적지만 보수도 받았다.

‘다양한 경험’을 해보는 게 서울 생활의 목표였단다. 영어회화에 꽂혀 하루에 8시간씩 수업을 받거나,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블록조립 강사로도 일했다. ‘살사’ 취미에 빠져 춤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던 때도 있었다. 지금의 남편 김석범씨도 살사 동호회에서 만났다. 김씨도 제주 서귀포 서귀동에서 태어난 제주인이다.

그러다 제주의 리조트에서 일하는 선배의 제안으로 다시 제주로 돌아와 ‘호텔리어’가 됐다. 몇곳의 호텔과 리조트에서 마케팅 매니저로 일했다. 다시 시작된 직장 생활이었지만 곧 그는 고향인 신효마을로 돌아오게 된다. “할머니가 사시던 집이 있었어요. ‘네가 와서 좀 고치고 살아보라’는 엄마 말씀에 ‘그럼 공방을 한번 열어볼까’ 상상해봤죠. 가능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취미로 배웠던 가죽공예 아이템을 가슴에 품고, 남편과 함께 낡고 방치된 신효마을의 구옥을 고쳤다. “1년 정도 집만 고친 것 같아요. 잔디 깔기와 정화조 공사를 제외한 모든 공사를 직접 했어요. 지인들 놀러오면 밥 사주고 술 사주고 하면서 공사를 도와달라 부탁했죠.” 구석구석 부부의 손을 거치지 않은 곳이 없는 귤림공방은 단아한 마당과 안채·바깥채를 갖춘 그럴듯한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가죽공예의 매력을 “시간이 지날수록 익어가는 가죽이라는 소재의 포근함”이라고 소개하는 현씨는 공방에서도 ‘친환경 소재’를 고집한다. “이탈리아의 베라펠레협회 인증 가죽이라는 게 있어요. 가죽 생산만을 위한 도축을 하지 않고, 최대한 친환경적인 방식으로 가죽을 생산하기 위해 노력하는 등 몇가지 기준을 충족해야 인증을 받아요. 귤림공방에서도 이 협회의 인증 가죽을 사용해 체험 프로그램 등을 운영하고 있어요.”

두 사람은 2017년 결혼해 2018년에 공방을 열었다. 제주시 문화예술과에서 근무하던 남편 김씨도 직장을 그만두고 의기투합했다. 처음에는 마을 사람들도 “가죽공예가 뭐냐, 돈은 되는 거냐”고 물었다. 작업 공간을 마련하고, 지갑·핸드백·다이어리 등 제품을 판매하며, 직접 제작할 수 있는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서귀포 공방들의 ‘터줏대감’으로 통하게 됐다. 귤림공방이 증명해온 제주 공예공방의 ‘지속가능함’이 이들의 가장 중요한 결실이다.

“소외되지 않은 마을 만들고 싶어서”

‘귤림공방’ 현송이·김석범 부부. 이수현 제공

2021년부터는 문화체육관광부나 제주도,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등 기관과 협력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공예주간’ 행사에 참여한 것도 이때부터다. 문화사업 관련 공무원으로 일했던 남편 김씨의 경험과 노하우가 십분 발휘됐다. 올해 ‘공예주간’ 행사를 마을의 다른 공방들과 협력해 규모를 키워보자는 것도 김씨의 아이디어였다. 현 대표는 말했다. “저는 처음에 반대했어요. 하던 대로 우리 공방에서만 하자고 했죠. 그런데 신효마을에 그사이 공방들이 부쩍 많아진 거예요. ‘이 자산을 활용해보자, 함께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에 결국 찬성하게 됐어요.”

현씨가 ‘일 벌이기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평가하는 남편 김씨는 축제기간 내내 마을 전역을 뛰어다니며 이번 행사의 ‘집행위원장’ 역할을 했다. 전통공예 행사에 참여한 고령의 공예 장인들의 식사를 챙기고, 경광봉을 들고 차량 정리에 나서기도 한다. 관계 부처와의 연락책이자 공방들 사이의 조정자 노릇도 했다. 팸플릿 디자인부터 펼침막 설치까지,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일이 없다. 애초에 지난겨울 각 공방에 개별적으로 연락을 돌리며 행사 참여 의사를 타진한 것도 김씨였다.

“신효마을이 너무 소외돼 있다고 생각했어요. 고령인 분들도 많고요. 공방들이 함께 뭔가를 해보면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되지 않을까, 이런 절박함이 우선 컸어요. 아이 하나 키우려면 온 마을이 힘을 모았다고 했잖아요. 문화의 힘도 이런 게 아닐까요. 시간이 지나도 기억될 만한 마을, 기억할 수 있는 사람들이 남아 있는 마을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었습니다.” 축제 진행에 동분서주하던 김씨가 잠깐 숨을 돌리더니 웃으며 말했다.

송호균 나무공방 쉐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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