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환, 아니 상봉이라도”…돌아오지 못한 ‘납북 고교생’

서윤덕 2024. 5. 2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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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납북자 김영남 씨가 2006년 금강산 호텔에서 상봉한 남쪽 가족들과 함께 찍은 사진.

"죽어도 원이 없다."…29년 만에 상봉한 납북 고교생과 어머니

남북 화해 분위기가 무르익던 2006년, 금강산호텔에서 이산가족 특별상봉 행사가 열렸습니다.

모두가 감격의 눈물을 흘린 그 날, 유난히 눈길을 끈 장면이 있었습니다.

1977년 전북 군산 선유도에서 납북된 김영남 씨가 어머니 최계월 씨를 만나는 순간입니다.

납북 당시 고등학생이던 김 씨는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면서 중년으로 변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막내 아들을 금방 알아봤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나는 인제 죽어도 원이 없다."


사흘뿐인 상봉 행사는 쏜살같이 지나갔습니다. 헤어지는 날 두 사람은 또 만나자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지켜지지 못했고, 노모는 짧은 만남 후 생이별의 아픔을 다시 겪다가 2018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 '또 다른 김영남' 전후 납북자 516명…송환은 0명

정부는 김영남 씨를 '전후 납북자'로 분류합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 이후 북측으로 강제로 끌려간 사람을 뜻합니다.

통일부가 파악한 전후 납북자는 516명에 이릅니다.

이 가운데 김 씨를 포함해 고등학생도 5명이 있습니다. 이들은 1977년 8월부터 1년 동안 전북 군산과 전남 신안군 홍도에서 납북됐습니다.

고등학생 전후 납북자 (출처 : 통일부)


당시에는 실종 처리 됐지만, 1990년대에 들어 남파 간첩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납북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사람은 아직 없습니다.

■"생사라도 알고 싶어요"…납북자 가족들의 호소

통일부는 어제(24일) 김영남 씨가 납북된 전북 군산 선유도에서 송환기원비 제막식을 열었습니다.

납북자의 송환과 그 가족들의 아픔이 잊히지 않기를 바라는 의미를 담은 기원비입니다.

여기에는 '대한민국은 여러분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는 문구를 새겼습니다.

김영호 통일부 장관은 "납북된 국민들의 송환을 촉구하고, 그 아픔에 공감하는 국민적 목소리가 확산되기를 소망한다"고 밝혔습니다.

고등학생 납북자 송환기원비


이 자리에는 김 씨의 형과 형수를 비롯한 다른 납북 고등학생 가족들도 함께했습니다.

김 씨의 형수인 김옥자 씨는 "시동생을 한 번 더 볼 수 있으면 좋겠다"면서도, "우리는 2006년에 한 번이라도 만났으니 다른 네 가족의 만남이 꼭 이뤄졌으면 좋겠다"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최성룡 전후납북자 피해가족연합회 이사장도 "송환이 어렵다면 비공식적인 만남이라도, 그것도 안 되면 생사라도 확인할 수 있게 해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제막식 행사 내내 선유도에는 짙은 안개가 끼었습니다.

수십 년 생이별을 겪은 가족들 마음에도 '짙은 안개'가 끼어 있을 겁니다.

지금이라도 정부와 국제사회가 노력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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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윤덕 기자 (duck@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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