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시카고로 ‘대서양 넘나든 사랑’

송은아 2024. 5. 25.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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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소설가와 사랑에 빠진 보부아르
17년간 보낸 연서 304통 고스란히
관능적이고 다정한 애정 표현 가득
파리 지성계 사건들 세심하게 전달
프랑스 미시사로 손색 없는 풍속화

연애편지/ 시몬 드 보부아르/ 이정순 옮김/ 을유문화사/ 3만8000원

“제가 당신 책을 얼마나 좋아했고 또 당신에게도 큰 호감을 느끼고 있다고 꼭 전하고 싶었어요.”

‘제2의 성’을 쓴 시몬 드 보부아르는 1947년 2월 미국 소설가 넬슨 올그런에게 이런 내용의 첫 편지를 쓴다. 당시 보부아르와 사르트르는 미국에 초청돼 도시를 돌며 강연 중이었다. 이 방문에서 보부아르는 올그런을 소개받고 단숨에 사랑에 빠진다. 4월만 해도 ‘친애하는 친구’로 시작한 호칭은 5월이 되자 바로 ‘시카고의 소중한 내 사랑’으로 바뀐다. 그러곤 “고독한 방안에서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 있는 사랑스러운 아내처럼 저는 당신과 함께 있을 거예요. … 당신을 사랑해요, 더 이상 덧붙일 말이 없어요”라고 열렬히 고백한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미국 소설가 넬슨 올그런과 39살에 만나 바로 사랑에 빠진다. 신간 ‘연애편지’에서는 보부아르가 1947∼1964년 쓴 연서를 만날 수 있다. 을유문화사 제공
신간 ‘연애편지’는 보부아르가 1947∼1964년 올그런에게 보낸 연서를 모은 책이다. 보부아르가 39살 때 시작해 55살까지 무려 17년간 보낸 304통이 시간순으로 담겼다. 이들은 프랑스 파리와 미국 시카고에서 편지를 통해 ‘대서양을 넘나든 사랑’을 이어갔다.

잘 알려졌듯 보부아르는 20대 초반에 사르트르를 만나 ‘계약결혼’을 한다. 2년 동안 가장 가까운 사이로 지내본 뒤 계약을 갱신하기로 한다. 2년 뒤 이들은 서로에게 ‘우연적 사랑’도 허용하는 영원한 관계로 들어가기로 합의한다.

이런 독특한 관계 아래 사르트르는 많은 여성과 인연을 맺었다. 보부아르 역시 39살에 만난 올그런, 44살에 만난 17살 연하 클로드 랑즈만 등과 사랑에 빠진다.

보부아르가 올그런에게 보낸 연서에는 열정적, 관능적이고 다정한 사랑 표현이 가득하다. “내 사랑, 당신은 제 허리에 두 팔을 감고 키스할 것이고 다시 한번 저의 남편이 될 거예요”라거나 “때때로 저는 아주 불타는 가슴으로 당신의 미소, 당신의 두 눈, 당신의 목소리를 불러내지요”라며 다양한 방식으로 사랑을 말한다.
시몬 드 보부아르/ 이정순 옮김/ 을유문화사/ 3만8000원
제3자인 독자에게는 달콤한 밀어보다는 보부아르가 빼어난 이야기꾼으로서 자신의 삶을 전하는 문장들이 흥미롭다. 보부아르는 연인에게 하루하루를 눈에 보이듯 묘사함으로써, 독자를 2차 대전 후 파리의 카페와 클럽으로 데려간다.

올그런이 문화적, 사회적으로 이방인인 만큼 보부아르는 파리 지성계의 사건들을 신경 써서 세심하게 전한다. 작가 알베르 카뮈와 앙드레 지드, 미술가 알베르토 자코메티 등 자신이 만난 수많은 이를 언급하고 새로 나온 연극과 영화, 그와 사르트르가 신경을 쏟는 사회운동을 설명한다. 보부아르의 연서는 그 자체로 1950∼1960년대 프랑스 미시사로 손색없는 방대한 풍속화인 셈이다.

1947년 7월15일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의 연극 ‘공손한 매춘부’가 영국 런던에서 초연한 밤을 묘사한다. 보부아르는 리셉션에 대해 “저는 (배우) 리타 헤이워스의 맞은편에 앉아 … 그녀의 기막히게 멋진 어깨와 유방에 감탄하면서 그녀와 대화하려 애쓰고 있었어요”라며 “그녀는 지루해 어쩔 줄 몰라 했고 사르트르도 줄곧 지루해했으며 모든 사람이 내내 따분해했어요”라고 전한다. 같은 해 11월5일에는 자신과 사르트르의 ‘아주 절친한 친구’ 자코메티를 소개한다.

“조각으로 엄청난 돈을 벌어들인 지 20년이나 됐어요. … 갑자기 그는 … 자신을 소모하고 있다는 걸 느꼈어요. 그래서 속물들에게 등을 돌리고 생활에 꼭 필요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팔지 않고 홀로 예술을 추구하기 시작했어요. 그는 더러운 옷을 벗지 못하고 무척 가난하게 산답니다. … 넓디넓은 헛간 같은 곳에서 살고 있어요. 거기에는 가구도 먹을거리도 없고, 난방도 되지 않아요. … 그를 특히 높이 평가하는 건 2년간 작업한 작품들을 하루아침에 산산이 부숴버릴 수 있었다는 거예요. 그는 모든 것을 깨뜨려 버렸어요.”

소설가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에 대한 설명은 매혹적이다. 콜레트는 “살이 피둥피둥 찌고 손발이 부자유스러운” 75살 소설가이지만 “그녀가 이야기하고 미소 짓고 웃기 시작한다면 누구도 그녀보다 더 젊고 더 예쁜 여자를 바라보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1947년 7월3일 쓴 편지에서는 삶에 대한 보부아르의 열정을 엿볼 수 있다.

“지독하게 탐욕스럽고 인생의 모든 것을 원하지요. 여자이기도 하고 또한 남자이고 싶고, 많은 친구를 갖고 싶지만 또한 고독하고 싶기도 하고, 엄청나게 일하고 좋은 책들을 쓰고 싶고 또한 여행하며 즐기고 싶고, 이기주의자인 동시에 관대하고 싶고 … 제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갖기란 쉽지 않아요.”

송은아 기자 se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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