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디캡과 역경 극복한 그때처럼… 달려라, 이봉주

박돈규 주말뉴스부장 2024. 5. 25. 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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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아무튼, 레터]
마라톤은 고통스럽다. 선수 시절 이봉주가 충남 공주에서 도로 훈련을 하다가 더위를 이기기 위해 물을 머리에 붓고 있다.

최고 마라토너의 콤플렉스는 작은 폐활량이 아니다. 몇 해 전 만난 이봉주는 “작은 눈이었다”고 말했다. 선수 시절 쌍꺼풀 수술을 받았는데 감독이 ‘달리다 보면 눈에 땀이 들어가 앞을 보기 힘들어서…’라고 둘러댔다. 이봉주는 “눈이 큰 사람들은 눈이 작은 사람들의 괴로움을 모른다”고 했다.

그가 다시 뛰는 모습을 유튜브로 뒤늦게 보았다. 지난달 강원도 삼척에서 열린 황영조국제마라톤대회. 등이 굽는 난치성 질환에 시달려 온 이봉주가 러닝화를 신고 4년 만에 주로(走路)에 섰다. 달린 거리는 짧아도 반가웠다. 그는 “건강이 더 회복돼 10km, 하프, 풀코스까지 완주할 몸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이날은 친구 황영조와 함께 달렸다. 황영조의 고향 삼척에 이봉주의 처가가 있다. 현역 시절에는 4번 맞붙어 이봉주가 1승 3패로 밀렸다. 말하자면 전성기가 달랐다. 이봉주는 한때 “황영조의 심장이 미치도록 갖고 싶었다”고 했다. 폐활량을 타고났고 근성과 스피드도 특출난 마라토너였기 때문이다.

충남 천안이 고향인 이봉주는 “내가 세운 한국최고기록(2시간7분20초)이 20년째 그대로인데, 선수로 컴백해 확 깨버릴까 하는 상상을 가끔 한다”며 웃었다.

이봉주는 약점투성이였다. 왼발이 오른발보다 4.4㎜ 긴 짝발이었다. 달릴 때 균형이 맞질 않았다. 게다가 ‘거북이 마라토너’라 불릴 만큼 결코 빠르지 않았다. 100m를 전력 질주하면 다른 선수들은 11~12초에 들어왔다. 이봉주는 14초나 걸렸다. 부족한 스피드를 지구력으로 만회해야 했다.

은퇴한 이봉주는 말주변이 있었다. 초등학교 운동회 때 학부형 달리기에 출전한 일화를 그가 들려줬다. “떠밀려 어쩔 수 없이 나갔는데 제가 단거리는 못 뛰어요. 이봉주가 날아다니겠거니 잔뜩 기대한 사람들 앞에 겨우 3등으로 들어온 겁니다. 1~2등 한 분들은 평생 자랑하고 다니겠지요. 내가 달리기로 이봉주를 꺾은 사람이야!”

하지만 한국 마라톤 최고 기록은 여태 이봉주가 보유 중이다. 2000년에 세운 2시간 7분 20초. 폐활량, 스피드, 짝발 등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려 노력하다 보니 어느덧 국민 마라토너가 된 남자. 쫓아가려면 남보다 더 땀을 흘려야 했고, 훈련 시간과 거리를 늘리다 보니 지구력이 더 강해졌다. “약점 덕에 강점이 생긴 거예요.”

낙관적인 사람이었다. 나쁜 일이 생겨도 금방 잊고 앞만 보고 달렸다. 그는 “미국 애틀랜타올림픽에서 3초 차이로 금메달을 따지 못한 것은 나태해지지 말라는 하늘의 뜻”이라고 말했다. 다시 주로에 선 모습을 보며 쾌유를 빌었다. 달려라, 이봉주.

난치성 질환으로 고통받던 전 마라토너 이봉주가 4년 만에 다시 달렸다. /강원일보 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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