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입을 벌려요” 인형같은 소녀들 입안 쏙쏙…뭘 그리 맛있게 먹어요?[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장 프랑수아 밀레 편]

2024. 5. 25.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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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편 105. 장 프랑수아 밀레]
시골 여러 풍경 그린
농부들의 ‘라파엘로’
<동행하는 작품>
이삭 줍는 여인들
키질하는 농부
만종
.
편집자 주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본 뒤 관련 책과 영화를 모두 찾아봤습니다. 잘 그린 건 알겠는데 이 그림이 왜 유명한지 궁금했습니다. 그림 한 장에 얽힌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습니다. 즐거웠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이 경험을 나누고자 글을 씁니다. 미술사에서 가장 논란이 된 작품, 그래서 가장 혁신적인 작품, 결국에는 가장 유명해진 작품들을 함께 살펴봅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문학적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쓰였습니다.
이삭 줍는 여인들
장 프랑수아 밀레, '자 입을 벌려요(음식·일부)', 캔버스에 유채, 19세기경, 74x60cm, 프랑스 릴 미술관
장 프랑수아 밀레, 'Seated Shepherdess'

허름한 차림의 여인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이들 모두 추수를 마친 들판 한 공간에 남겨진 이삭을 줍고 있었다. 한 알, 두 알…. 허리도 펴지 못한 채 낟알을 털고, 쥐고, 모았다. 알맹이 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모습이었으나, 종일 그렇게 나서봐야 고작 몇 줌이었다. 그래도 이들은 결과에 만족하는 듯보였다. 이런 양으로는 빵 한 덩어리어치 밀도 못 얻을 게 분명했지만, 실망의 기색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녀들은 알고 있었다. 오늘을 힘껏 살았으면 그 자체로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걸. 이러한 태도는 일요일 아침 공기처럼 신성한 것이었다. 낡은 첨탑 위 종소리처럼 성스러운 것이었다. '그게 무엇이었든, 그게 무엇이 되든, 신의 뜻대로.' 이날, 이 순간 모든 풍경이 알려주는 삶의 교훈이었다.

1857년, 프랑스 바르비종의 정취에 젖은 장 프랑수아 밀레는 이 장면을 눈에 담지 않고선 배길 수 없었다.

그것은 시골에서만 볼 수 있는 경이로운 모습이었다. 목울대가 타오르듯 뜨거워지는 생소한 경험이었다.

장 프랑수아 밀레, '이삭 줍는 여인들', 1857, 캔버스에 유채, 83.5x110cm, 오르세 미술관

작업실로 간 밀레는 캔버스부터 찾았다.

이 감흥이 옅어지기 전 서둘러 선을 그었다. 늘 그랬듯 상상을 곁들여 수많은 밑그림을 그렸고, 그 과정에서 인물의 배치와 동작을 정교하게 구현했다. 세상에서 가장 밀도 높은 그림 중 한 점인 〈이삭 줍는 여인들〉이 곧 탄생했다. 그림은 소박했다. 화폭 속 여인 셋이 땅바닥에 바짝 붙을 듯 몸을 숙이고 있다. 셋 다 두건을 썼지만, 뙤약볕 아래 얼굴과 목덜미는 이미 새까맣게 탔다. 땅을 더듬는 이들의 손은 유난히 크고 억세다. 곡식을 쥔 다른 손에도 만만찮은 아귀힘이 느껴진다. 이는 삶에 대한 강하고도 질긴 의지처럼 보이기도 한다. 은은한 노을빛을 받는 드넓은 들판은 저 끝에서부터 차츰 발그스름하게 물들고 있다. 풍경화처럼 서정적이고, 종교화처럼 경건하게 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

"(…)허수아비 무리를 들판에 세웠으니…. 밀레의 추잡함과 천박함은 끝이 없다."

밀레는 설렘을 품고 〈이삭 줍는 여인들〉을 살롱전에 출품했지만, 그가 들은 말 대부분은 이 따위였다. 이렇듯 그의 시(詩)적인 그림은 뜻밖에도 심사위원과 평론가의 인상만 찌푸리게 할 뿐이었다. 왜 그랬을까.

정치적 의도? 순수한 마음?
장 프랑수아 밀레, 'Potato Planters'

19세기 프랑스 시골에서는 지주빈곤층에게 선심 쓰듯 이삭줍기를 허락하곤 했다.

당시 지주는 빈곤층 농민과 노동자를 뽑아 기업 경영하듯 농사를 지었다. 지주는 추수철이 되면 일꾼을 부려 자기네 곳간부터 채웠다. 그런 다음 이들에게 몇 푼 안 되는 임금을 주고, 빈 들판에 잠깐 자유롭게 풀어줬다. 작업 중 빵 부스러기처럼 흘린 이삭을 주워가라는 신호였다. '가난한 여성과 아이들이 먹을 수 있도록 밭에 이삭을 남겨두라.' 이는 종교의 가르침이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 지주도 알고 있었다. 이들이 아무리 주워봤자 그 양으로는 주머니도 불룩하게 채우기 힘들 것이었다. 그렇기에 지주는 내심 불안해했다. 이들 입장에선 트라우마도 있었다. 그것은 고작 9년 전인 1848년에 발발한 2월 혁명이었다. 여태 한 번도 반기의 주체가 된 적 없는 이들, 성난 농민과 격분한 노동자가 광풍의 주역이 된 일이었다. 도끼와 곡괭이를 든 이들이 결과적으로는 루이 필리프 1세 국왕까지 끌어내린 사건이었다. 역사는 되풀이되기에 역사다. 지금 당장은 민심의 화산이 잠잠해진 듯했지만, 대지는 언제 다시 흔들릴지 모를 일이었다.

지주가 기득권이라면 기성 화단 또한 기득권이었다.

그런 기성 화단이 밀레의 그림을 이 악물고 깎아내리는 이유는 간결했다. 이른바 '찔린' 것이었다. 이토록 절절한 〈이삭 줍는 여인들〉이 어떤 기폭제 내지 도화선이 될 수 있겠다는 두려움이었다. 그런 생각을 할 법도 했다. 밀레가 심은 디테일 탓이었다.

장 프랑수아 밀레, '이삭 줍는 여인들'(일부 확대), 1857, 캔버스에 유채, 83.5x110cm, 오르세 미술관
장 프랑수아 밀레, '이삭 줍는 여인들'(일부 확대), 1857, 캔버스에 유채, 83.5x110cm, 오르세 미술관
쥘 브르통, '이삭을 줍고 돌아오는 여인들'

우선 형상이 불분명한 세 사람을 주인공처럼 세운 일부터 논란거리였다.

기득권에 오르지 못한 모두가 익명의 이 여인들에게 감정 이입을 할 수 있을 터였다. 화폭 속 인물들의 모자와 옷 색깔도 지적 사항이었다.그도 그럴 게 파랑과 빨강, 흰색은 프랑스 혁명의 깃발 색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부는 세 사람이 ①몸을 숙인 후 ②이삭을 주운 뒤 ③몸을 다시 일으키는 세 가지 동작을 하는 자체가 보기에 불편하다고 짚었다. 이 장면이 자꾸 숫자 '3'을 곱씹게 한다고 했다. 종교의 삼위일체 내지 성 요셉과 성모 마리아, 아기 예수 등 세 명으로 꾸려진 성가족(Holy Family)까지 떠올리게 한다는 얘기였다. 즉 농민과 노동자가 선이자 정의, 무언가를 누리기에 정당성을 가진 존재로 보일 수 있다는 뜻이었다. 아울러 기득권과 비기득권의 은근한 대비도 신경 쓰이는 부분이었다. 가령 처연한 아낙네들 뒤편을 보면 곡식을 잔뜩 채운 마차가 지주의 곳간으로 출발하고 있다. 그림 오른편에서는 말을 탄 지주 혹은 보안관이 저만치 떨어진 채 모든 걸 감시하는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기득권이 좋아한 건 밀레의 문제작이 나오고 얼마 후 등장한 쥘 브르통 〈이삭을 줍고 돌아오는 여인들〉 같은 그림이었다. 이삭을 한아름 쥔 여인들이 줄지어 위풍당당하게 행진하는 모습의 작품이었다. 이는 모두가 튼실하고, 모두가 풍요로운 삶을 만끽하는 듯한 장면의 결과물이었다.

장 프랑수아 밀레, 'Hunting Birds at Night'

그렇다면, 밀레는 정말 정치적 의도를 갖고 〈이삭 줍는 여인들〉을 그렸을까.

사실 밀레는 그림에 특별한 야심을 심지 않았다. 그는 그저 농촌 풍경을 가장 솔직하게 그리려고 했을 뿐이었다.

그가 볼 때 농민은 거칠고 투박하지만, 그래도 매 순간을 성실하게 살아갈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산업화로 인한 어수선함, 혁명의 경험이 부추기는 울컥함을 신과 같은 인내심으로 참고 있는 위대한 존재들이었다. 밀레 또한 언젠가 이들의 결점, 이를테면 자연에 대한 둔감함과 편협한 사고 등이 문제라는 식의 주장한 적도 있지만, 최대한 농촌의 곁을 떠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 이들의 생활상을 미화도, 과장도 없이 그리다 보니 이런 서정적인 결과물이 나온 것이었다. 물론 그림 속 기득권을 향한 비판 메시지는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중세 시대에도 기득권을 향한 이런 은근한 '돌려 까기'를 선사하는 예술품이야 많았다. 즉, 그의 작품은 주제와 형식적 면으로 볼 때는 별로 문제 될 게 없는 것이었다. 밀레의 그림이 그저 진실해도 너무 진실하다는 것. 문제라면 그게 문제였다.

농부들의 라파엘로
장 프랑수아 밀레, 'The Man with the Hoe'

이 무렵 밀레의 별명은 '농부들의 라파엘로'였다.

밀레는 농사짓는 사내, 물을 긷는 여인, 건초 묶는 소년과 양치는 소녀 등 흙냄새 가득한 그림을 소박하게 그렸다. 밀레 스스로는 별다른 야망 없이 그런 시골 풍경을 그렸다고 했다. 실제로도 그의 언행을 보면 선전과 선동 등 그림을 통한 정치적 목적은 없는 게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밀레의 작품을 보는 사람들은 그도 부정할 수 없을 딱 하나의 감정만큼은 또렷이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시골을 향한 화가의 순수한 애정이었다. 오직 이 마음 하나만 갖고서 꾸밈이 판치는 세상에 총대 메고 그런 그림을 내놓은 것이었다.

“신이 준 재능과 과업을 무시하지 말라”
장 프랑수아 밀레, 'Woman Sewing beside her Sleeping Child'

밀레는 1814년 프랑스에서 농부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밀레는 노르망디 지방의 시골 마을 그뤼시에 터를 잡은 부농(富農)의 일원이었다. 그렇기에 그 또한 직접 팔을 걷고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다. 쟁기로 밭을 갈고, 말 안 듣는 양 떼를 치며 나름대로 고생도 했다. 그는 이 덕에 진작부터 육체노동의 고단함, 그리고 그것이 갖는 숭고한 가치를 절감할 수 있었다. "나는 태어난 후 들판 말곤 아무것도 본 게 없었다. 나는 내가 일할 때 보고 느낀 걸 최선을 다해 말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언젠가 밀레가 전한 당시의 회상이었다. 그 시절 밀레는 사제였던 삼촌 덕에 성경과 함께 여러 문학도 읽을 수 있었다.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 등 고대 시인,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존 밀턴 등 르네상스기의 대가 등을 읽고서 몸과 함께 마음도 살찌웠다. 이 경험이 훗날 그가 선보이는 특유의 서정적 그림에 바탕이 됐을지도 모른다.

장 프랑수아 밀레, 'The Knitting Lesson'

밀레는 이 무렵부터 취미 삼아 농가 풍경을 그렸다.

어느 날 밀레의 아버지가 그의 스케치북을 봤고, 아들에게 남다른 소질이 있다는 걸 눈치챘다. 1833년, 밀레는 아버지의 권유로 일대 가장 큰 도시인 셰르부르 땅에 왔다. 그곳에서 초상화가 폴 뒤무셸을 찾아 그림 수업을 받았다. 그런 그는 2년 뒤 아버지의 사망으로 고향에 돌아왔다. 장남이 가업을 이어받는다는 관습 아래에 다시 농부로 살 생각이었다. 그러나 "신이 준 재능과 과업을 무시하지 말라"는 할머니의 권유로 다시 붓을 쥐었다는 설이 있다.

장 프랑수아 밀레, 'The Sheepfold, Moonlight'

밀레는 1837년, 스물셋 나이로 파리 땅을 밟았다.

위대한 화가를 여럿 배출한 에콜 데 보자르(파리 국립미술학교)에도 입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농촌에서 온 천재 청년이 도시 도련님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안긴다는 식의 극적 반전은 없었다. 시골에선 빛을 발한 재능이었지만, 아카데미풍 그림이 강요되는 이곳에서는 큰 존재감을 보일 수 없었다. 밀레는 틈나면 루브르 박물관을 찾았다. 그는 17세기 화가 니콜라 푸생의 그림 앞에서 상처 입은 슬픔을 다독였다. '철학자 화가'로도 불린 푸생 또한 그 시대 관습에 맞서 자기만의 예술관을 펼쳤다. 그런 푸생 특유의 장엄한 역사화, 고상한 풍경화 앞에서 마음을 다잡곤 했다. 살롱전에 거듭 낙선한 밀레는 1840년이 돼서야 초상화 한 점이 당선되는 순간을 맞을 수 있었다. 밀레는 이 경력을 내걸고 초상화 작업을 하며 돈을 벌었다. 다만, 그의 생활은 여전히 여의치만은 않았다. 그에게 붙어있는 '촌뜨기 화가'라는 딱지는 쉽게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의 주머니 사정은 여전히 여유롭지 못했다. 너무 힘들 때는 그렸던 그림 위에 또 그림을 그리는 식으로 버텼다는 이야기도 있다. "…저는 제가 어떻게 해야 제 의무(예술)를 다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쯤 밀레는 이런 글도 썼다.

장 프랑수아 밀레, '목욕하는 여인'
장 프랑수아 밀레, 'Nymphs Resting in the Forest by Jean-François Millet'
장 프랑수아 밀레, '강가에서 벌거벗은 농부 여성', 19세기경, 18.8x17.5cm, 목판에 유채

삶을 향한 밀레의 절박함은 그 시절 그가 그린 누드화를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밀레는 잠깐 그의 신념과 타협하기로 했다. 예술보다는 생이 먼저라는 마음이었다. 밀레는 눈 딱 감고 '팔리는 그림'을 작업하기 시작했다. 그게 누드화였다. 가령 〈목욕하는 여인〉 같은 작품이었다. 밀레는 우선 그의 장기인 시골 배경부터 그렸다. 그 위로 나체의 여인이 강물에 다리를 담그려는 모습을 얹었다. 언덕에는 풀을 뜯어먹는 소의 형상을 더해 긴장감과 생동감을 더했다. 잠깐의 기간이었지만, 밀레가 이러한 살굿빛 그림을 그렸다는 건 많이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훗날의 밀레 또한 과거 자신의 모습을 놓고 한심한 짓을 했었다고 평가했다. 그래도 누드화와 전원 풍경화의 조합이 썩 신선했는지, 당시 유명 비평가가 밀레를 놓고 '누드화의 귀재'라는 호칭을 달아준 해프닝 아닌 해프닝도 있다.

바르비종의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 '키질하는 농부'

밀레는 다행히 그 암흑기를 생각보다 빨리 벗어날 수 있었다. 그것은 그의 1848년작, 〈키질하는 농부〉 덕이었다.

밀레는 농부 한 명을 단독 모델로 두는 강수를 뒀다. 화폭에선 붉은 두건을 쓴 익명의 일꾼이 키질로 겨와 낟알을 구분하는 모습뿐이다. 이것 말고는 특별한 장면도, 장치도 보이질 않는다. 밀레의 이 그림은 신화나 전설의 한 대목처럼 이상화해 그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당시 신고전주의와 달랐다. 문학의 한 구절처럼 극적이고 숭고하게 표현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 시절 낭만주의와도 구별되는 기운을 품었다. 즉, 평범한 인간의 평범한 일상을 다룬 그때 기준으로는 아주 생소한 작품이었다. 그런데, 이 그림이 먹혔다. 시기가 잘 맞물렸다. 당시 프랑스는 중대한 변화를 맞고 있었다. 부르주아, 그리고 농민과 노동자가 왕정을 타도한 2월 혁명이 때마침 발발했다. 시민 주도로 이뤄지는 혁명의 묘미는 발발 직후 자유와 평등에 대한 기대가 한껏 높아지는 데 있다.

그 여파 때문일까.

당장 그해 살롱전은 심사위원을 두지 않고 접수된 작품 모두를 받아들였다. 그렇기에 밀레의 그림처럼 보통의 인간이 등장하는 작품 또한 문턱을 넘을 수 있었다. 프랑스에 새롭게 들어선 정부는 이를 계기로 밀레의 〈키질하는 농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국민 절대다수인 농부와 노동자의 지지가 절실했던 이들에게 밀레가 그린 소박한 그림은 선전용으로 탁월해보였다. 정부 인사가 밀레의 〈키질하는 농부〉를 사들였다. 밀레에게 비슷한 분위기의 그림도 추가 주문했다. 무명에 가까웠던 밀레는 이제 정부가 공인한 농민 화가로 우뚝 설 수 있었다.

장 프랑수아 밀레, '씨 뿌리는 사람'

밀레는 이 성과에 힘입어 다시 농촌을 그리기로 했다.

농부를 그리고, 노동자를 그리고, 이들의 솔직한 삶을 더더욱 솔직하게 그리기로 했다. 1849년, 밀레는 파리를 떠나 농촌에 둥지를 틀었다. 파리에서 1시간가량 기차를 타면 갈 수 있는 땅, 바르비종이었다. 넓은 녹지가 펼쳐지는 퐁텐블로 숲 자락에 있는 곳이었다. 다만, 이런 이유만으로 터전을 옮기지는 않았다. 이쯤 파리에는 콜레라가 기승을 부렸다. 정치적 혼란도 끊이질 않았다. 그는 이 모든 상황에 질려버린 것이었다. 이 무렵 밀레 말고도 테오도르 루소와 카미유 코로 등 여러 화가가 바르비종 일대를 오가며 아름다운 풍경화를 그렸는데, 비평가들은 이들을 한데 묶어 바르비종파로 통칭하게 된다. 밀레는 고향과 닮은 이곳에서 작업을 지속했다.

하지만 세상사는 결코 쉽지 않았다.

프랑스 사회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농민 대부분은 2월 혁명 이후 선거권을 얻었다. 이들은 쫓겨난 루이 필리프 1세 국왕 자리를 대신할 대통령 선출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 결과 당선된 이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조카, 루이 나폴레옹이었다. 그가 나폴레옹 시대의 영광을 재현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이었다. 하지만 루이 나폴레옹은 1851년 쿠데타를 일으켰고, 그는 나폴레옹 3세가 돼 대통령이 아닌 황제직에 오른다. 결과적으로는 프랑스 초대 대통령이자, 마지막 황제를 겸한 아이러니한 인물이 된 셈이었다. 역사는 이처럼 진보하는 듯, 역행하는 듯했다. 혼돈도 이런 혼돈이 없었다.

장 프랑수아 밀레, '첫 걸음마'
장 프랑수아 밀레, '자 입을 벌려요(음식)', 캔버스에 유채, 19세기경, 74x60cm, 프랑스 릴 미술관

어지러운 정국에서 지주 등 전통적 기득권층도 다시 기회를 노렸다.

마음 같아선 초침을 크게 돌려 중세시대의 위세를 되찾고 싶었다.이런 가운데, 밀레가 〈이삭 줍는 여인들〉을 발표한 것이었다. 잠깐 환영받는 듯했던 밀레의 농촌 작품이 난데없이 논란의 도마 위에 오른 데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밀레는 속상했다. 밀레는 단지 농촌을 좋아했을 뿐이었다. 그가 사랑하는 농촌의 평화와 애환을 널리 알리려는 마음이었다. 실제로 밀레가 비슷한 시기에 그린 그림 중에는 〈첫걸음마〉, 〈자, 입을 벌려요(음식)〉 등 농촌의 아름다움만 부각한 작품도 많았다. 양팔 벌린 아버지를 보고 아기가 처음으로 발을 딛는 모습, 어머니가 건넨 숟가락을 향해 아이가 참새처럼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 등 동화 속 장면 같은 작업물이었다. 기득권 중 상당수는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 같은 몇몇 그림에 주목해 그를 위험인물처럼 대했다. 반면, 진보 성향 비평가들은 밀레의 그림을 혁명 내지 사회전복 정신에 또 꿰맞추려고 했다. 그런데, 굳이 정치관을 따지자면 밀레는 보수에 가깝기는 했다. 단지 정치적이지도 않고, 사회 참여적이지도 않은 성향이었다. 외려 그렇게 보이는 걸 극도로 경계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래서인지 밀레는 언론이 자신을 사회주의자, 혁명주의자라고 칭할 때마다 "나를 대체 왜 그런 사상과 연결 짓는지 모르겠다"고 질색했다.

‘만종’의 탄생
장 프랑수아 밀레, '만종', 1857~1859, 캔버스에 유채, 55.5x66cm, 오르세 미술관

"뎅…. 뎅…."

1857년의 어느 날, 해 질 무렵 바르비종의 산과 들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당시 로마 가톨릭 마을에선 매일 오전 6시, 정오, 그리고 오후 6시에 교회 종이 세 번씩 파동을 퍼트렸다. "…종이 울리면 말이다." 밀레는 이 소리만 들으면 어릴 적 할머니의 당부를 떠올렸다. "그게 무엇이든 하는 일을 멈추고, 기도를 올려야 한단다. 꼭 기억하렴." 밀레는 할머니의 말을 곱씹으며 고개를 숙였다. 가만히 두 손을 모았다. 살아있는 데 대한 감사, 죽은 자들에 대한 위로문을 천천히 읊었다. 밀레만 그러지 않았다. 논과 밭에 있는 모든 이가 똑같은 모습을 보였다. 이 또한 그리지 않고선 배길 수 없는 장면이었다. 그의 가장 눈물겨운 그림, 〈만종〉은 그렇게 탄생했다.

장 프랑수아 밀레, 만종(일부 확대), 1857~1859, 캔버스에 유채, 55.5x66cm, 오르세 미술관

그림을 보면, 감자밭에 있는 농민 부부가 종소리를 듣고는 가만히 기도하고 있다.

모자를 벗어 양손에 쥔 남성, 고개를 숙인 채 자기 손을 맞잡은 여성의 모습은 성스러워보인다는 표현 말고는 더할 말이 없다. 소소함과 담담함, 강인함과 서글픔을 모두 안고 있는 모습이다. 황혼 아래 이들은 단지 오늘 하루도 살아갈 수 있었음에 감사하고, 그러지 못한 많은 이들을 애도하고 있었을 터였다. 흙 묻은 옷과 신발, 쇠스랑과 수레, 감자 바구니 등 소박한 소품이 경건함과 진정성 연출을 돕는 것처럼 여겨진다. 한편, 〈만종〉을 놓곤 훗날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가 "감자 바구니에서 (죽은 아이의)관이 보인다"는 식의 말도 했다. 실제로 엑스레이 검사를 한 결과, 바구니 주변에는 직사각형 형태의 펜 선이 있었다. 다만 이게 단순히 구도를 잡기 위해서였는지, 진짜 관을 그렸다가 생각을 바꿨는지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장 프랑수아 밀레, '양치는 소녀와 양떼', 1863~1864, 캔버스에 유채, 81x101cm, 오르세 미술관

밀레는 〈만종〉을 다 그린 직후인 1860년대부터 어느 정도 삶의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특히 밀레의 1863~1864년작인 〈양치는 소녀와 양 떼〉는 오직 그림의 아름다움만으로 많은 이의 마음을 울렸다. 그림은 탄탄했다. 빨간 두건을 쓴 앳된 양치기 소녀, 고개 숙인 양과 이들을 근엄하게 보는 개의 모습에 정치가 끼어들 틈은 없었다. 단지 숭고함과 평온함, 미묘한 감동만 있을 뿐이었다. 이 그림은 완성된 그해 살롱전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보수와 진보 진영 모두 "진정한 마스터피스(걸작)"라며 작품성을 인정했다. 밀레는 1867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 그림을 걸 자격도 얻었다. 속을 알 수 없는 괴짜 화가에서 말 그대로 '농부들의 라파엘로'로 명성을 굳힌 그는 또다시 화제 몰이를 했고, 그다음 해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도 받을 수 있었다. 살롱전에서 거듭 낙방한, 뭘 그려도 의도치 않은 의심을 받던 밀레는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장 프랑수아 밀레, '자화상'

하지만 그 영광을 오래 누리지는 못했다.

1870년, 나폴레옹 3세 황제가 무모하게 프로이센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보불전쟁이 발발했다. 프랑스는 다시 혼란의 소용돌이로 빠졌다. 이 과정에서 밀레는 한때 머물렀던 셰르부르 등으로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그의 나이 쉰여섯 살이었다. 밀레의 체력은 예전 같지 않았다. 그의 건강은 차츰 악화하기 시작했다. 언젠가부터 천식이 따라붙었는데, 이 때문에 심할 때는 피를 토할 만큼 기침을 해야 했다. 그래도 밀레는 몸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면 틀림없이 그림을 그렸다. 다시 바르비종으로 온 그는 해질녘 들판에 앉아 지긋이 하늘을 보곤 했다. 그런 다음 화폭에 노을색을 칠하는 걸 말년의 낙으로 여겼다. 프랑스에서는 나폴레옹 3세 황제의 몰락 이후 제3공화정이 들어섰다. 이들은 험난한 삶을 견딘 밀레를 위대한 화가이자 사상가, 교육자로 띄웠다. 밀레에게 정부 주도의 여러 사업도 제안했다. 하지만 밀레는 뒤늦게 찾아온 세상의 호의를 소화할 힘도, 시간도 없었다. 밀레는 1875년 예순한 살 나이로 사망했다. 죽은 이유로는 결핵 등이 거론된다.

"내가 원한 건 부귀와 번영이 아니라, 평화와 안정이었다."

말년의 밀레는 이런 말을 했다. 이 또한 고요한 농촌, 소박한 농민과 노동자의 정신이자 지향점 같은 말이었다. 밀레가 죽고서 수많은 '밀레 키즈'가 생겼다. 이 중 가장 유명한 이는 빈센트 반 고흐일 것이다. "…밀레는 젊은 화가들이 모든 문제에서 의지하고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아버지 같은 존재다. 밀레는 예술에 모든 것을 바쳐야 한다고 말했다."고흐의 이 문장은, 밀레를 위한 노래의 가사로 손색이 없어보인다.

장 프랑수아 밀레, '양 떼를 지키는 목자'

〈참고 자료〉

세계인이 사랑한 불멸의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 자연과 농부, 유니온아트, 봄이아트북스

Jean Francois Millet, Connaissance Des Art, Connaissan Arts

Jean Francois Millet, His Life and Letters, Ady, Julia Mary Cartwright D., Wentworth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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